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에게 주어진 범위를 뛰어넘은 ‘오펀스’ 최유하의 도약

올댓아트 정다윤 allthat_art@naver.com
입력2019.10.31 10:14 입력시간 보기
수정2019.10.31 10:17

필라델피아의 낡은 집에 단둘이 사는 고아 형제 트릿과 필립. 형 트릿은 동생 필립이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가둬둔 채 좀도둑질로 동생을 부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한 갱스터 해롤드를 납치해오는 트릿. 부유해 보이는 해롤드를 통해 한몫 잡으려는 속셈이었지만, 도리어 해롤드에게 일자리를 제안 받게 된다.

연극 <오펀스>의 줄거리다. 1983년 로스엔젤레스에서 초연된 <오펀스>는 2017년 한국에서도 초연됐다. 그런데 2년 만에 돌아온 2019년 공연에는 다른 점이 있다. 세 남자의 이야기로 쓰인 이 작품에 여성 배우들도 캐스팅된 것. 정경순, 최유하, 최수진 세 배우는 지금 성별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더 넓은 연기 스펙트럼에 도전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폭력적인 형 트릿 역을 맡아 놀라운 연기 변신을 선보인 최유하를 만나 젠더프리 캐스팅에 대한 소감을 들어 보았다.

배우 최유하. “오늘 입은 옷은 트릿이 그렇게 갖고 싶다던 네이비 블루 수트예요. 친구가 공연을 보더니 선물해줬어요.”|올댓아트 정다윤

<오펀스>에 대한 첫인상은 어땠나요?
저는 초연을 보지 못해서 대본으로 처음 접했는데, 굉장히 잘 쓴 작품이라고 생각했어요. 정말 주옥같은 대사들이 많았고요. 특히 해롤드 대사들에 위로를 많이 받으면서 메시지가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트릿이란 인물에는 어떻게 접근했나요?
대본 첫 페이지에 트릿은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이라고 적혀있어요. 왜 그런 성향을 갖게 되었는지, 과거에 어떤 일을 겪었을지를 생각하면서 캐릭터를 만들어나갔죠. 트릿의 폭력성은 90% 이상이 후천적으로 습득된 거라고 생각해요. 폭력적인 세상에서 고아인 자신을 지키기 위해 똑같이 폭력을 쓰게 된 거죠.

젠더프리 캐스팅을 할 때, 캐릭터 자체의 성별을 바꾸는 경우도 있고 캐릭터의 성별은 그대로인데 배우의 성별만 바뀌는 경우도 있어요. <오펀스>는 어떤 케이스인가요? 작품 초반엔 필립이 트릿을 ‘형’이라고 부르다가 마지막엔 해롤드가 ‘딸’이라는 호칭을 써서 혼란스럽다는 반응도 있어요.
배우들끼리 만들어놓은 설정은 이래요. 일단 트릿과 필립은 자매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일찌감치 집을 나갔고 어머니도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했죠. 트릿은 딱 하나 남은 가족인 필립과 떨어지기 싫어서 제도의 도움도 거부해요. 그래서 필립을 집에 가둬놓고 좀도둑질을 하면서 단둘이 살아가게 된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살아남기 위해 세상에 부딪혀본 결과, 낮은 계급의 여자로 살아가는 게 불리하단 걸 깨닫게 돼요. 그래서 긴 머리나 2차 성징이 왔을 때의 신체적 특징을 하나하나 없애거나 가리게 됐죠. 필립한테도 ‘형’이라고 부르게 하고요.

해롤드도 마찬가지예요. 여성으로서 갱스터 무리에서 살아왔지만 그 속에서도 유리천장이 있었겠죠. 그걸 뚫지 못해서 시카고에서 필라델피아에 올 수밖에 없었던 거고요. 거기서 자기랑 똑같이 살 수밖에 없었던 여자아이 트릿을 만나요. 트릿이 여자로 불릴 수 없었던 이유를 직감적으로 알았고, 그래서 마지막에 ‘딸’이라고 불러주는 거예요. 이런 설정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혼란스러울 수도 있지만, 사실 이게 한국이라서 생긴 혼란이라고 생각해요. 원래 대본에는 ‘딸’ ‘형’ 이런 호칭이 없거든요. 저희가 이런 설정을 해놓긴 했지만 남자, 여자보다는 그냥 인간으로서 트릿, 필립, 해롤드를 봐주시면 가장 좋을 것 같아요.

연극 <오펀스> 공연 장면. 해롤드 역의 정경순(왼쪽)과 트릿 역의 최유하|레드앤블루

젠더프리 연기를 하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이 작업의 90%가 정말 재미와 즐거움밖에 없었어요. 제가 평생 배우로서 연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범위를 벗어나는 연기를 많이 해보고 있거든요. 저는 즐거움, 슬픔 등 많은 감정을 무대에서 표현해봤지만, ‘분노’에 대해서는 이 정도까지 표현할 수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여성 캐릭터가 분노하는 장면의 지시를 보면 ‘삭힌다’, ‘울분을 토한다’, ‘소리를 지르며 암전’ 이 정도거든요. 사실 의상부터가 그렇게 행동에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고요. 트릿처럼 시종일관 온몸을 써가며 분노하는 배역은 처음이에요.

