천재 작곡가 베토벤의 이미지는 광팬의 ‘망상’이 만든 것?

정은주 클래식 음악 칼럼니스트
입력2019.08.26 16:03 입력시간 보기
수정2019.08.26 16:36

우리가 아는 베토벤은 진짜 베토벤일까?

“임금이 두려워하는 것은 역사뿐이다(人君所畏者, 史而已).”
- 연산 12년 8월 14일 辛酉 5번째 기사

‘조선왕조실록’은 지난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계 역사상 독보적으로 객관적이며 자세하고 꼼꼼한 역사 책으로 그 진가를 알렸다. | 공식 홈페이지

위의 내용은 ‘연산군일기’ 중 일부로, 당시 사관이 연산군의 말을 듣고 직접 기록한 내용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객관적인 역사 책으로 선정되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조선왕조실록’. 필자도 이번 칼럼을 준비하던 중 ‘조선왕조실록’에 대해 보다 깊이 검색해볼 기회가 있었는데요. 정말 무릎을 탁 칠만큼 기가 막힌 사실에 웃었습니다. 당시 궁에서 기록하던 임무를 맡던 사관과 왕의 관계가 너무 재미있었거든요. 뭐랄까요. 조선의 왕일지라도 사관의 객관적인 의견과 기록을 막지 못했고, 절대 자신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조선의 왕 말을 거의 안 들어도 되는 유일한 사람은 사관이라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왕의 노여움을 너무 깊게 산 사관들은 유배를 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가령 아무개 왕이 “이런 것은 절대 사관에게 알리면 안 된다”라는 말을 하면 병풍 뒤에 숨어있던 사관이 그 말을 듣고 “아무개 왕이 이런 것은 절대 사관에게 알이면 안된다고 했다”라고 기록했다고 합니다. 정말 재미있지 않으신가요? 동시에 ‘조선왕조실록’이 얼마나 객관적인지에 대해서도 감탄을 자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대부분의 역사는 편파적인 리뷰인 경우가 많으니까요. 조선의 왕들은 후대에 남길 이미지메이킹을 하지 못했던 유일한 왕이 아닐까도 싶은데요. 그럼에도 이 기막히게 객관적인 조선의 역사는 산전수전 모두 겪으며 남았습니다. 조선의 왕과 그 시대는 객관적 역사의 기록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 이미지메이킹에 탁월했던 클래식 음악가들

왼쪽부터 브람스, 슈베르트. 브람스는 전기 작가에게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기록하길 요구했다. 그것이 과하다는 지적에 대해서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또 슈베르트는 청빈한 이미지를 만들고 싶어 했다. 그 과정에서 돈을 잘 벌었다는 이야기가 알려지기를 원치 않았다. | 위키피디아

서양 음악사에서 만나는 클래식 음악가들 또한 자신의 역사가 후대에 어떻게 알려질지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이미지메이킹이라고 하면 될까요. 브람스의 경우 자신의 전기 작가에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적으라고 강요하기도 했고요. 후대에 청빈한 이미지를 만들고 싶어 했던 슈베르트는 자신이 번 돈의 액수를 공개하거나 작품을 팔아 돈을 많이 번다는 사실을 숨겨왔다고 합니다. 돈 많은 사람은 청빈한 음악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겠죠.

지금부터 소개할 베토벤 또한 자신의 역사 만들기에 적지 않은 관심을 갖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평생에 걸쳐 믿을 만한 좋은 친구도 여럿 둔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글쎄요. 베토벤 전기 작가의 일인자인 알렉산더 윌록 세이어 남긴 기록에 의하면 베토벤의 성격은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베토벤은 음악의 위대성과는 달리
일상적인 생활에 있어서
주변 사람들과 끊임없이 불화를 일으켰다”
- 베토벤 전기 작가 ‘알렉산더 윌록 세이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은 이후까지 그를 위해 각종 문서의 파기와 위법 행위도 마지않았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의 유언을 행동으로 보여 준 친구가 있었다는 거죠. 이 역사만으로도 베토벤은 정말 매력적인 사람이었을 것 같습니다. 내가 죽은 후에도 날 위해줄 수 있는 친구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뿌듯했던 한 평생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토벤은 여러모로 행복한 삶을 살다 간 사람입니다.

