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더 재밌는 넷플릭스 '더 프롬' 속 뮤지컬 이야기

올댓아트 정다윤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입력2021.01.05 17:40 입력시간 보기
수정2021.01.05 17:46

연말연시 성수기를 맞아 그 어느 때보다도 북적여야 할 공연장들이 코로나19로 인해 얼어붙어 있다. 예매한 티켓을 다 취소당하고 코로나 우울에 빠져 있을 뮤덕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줄 수 있는 뮤지컬 영화가 있다. 바로 2020년 12월 11일 넷플릭스에 공개된 따끈따끈한 신작 <더 프롬>이다.

제목의 ‘프롬(prom)’은 미국 고등학교에서 열리는 졸업 파티를 의미한다. 미국 하이틴 영화를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터. 턱시도를 입은 남학생과 드레스 차림의 여학생이 파트너를 이뤄 춤을 추는 장면은 하이틴 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클리셰다. 그러나 설레는 낭만과 추억의 대명사인 프롬이 모두에게 평등하지만은 않다면 어떨까? <더 프롬>은 여자친구와 함께 프롬에 참여하고 싶은 레즈비언 고등학생 ‘에마’가 학부모회의 반대에 부딪히며 생기는 일을 그린다. 그런데 에마의 사연이 SNS 화제가 되면서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이 학교에 난입한다. 등장부터 요란한 이들은 바로 4명의 브로드웨이 배우들. 한물 간 인기를 되찾기 위해 에마를 도와 이미지를 쇄신해보려는 속셈으로 찾아온 것이다.

영화 <더 프롬> 스틸

성소수자의 인권 문제를 유쾌한 뮤지컬 넘버로 풀어낸 <더 프롬>은 2010년 미국 한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실화에서 영감을 얻은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원작으로 한다. 원작 뮤지컬은 2018년 개막해 1년을 못 채우고 폐막했지만, <글리>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등을 만든 할리우드 스타 제작자 라이언 머피의 눈에 들어 넷플릭스 영화로 재탄생하게 된다. 이야기의 중심은 레즈비언 고등학생 에마지만, 브로드웨이 배우 4명의 이야기도 비중 있게 그려진다. 메릴 스트립, 니콜 키드먼, 제임스 코든, 앤드루 래널스 등 화려한 스타들이 연기하는 이들은 ‘진상 셀럽’이지만 미워할 수만은 없는 개성과 매력을 보여준다. 주요 인물들이 뮤지컬 배우인 만큼 작품에는 뮤지컬에 대한 언급과 농담이 잔뜩 나온다. 뮤덕이라면 아는 작품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입가에 미소가 스쳤을 터. 오늘은 알고 보면 더 재밌을 <더 프롬> 속 뮤지컬 이야기들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예매율도 이런데 평론까지 이 난리면 막 내리란 소리야.”

영화 <더 프롬> 스틸

<더 프롬>은 한 뮤지컬의 개막 기념 파티를 배경으로 시작된다. 뮤지컬의 제목은 <엘리너>. 전 영부인인 엘리너 루스벨트의 일대기를 다룬 가상의 뮤지컬이다. 주연을 맡은 왕년의 뮤지컬 스타 디디 앨런(메릴 스트립 분)과 배리 글리크먼(제임스 코든 분)이 참석한 이 파티는 작품의 평론이 하나둘씩 공개되면서 점차 분위기가 얼어붙기 시작한다. 평론이 하나같이 악평 일색이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뮤지컬을 봐온 관객이라면 익숙하지 않은 풍경일 수도 있겠다. 한국에선 언론 매체의 평론이 이처럼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진 않으니까 말이다. 한국 관객들을 예매처로 이끄는 더 큰 요소는 캐스팅과 입소문인 듯싶다.