그렇다면 나머지 10%는요?
10%의 힘든 점은 제가 잘 훈련되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걸 깨닫는 과정이었어요. 예를 들면 제가 처음에 어깨를 너무 똑바로 펴고 바른 자세를 해서 트릿 같은 느낌이 안 났거든요. 그때 박지일 선생님이 “박정복 배우처럼 거북목을 해 봐라”라고 하셨어요. 보통 트릿 같은 거리의 날강도 역할은 주로 남자 배우들에게 주어지잖아요. 그래서 남자 배우들은 그런 껄렁껄렁한 자세가 바로 나오는데, 전 그런 준비가 안 되어있더라고요. 그런데 지금까지 저는 “배우라면 어깨를 잘 펴고 똑바로 걸어야지” 하는 말들만 듣고 배워왔거든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가 들어온 ‘배우’라는 건 어떤 범위의 배우였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배우 최유하|올댓아트 정다윤

필립 역의 최수진, 해롤드 역의 정경순 배우와 합을 맞추는 과정은 어땠나요?
일단은 수진이랑은 10년 지기 친구라서 서로의 정서를 빨리 캐치할 수 있었어요. 경순 선배님은 캐스팅되셨단 소식을 들었을 때 수진이랑 같이 카톡 하면서 너무 행복해 했어요. 서있기만 해도 정말 멋진 마피아 같잖아요. 연습 들어가면서부터는 셋이서 이야기를 정말 많이 나눴어요. 습관적으로 나오는 ‘여자가’ ‘여자로서’ 이런 말들을 서로서로 지워주는 작업도 많이 했죠. 그보다는 ‘인간 해롤드’ ‘인간 트릿’ ‘인간 필립’이라면 어떻게 했을지 생각해보자고요.

이렇게 인물을 함께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저희를 더 끈끈하게 만들어준 것 같아요. 커튼콜이 끝나고 문을 닫고 나오면서 셋이 다 같이 깔깔 웃는데, 안 웃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어쩌면 이렇게 매 공연이 즐거울까 싶을 정도로요.

이렇게 여성 배우들끼리 깊이 있게 호흡하는 작품도 참 드문 것 같아요.
맞아요, 이전엔 이렇게까지 호흡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여성 캐릭터끼리의 관계는 대부분 주요 관계 외의 다른 관계니까요. 남자 한 명을 두고 삼각관계에 놓인 두 여자라든가. 남자들끼리 브라더후드를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은 많은데, 시스터후드를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은 너무 적어요. 우리도 친한 여자 배우들 스무 명씩 불러올 수 있는데(웃음). 그런 기회가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젠더프리 캐스팅과 관련해서 관객들의 반응 중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요?
여성 관객분들이 많이 해주시는 말씀인데요. 이전에 트릿 같은 인물을 봤을 땐 제3자로서 지켜만 봤는데, 이런 인물을 자기와 같은 성별의 배우가 연기하니까 ‘나도 저런 면이 있구나’ 하면서 공감을 하며 봤다고 해요. 이런 이야기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배우 최유하|올댓아트 정다윤

배우 최유하에게는 이번 젠더프리 캐스팅이 어떤 의미를 가지나요?
제가 근래에 <오펀스>로 이런 인터뷰들을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젠더프리 작품을 하기 전엔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하지만 받고 싶었던 질문들을 받게 해준 게 <오펀스>인 것 같아요. 이를테면 ‘그 여자 배우와의 호흡은 어떤가요? 여자 배우들끼리의 팀워크는 어떤가요? 젠더프리는 뭐가 좋은가요?’ 같은 거요. 이런 질문들을 통해 제가 말하고 싶었던 것들을 말할 수 있다는 게 너무 감사해요. 여자 배우들 마음 안에도 트릿과 같은 요소들이 다 있는데, 표출할 수 있는 텍스트는 너무나 한정적이었거든요. 젠더프리를 통해 중간 허들을 하나 넘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펀스>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는 무엇인가요?
해롤드의 대사들이 제일 좋아요. 해롤드가 필립에게 다가가는 방식들을 굉장히 배우고 싶고요. 예를 들면 필립이 자긴 신발 끈을 못 묶는다고 부끄러워하니까 해롤드가 “신발 끈 X까라 그래, 로퍼라는 게 있어”라고 하거든요. 그런 게 참 유머러스하고 어른스럽고 따뜻한 방식인 것 같아요.