성시연과 경기필이 연주한 베토벤 <교향곡 9번>.

베토벤은 이 작품의 초연 당시 청중의 박수 소리조차 들을 수 없는 난청에 힘겨워했다.

■ 또 다른 베토벤을 만들려던 제각각의 사람들
베토벤의 사후 청력 관련 신체 조직은 별도 수거되어 연구실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자료가 사라졌고, 아직도 행방을 알 수 없습니다. 누가 왜 가져갔을까요.

베토벤. | 위키피디아

베토벤은 음악계의 악성답게 죽어서도 그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습니다. 편치 못했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 같네요. 그는 무려 61년간 총 3차례(1827년, 1863년, 1888년)에 걸쳐 부검을 받았거든요. 당시 학자들은 부검을 통해 그가 앓았던 난청의 원인을 찾고자 했습니다. 27~8세에 시작된 난청이 점점 심해져 말년에는 10미터 밖에까지 들릴 정도의 소리를 질러야만 알아들었다고 하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기의 명작품을 쏟아낸 비밀을 연구하기 위해서였겠지요. 그러나 이런 수고에도 불구하고 난청의 정확한 원인이나 진단명을 찾지 못했습니다.

참 관에 묻힌 베토벤의 시신을 다시 꺼내 부검을 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건 불가능하니까요! 베토벤이 운명한 후, 그의 청력과 관련된 신체 조직은 수거되어 보관실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베토벤의 청력 조직 기관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심지어 연구 결과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더 황당한 것은 아직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체 누가 가져간 겁니까?

여기서 또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깁니다. 베토벤을 진료했던 의사의 기록·진단과 사망 직후의 부검 의견을 종합해서 결론을 낼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는 살아서 명예를 누린 행복한 음악가였으니, 그에 대한 진료 기록과 편지 등 자료는 충분했을 테니까요. 평생 병원을 들락날락하던 그의 기록을 살펴보는 걸로는 부족했던 걸까요?

이 의문에 대한 정확한 답변은 베토벤을 병적으로 사랑했던 한 남자, 그리고 베토벤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친구들만이 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 베토벤을 이용해 유명세를 얻은 쉰들러
약 3년 동안 베토벤의 잡일을 돕는 무급 비서를 자청했던 안톤 펠릭스 쉰들러. 그는 베토벤의 일상부터 창작까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살았던 인물이라 전해집니다. 요즘 말로 ‘베덕후’로 베토벤과의 인연을 시작했는데요. 그는 자신의 망상을 사실로 둔갑시켜 베토벤에 대한 이야기를 퍼트리고 다녔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그가 원하는 베토벤의 이미지를 만들고, 베토벤이 그에 맞지 않는 행동이든 글이든 남기면 모두 폐기해버렸습니다. 분명 그는 인류의 위대한 음악가의 기록을 파기하고 위조한 범죄자입니다.

안톤 펠릭스 쉰들러. 요즘 말로 ‘베덕’, 베토벤 덕후에서 베토벤을 이용해 유명세를 얻었던 안톤 쉰들러. 베토벤에 대한 망상과 집착으로 베토벤 연구 자료로 높은 가치를 지닌 ‘대화 수첩’을 불태워버린 인물이다. | 위키피디아

‘따다다 단~ 따다다 단~’으로 유명한 베토벤의 <교향곡 5번>. 베토벤은 이 작품을 만든 후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라는 말을 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기도 했는데요. 이 또한 쉰들러의 거짓말로 밝혀진 바 있고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op.31-2, 17번> ‘템페스트’에 대해 베토벤이 쉰들러에게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읽어보게”라는 말을 남겼다는 말도 퍼트립니다. 늘 거짓말로 사람들을 놀려먹던 양치기 소년의 최후처럼, 쉰들러의 경우도 비슷했습니다. 베토벤이 실제로 한 말일지라도 쉰들러가 전해 남긴 말은 신빙성이 상당히 낮을 수밖에 없겠죠.