그러나 브로드웨이에선 SNS의 영향력이 커진 21세기에도 여전히 전통적인 매체의 평론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입김이 센 매체는 <더 프롬>에서도 언급되는 뉴욕 타임스다. 브로드웨이 뮤지컬들은 공식 개막 전에 1~2달 정도 ‘프리뷰’란 기간을 두고 공연한다. 이때 관객들의 반응을 살피고 공연을 수정·보완하는데, 바로 이 프리뷰의 막바지에 평론가들을 초대하는 것이다. 보통 프리뷰 기간 동안은 엠바고를 걸어놓기 때문에, 공식 개막일인 ‘오프닝 나잇’에 리뷰가 일제히 쏟아진다. 그러니 관계자들은 이 오프닝 나잇에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다. 평가가 좋다면 잔치 분위기가 되겠지만, 싸늘한 평을 받는다면 <더 프롬> 속 배우들처럼 충격과 좌절에 빠질 것이다.

“이게 뭐야?” / “ 드라마 데스크상 뭔지 알잖아.”

영화 <더 프롬> 스틸

에마를 돕기 위해 인디애나주에 도착한 브로드웨이 배우들. 그러나 뉴욕에서 최고급 대우만 받으며 살아왔던 셀럽들에게 작은 시골 마을의 호텔이 성이 찰 리 없었다. 이에 디디 앨런은 스위트룸을 내놓으라며 자기 가방 속에서 트로피 두 개를 꺼내 보여준다. (여행에 트로피를 갖고 다니다니, 대단한 나르시시스트가 아닐 수 없다!) 뒤따라온 배리도 이에 질세라 자기 트로피를 꺼낸다. 그러자 디디는 비웃듯 이게 뭐냐고 묻고, 배리는 “드라마 데스크상 뭔지 알잖아!”라며 발끈한다.

브로드웨이 시상식에 대해 잘 모른다면 어리둥절할 수 있는 장면이다. 디디 앨런이 처음 꺼내 보여준 트로피는 토니상 트로피다. ‘브로드웨이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토니상은 전 세계 뮤지컬계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시상식이다. 앞서 말한 평론과 마찬가지로, 토니상은 한 작품의 생사가 걸려 있는 시상식이기도 하다. 반응이 시들했던 작품이라도 토니상에서 수상을 하면 흥행 대박이 날 수도 있고, 반대로 토니상에서 외면당한다면 그대로 쓸쓸히 폐막 수순을 밟기도 한다. 그러니 지금은 한물갔을지라도 왕년에 토니상을 2개나 받았던 디디는 꽤나 대단한 배우인 셈이다.

드라마 데스크상 역시 브로드웨이의 대표적인 시상식 중 하나다. 500석 이상 규모의 작품만 시상하는 토니상과 달리, 더 작은 규모의 작품까지 대상으로 하는 것이 특징이다. 토니상보다 몇 주 일찍 치러지기에, 토니상 결과를 점쳐보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드라마 데스크상 수상 역시 영예로운 일이지만, 아무래도 토니상보다는 그 위상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더 프롬>의 디디는 이 점을 갖고 배리를 놀린 것이다.

“이성애자도 브로드웨이 좋아합니다.”

인디애나주에 도착한 디디는 예상치 못했던 팬을 만난다. 바로 에마가 다니는 고등학교의 교장 톰 호킨스다. 이런 팬은 처음이라는 디디에게 교장은 “이성애자도 브로드웨이를 좋아한다”고 대답한다.

이는 ‘게이들은 뮤지컬을 좋아한다’는 미국의 뿌리 깊은 스테레오타입 때문에 나온 말이다. 미국 영화나 드라마엔 이성애자 남자들이 같이 뮤지컬을 보러 갔다가 오해를 받는 에피소드가 종종 등장하기도 한다. 2011년 토니상 시상식에선 사회자인 닐 패트릭 해리스가 ‘브로드웨이는 더 이상 게이만을 위한 곳이 아니에요(It’s Not Just for Gays Anymore)‘란 농담이 담긴 축하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닐 패트릭 해리스 역시 커밍아웃한 게이라는 점이 이 농담의 화룡정점이다.)

사실 이 스테레오타입은 완전히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다. 실제로 브로드웨이와 뮤지컬 디바들은 게이 남성들의 문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 유래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남자들도 달콤한 러브송을 부르며 춤을 추고, 여자들도 목청껏 소리 높여 노래하는 뮤지컬의 특성 자체가 기존의 성 역할 구분을 흐릿하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뮤지컬 영화 <오즈의 마법사>를 시발점으로 보기도 한다. 영화의 주인공 도로시를 연기한 주디 갈란드는 가장 유명한 게이 아이콘 중 한 명이다. 게이 남성끼리 서로를 지칭하는 은어로 ’도로시의 친구(Friend of Dorothy)‘란 말을 써왔던 역사도 있다. 실제로 영화 속 노래 ’Over the Rainbow‘는 무지개가 성소수자의 상징이 되는 데 일부 영향을 주기도 했다.