결말 이후 트릿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연습 기간과 공연 초반에는 확고하게 생각했어요. 얘는 약쟁이가 됐거나 자살했거나, 말로가 좋지 않았을 거라고요. 그런데 개막 일주일 후부터는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었고, 지금은 무조건 해피엔딩일 거라고 생각해요. 이건 관객들이 주시는 힘의 영향인 것 같아요. 커튼콜 때 춤을 추잖아요. 전 그게 그냥 커튼콜에서 하는 서비스 장면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관객분들이 행복해하시는 게 느껴지니까 너무 후련한 거예요. 그 춤을 추고 나면 ‘트릿은 행복했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배우 최유하|올댓아트 정다윤

다른 작품에서 젠더프리 연기에 도전할 수 있다면 탐나는 역할이 있나요?
악역을 해보고 싶어요. 여자, 남자 안 가리고 모두에게 통하는 치명적인 마성의 악역(웃음). 이를테면 영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의 레스타(톰 크루즈)처럼요.

유튜브에 직접 만든 단편영화를 올리기도 하시는데요. 영상 제작은 어떻게 하게 되었나요?
제가 하고 싶었던 말들이 있는데, 그걸 유머러스하고 재밌게 풀어내고 싶었어요. 그런데 공연으로 올리려면 극장도 대관해야 하고 골치가 아프잖아요. 근데 영상은 요새 많이들 1인 미디어로도 운영하니까 어렵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만들게 됐고요. 2019년에 할 수 있는 최고의 자기 표현 수단인 것 같아요.

지금도 봄에 찍었던 작품을 편집하고 있어요. <첫사랑 트위스트>라는 작품인데요. 첫사랑을 소재로 한 여러 작품들이 다 너무 지겨워서 만들게 된 작품이에요. 첫사랑 좋죠, 그런데 그걸 너무 아름답게 포장하고 왜곡하는 게 싫었어요. 첫사랑이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흘러가지 않았다고 해서 그 대상을 욕하는 것도 싫었고요. ‘너희의 첫사랑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어. 생쇼하지 마’ 이런 주제고요(웃음). 40분이나 되는데 재밌게 편집하고 있습니다.

최근 영화(<이기적인 남자>), 드라마(<매드독>) 등 무대 외의 분야에도 진출했는데요. 무대와는 어떻게 다르던가요?
연기적으로 다른 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관객과의 호흡이 없다는 게 새로웠죠. 무대에선 제가 한숨을 쉬면 관객들도 같이 쉬고 펀치라인을 날렸을 때 놀라기도 하잖아요. 거기에 익숙해져 있던 저에겐 제가 연기할 때 모두가 숨죽이고 있는 영화가 색다르더라고요. 또 제가 연기한 걸 제가 볼 수 있다는 게 재밌었어요. 자기가 나온 영화 못 보는 배우들도 있는데 저는 좋아하거든요. 그 시절의 내 모습이 남겨진다는 것도 매력적이고요.

배우 최유하|올댓아트 정다윤

연기를 처음 시작했을 때 부모님이 반대하셨다고 들었어요.
지금도 똑같아요. 다만 이젠 돌이키기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제가 서른 살 되기 전까지만 해도 다른 직업을 많이 권유하셨거든요. 지금은 그러진 않고 걱정만 하시죠.

그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기를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너무 재밌어요. 재밌다고 느끼는 유일한 일이에요. 평생 다른 인물을 수백 명 연기해볼 수 있다는 게 좋아요. 이렇게 저렇게도 표현해 보고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고 고민하는 게요.

어떤 배우가 되고 싶나요? 지향점이 있다면.
영향력이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제가 어떤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냈을 때 영향력이 있었으면 좋겠고, 또 제가 배우로서 부당하고 불공평한 일을 당했을 때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영향력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예를 들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성추행 가해자인 케이시 애플렉이 남우주연상을 받았을 때, 시상자였던 브리 라슨이 박수를 치지 않았어요. 그게 너무 멋있었고 약간의 위로를 받았거든요. ‘나라면 이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배우 케이트 블란쳇이 자신을 밑에서부터 훑는 카메라맨에게 ‘남자 배우에게도 이러냐’고 물었던 것도 비슷한 경우고요. 그런 존경하는 배우들처럼 되는 게 꿈이에요.

마지막으로 <오펀스>를 찾는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제가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느낀 위로와 격려, 힐링을 똑같이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누구나 조금씩은 트릿처럼 벽을 쌓고 살아요. 당신만 그런 게 아니에요. 세상에는 이유 없이 이런 고아들을 돌봐줄 사람이 있어요. 이런 메시지들을 받아 가셨으면 합니다.

■ 연극 <오펀스>
2019.08.24 ~ 2019.11.17
서울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1관
공연 시간 150분 (인터미션 15분)
만 13세(중학생) 이상 관람 가능
박지일,정경순,김뢰하,김도빈,최유하,박정복,김바다,최수진,현석준 출연

<올댓아트 정다윤 allthat_a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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