대체 그는 왜 거짓말을 하고 다닌 걸까요? 당시 그는 베토벤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음악 해설자로 유명세를 떨쳤다고 합니다. 자식이 없던 베토벤의 유품 등을 팔아 돈도 벌었다고 하네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베토벤을 이용해, 자신도 성공해보려는 비뚤어진 욕망에서였을까요.

설상가상으로 베토벤과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쉰들러가 만들어 낸 베토벤의 이미지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쉰들러의 기세는 더욱 등등했을 거고요. 그가 편파적으로 편집해 남겨둔, 베토벤의 이미지를 짐작할 수 있는 몇몇 기록을 소개합니다.

런던 위그모어홀에서 ‘템페스트’ 2악장을 연주하는 김선욱.

쉰들러는 베토벤이 자신에게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읽어보라 권했다는 이야기를 퍼트렸다.

그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나는 내 예술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만 사용할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내 예술을 고통받는 인간들을 위해 사용하겠다는 정열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면서 내적인 만족감 외에는 다른 어떠한 보상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왔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지혜인지
늘 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하여 노력해 왔다.”
- 루드비히 반 베토벤

알렉산더 세이어. “베토벤 전기 작가로 살다 잠들었다”라는 영예로운 묘비명을 새긴 베토벤 전기 작가 알렉산더 세이어. 그는 쉰들러가 베토벤이 남긴 ‘대화 수첩’ 중 상당수를 폐기했다고 주장했다. | 위키피디아

베토벤이 죽은 후, 쉰들러는 베토벤을 포함한 모든 인류에게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릅니다. 바로 베토벤이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글을 주고받았던 총 400권 분량의 ‘대화 수첩’을 파기한 사건인데요. 그의 망상이 만든 또 다른 베토벤 이미지에 맞지 않아 없애버린 것입니다. “베토벤 전기 작가로 살다 잠들었다”라는 영예로운 묘비명을 새긴 베토벤 전기 작가 알렉산더 윌록 세이어는 쉰들러가 파기한 ‘대화 수첩’이 약 300권 가까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쉰들러는 1846년 137권의 ‘대화 수첩’을 베를린 왕립 도서관에 매각했습니다. 만약 베토벤과 쉰들러가 죽음 이후 그 어딘가의 공간에서 만났다고 가정해볼까요. 아마 쉰들러는 베토벤에게 크게 얻어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오히려 큰소리를 칠 법도 합니다. “나의 망상들이 지금의 당신, 베토벤을 만든 거라고요!”

힐러리 한과 디트로이트 심포니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 베토벤이 마지막까지 숨기고자 했던 것
지금부터는 실제 베토벤이 숨기고 싶어 했던 혹은 그가 만들고자 했던 그의 이미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베토벤은 평생 혼자 살다 죽었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았죠. 그가 결혼하고 싶어 했던 여성도 있었고, 베토벤에게 청혼했던 여성도 있었습니다. 베토벤의 친한 친구였던 베겔러가 베토벤에 대해 쓴 회고 중 일부입니다.

베토벤은 평생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그러나 늘 사랑에 빠져 지냈다. | 위키피디아

“베토벤은 평생 사랑에 빠져 있지 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베토벤은 도덕적으로 순수한 사랑을 추구했고, 불륜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해 불륜 행위를 했다는 소문이 있는 사람들과는 왕래조차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40대에 들어서는 창녀를 찾았다고 합니다. 머리로는 도덕적인 사랑을 갈구했지만, 마음은 또 그렇지 않았나 봅니다. 바로 이것이 그가 자신이 죽은 후에 후대에 알려지기 꺼려 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특히 말년의 베토벤은 후대에 자신에 대해 어떤 평이 내려질 것인지에 대해 깊은 고민을 했다고 전해지는데요. 성생활을 포함한 사생활에 대해 극도의 비밀을 유지해 줄 것을 가까운 친구들에게 당부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가 사망한 후 몇몇 수수께끼 같은 사건이 발생합니다.