주디 갈란드에 이어 게이 아이콘이 된 뮤지컬 디바로는 갈란드의 딸인 라이자 미넬리를 비롯해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베트 미들러, 패티 루폰, 버나뎃 피터스 등이 있다. <더 프롬> 속 디디 앨런 역시 수많은 게이 팬을 거느렸다는 설정이다. 이성애자인 교장이 팬이라고 고백하자 디디가 놀랐던 것은 이러한 까닭이다.

<더 프롬> 중 디디 앨런 역의 메릴 스트립이 부르는 ‘It’s Not About Me‘|유튜브

“롱에이커 극장에서 한 장광 연설 덕분에?” / “한참 공연하는 도중에 핸드폰이 울리면 나도 어쩔 수 없지.”

인디애나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디디 앨런이 옛날의 인기를 잃은 이유가 밝혀진다. 과거 공연 중 핸드폰 소리가 들려오자 공연을 중단하고 관객들에게 장광 연설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다 그 핸드폰의 주인은 다름 아닌 디디 자신이었다! 가발 속에 핸드폰이 들어있는 걸 몰랐던 것이다.

황당한 이 이야기는 실제 브로드웨이에서 큰 화제가 됐던 일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듯하다. 배우 패티 루폰이 2009년 뮤지컬 <집시> 공연 중 무단으로 사진을 찍는 관객을 발견하자 노래를 멈추고 관객을 저격하며 소리를 질렀던 사건이다. 심지어 루폰은 작품의 클라이맥스인 넘버 ‘Rose’s Turn‘을 부르던 중이었다. 루폰의 연설은 2분씩이나 지속됐다. 당시 브로드웨이 팬들의 반응은 “규칙을 어기고 출연자와 다른 관객들을 방해한 사람에게 마땅한 ’사이다‘ 처사였다”는 반응과 “아무리 그래도 공연을 중단한 건 프로페셔널하지 못했다”는 반응으로 갈렸다. 어찌 됐든 패티 루폰은 이 사건으로 브로드웨이에서 따라올 자가 없는 독보적인 캐릭터가 됐다.

<더 프롬>의 디디에게선 이외에도 패티 루폰으로부터 모티브를 따온 점이 많이 보인다. 벨팅 창법으로 유명한 점이나, <에비타>의 에바 페론을 연기했다는 점, 그리고 게이 팬이 많다는 점 등이다. 참고로 대사에 언급된 ’롱에이커 극장‘은 원작 뮤지컬 <더 프롬>이 공연됐던 극장이다. 원작 팬들을 위한 작은 팬 서비스로 넣은 듯하다.

“인생은 드레스 리허설이 아냐.

<더 프롬> 중 ‘Tonight Belongs to You’|유튜브

프롬을 앞둔 에마를 변신시켜주기 위해 배리는 쇼핑 파트너를 자청한다. 저마다 프롬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부르는 밝고 유쾌한 넘버가 바로 ’Tonight Belongs to You‘다. 중독성 있는 이 곡의 후렴구 가사는 ’보편적인 진실 하나 / 인생은 드레스 리허설이 아냐‘인데, 여기서 드레스 리허설이란 무엇일까?

드레스 리허설은 공연을 올리기까지 거쳐가는 수많은 리허설 과정 중 가장 마지막 단계의 리허설을 의미한다. 본 공연과 똑같이 의상을 갖춰 입고 하기 때문에 ’드레스 리허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무대 전환과 옷을 빨리 갈아입는 ’퀵 체인지‘를 비롯해 모든 과정이 원활하게 이뤄지는지를 체크하는 과정이다. 러닝타임과 인터미션을 비롯해 모든 것이 본 공연과 동일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홍보를 위해 드레스 리허설을 언론이나 일부 관객에게 공개하는 경우도 있다. 뮤지컬 <몬테크리스토>의 경우 코로나19로 인해 공연이 중단된 동안 드레스 리허설 영상을 유료로 온라인 상영하기로 했다.