■ 감쪽같이 사라진 최초의 부검 소견서와 질병 관련 문서들
베토벤 사망 직후, 최초 부검의였던 요한 바그너는 라틴어로 부검 소견서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하는데요. 이후 베토벤의 친한 친구인 자이프리드가 사라진 부검 소견서의 복사본을 작성했고,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학자들은 자이프리드가 객관적으로 복사본을 작성했는지 또 그것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다고 하는데요.

베토벤의 묘지. 베토벤의 최초 부검 소견서는 사라졌다. 그의 친구인 자이프리드가 사라진 소견서의 복사본을 기록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 걸까? | 위키피디아

만약 최초의 부검 소견서에 성병이나 임질, 매독 등의 소견이 존재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이러한 것들이 남겨진 자료에 의해 밝혀졌다면, 베토벤이 문란한 사생활을 즐겼다는 기록이 덧붙여졌을 겁니다. 베토벤이 가장 두려워했던 부분이기도 하고요. 결정적으로 베토벤이 쓴 비망록에는 “성병을 알고 치료하기 위해서 레구만의 책을 사야겠다”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는 베토벤이 매독뿐만 아니라 임질도 앓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매독 치료는 항생제가 발명되기 전까지 수은을 이용한 치료를 했는데요. 수은 증기를 국부에 쐬거나, 수은 연고를 바르거나, 욕조에 수은을 가득 채운 수은탕에 입욕하며 치료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체내에 침투한 수은의 독성으로 매독균을 죽이는 효과가 있었고요. 대신 많은 수은 부작용이 있었고, 사망하는 일도 종종 있었습니다. 물론 수은의 독성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던 시절이라 가능했던 치료법입니다.

또 한 사람, 베토벤의 친구인 베르톨리는 베토벤의 질병과 관련된 모든 기록과 편지를 태웠습니다. 이로써 당시 베토벤이 어떠한 치료를 받았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많은 자료를 통해 예측했던 질병 중 하나는 매독이었는데요. 만약 수은 치료를 했다는 진료 기록이 하나라도 남아있었다면 베토벤의 이미지는 지금과 달랐을까요?

조성진과 쾰른 방송교향악단이 연주하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

■ 죽음 이후에도 뜨거웠던 우정, 다시 시작된 베토벤의 역사
“사랑! 오직 사랑만이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
- 1817년 베토벤이 사랑하던 안토니의 딸 막시밀리안을 만난 날 쓴 일기 중.

베토벤이 죽은 이후 만들고 싶어 했던 이미지에 대해 그의 친구들이 보여준 헌신적인 행동은 가슴이 짠할 정도의 우정으로 가득합니다. 물론 불법과 위증 혹은 위법을 저지른 간 큰 친구들이기도 하지만요. 결국 누구에게도 밝히고 싶지 않았던 베토벤의 사생활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약 200년이 채 안 된 지금, 모두가 알게 되었지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참 행복한 삶을 살다 간 사람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비정상적인 부모와 함께 살았고, 밤새 피아노를 연습하게 하는 등 음악적 학대를 받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신동으로 위장하기 위해 2살이나 나이를 어리게 알려줬던 그의 아버지는 음악 교육에 광기가 서렸던 것 같고요. 그 덕분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가 음악사에 남긴 명작들은 그때도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울립니다. 난청 등 심각한 질병으로 고생도 많이 했지만, 그럼에도 베토벤이 이전보다 더 가깝게 느껴지는 건 저 뿐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도덕적으로 마음의 깊이가 있었고, 사람들과 불화를 만들던 사람. 늘 사랑을 갈망했고, 사랑의 소중함을 알았던 음악가. 베토벤이 파스쿠알라티 공작에게 보낸 편지에서 샴페인을 “만병통치약”으로 기록한 바 있는데요. 오늘 우리는 그와 그가 남긴 아름답고 위대한 악곡에게도 인류의 만병통치약이라는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느끼는 베토벤에 대한 인상은 어떤가요?

참고 자료 | ‘베토벤의 삶과 음악세계’ (조수철 저, 서울대학교 출판부)

<정은주 클래식 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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