“넌 엘피, 난 글린다.”

역시 위의 넘버 ’Tonight Belongs to You‘에서 배리는 에마에게 “넌 엘피, 난 글린다”라고 노래한다. 이들은 누구일까? 엘피는 ’엘파바‘의 애칭으로, 뮤지컬 <위키드>의 주인공인 초록 마녀의 이름이다. 글린다는 엘파바의 절친이다. 대학 룸메이트로 만난 엘파바와 글린다는 처음엔 달라도 너무 다른 성격 때문에 사사건건 티격태격한다. 하지만 한 무도회를 계기로 두 사람은 친구가 된다. 만인의 사랑을 받는 ’인싸‘인 글린다는 자기 나름의 호의의 표시로 엘파바를 예쁘게 꾸며주겠다고 결심한다. 이때 부르는 노래가 팝스타 미카가 리메이크하기도 한 유명한 넘버 ’Popular‘다. <더 프롬>의 배리도 이 장면을 염두에 두고 에마와 자신을 엘피와 글린다에 빗댄 것이다. 참고로 뮤지컬 <위키드>는 2021년 2월 한국 라이선스 공연이 예정되어 있으니, ’진짜‘ 엘피와 글린다의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이라면 놓치지 말 것.

“20년간 코러스를 했는데 아직도 록시 역은 안 된대.”

영화 <더 프롬> 스틸

디디, 배리와 함께 인디애나주로 향한 브로드웨이 배우 중에는 만년 앙상블인 앤지 디킨슨(니콜 키드먼 분)도 있었다. <엘리너> <달을 삼켜라> 등 <더 프롬>에 언급되는 많은 뮤지컬이 가상의 작품이지만, 앤지가 출연하는 작품 <시카고>는 누구나 알 만큼 유명한 실제 뮤지컬이다. 앤지는 언젠가 주인공 록시 역을 맡을 날만 기다리며 20년째 앙상블만 맡고 있다. 록시를 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앤지가 등장할 때 밟는 스텝마저 록시의 유명한 동작이다. 앤지가 에마를 북돋아주기 위해 부르는 넘버 ’Zazz‘는 대놓고 <시카고>의 ’All that Jazz‘를 패러디한 재즈풍의 노래다. (니콜 키드먼이 20년씩이나 주연을 못 맡다니, <더 프롬> 속 뮤지컬 세계는 꽤나 혹독한 곳인가 보다!)

<더 프롬> 중 앤지 역의 니콜 키드먼이 부르는 ‘Zazz’|유튜브

“스티븐 손드하임에게 부탁해요. 내 스위니 토드 역을 좋아했죠.“

뮤지컬 배우답게, 에마를 돕기로 결심한 네 배우가 가장 먼저 고민한 것은 ’어떤 주제가를 쓸 것이냐‘였다. 이때 트렌트(앤드루 래널스 분)는 스티븐 손드하임에게 주제가를 의뢰하자고 제안한다. 손드하임이 자신이 연기한 스위니 토드를 좋아했다면서 말이다.

스티븐 손드하임은 <스위니 토드> <컴퍼니> <어쌔신> <숲속으로> 등을 만든 브로드웨이의 전설적인 작곡·작사가다. 흥행성이나 대중성 면에서는 다소 떨어지지만, 브로드웨이의 관계자와 마니아들 사이에서 그의 위치는 그야말로 ’신(神)‘이다. 그러니 배우로 자리 잡지 못해 바텐더로 일하고 있는 트렌트가 손드하임을 들먹인 것은 꽤나 허무맹랑한 허풍인 셈이다. (나중 가선 손드하임이 자신의 스위니 토드를 좋아한 적이 없다고 이실직고한다.)

참고로 트렌트를 연기한 배우 앤드루 래널스는 <스위니 토드>에 출연한 적 없다. 그의 브로드웨이 대표작은 <북오브몰몬>과 <헤드윅>, 그리고 넷플릭스 영화로도 제작된 연극 <보이즈 인 더 밴드>다.

<올댓아트 정다윤 에디터 allthat_a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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