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하씨의 이야기
7만1200원
1983
하루 14시간 노동의 대가, 7만원
16살, 봉제 공장에서 처음 '미싱 시다'로 일을 시작했다. 오전 8시30분부터 오후 10시까지 일하고 한 달 7만1200원을 받았다. 사장은 확성기를 들고 '물량을 맞추라'고 매일 아침 소리쳤다.
25만원
1986
'오야'가 되니 수입도 늘어
평화시장으로 옮겨 본격적으로 미싱을 시작했다. 시다 8~9만원, 미싱보조 10~15만원을 거쳐 '오야'가 되니 한 달 월급 25만원이 떨어졌다.
35만원
1988
호황으로 수입도 빠르게 늘어
1980년대에는 수출 호황으로 일이 넘쳐 밤 11시까지 일할 때도 많았다. 수입도 빠르게 늘었다. 한 달 평균 35만원씩도 벌었다.
100만원
1991
처음 100만원을 손에 쥐다
스물여섯 살에 처음으로 한 달 100만원을 손에 쥐었다.
250만원
1997
재봉틀로 딸을 키우다
배우자를 잃고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한 달 250만원까지도 벌었다. 호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곧 외환위기가 닥쳤다.
174만원
2013
일감이 없어 식당 일을 했지만
일감이 떨어져 인력사무소에서 소개받은 식당에서 일했다. 12시간 일하고 5만8000원을 손에 쥐었다. 식당 사장은 대청소까지 시켰는데, 3일째 눈물을 쏟았다. 한 달을 겨우 버티고 일감이 오자마자 재봉틀로 돌아갔다.
200만원
2017
재봉틀 앞 35년, 여전히 하위 20%
35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루 14시간 넘게 일한다. 일이 있는 달, 없는 달 평균을 내면 200만원 정도의 소득을 올린다. 1988년 35만원에 비해 5배 정도다. 같은 시기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17배 늘었다.
THE END
50만원
1990
10시간 일하면 숟가락 든 손이 떨렸다
배우자와 헤어지고 두 아들을 키우기 위해 처음 일을 시작했다. 자기 공장에서 그릇에 라벨을 붙였다. 하루 10시간씩 일하면 저녁상에서 수저가 떨렸다. 한 달에 두 번은 일요일에도 나갔다. 월급은 50만원.
75만원
1995
한 달 벌어 한 달 사는 삶
상경 후 지퍼 공장에서 일했다. 종일 쇳가루가 날렸다. 퇴근해도 쇳내가 가시지 않았다. 월급은 75만원. 돈을 아끼려고 회사 근처 반지하 전세방에서 점심을 해결했지만 두 아들을 키우기에 월급은 부족했다.
120만원
1996
살면서 가장 많은 소득을 올린 시절
종로의 한 중식당에서 일하면서 월 120만원을 받았다. 동종 업계의 비슷한 연령대보다 월급이 높은 편이었다. 처음으로 월 3만원 적금을 들고 세탁기도 샀다. 살면서 가장 많이 받던 때였다고 기억한다.
80만원
1998
다시 월급은 내리막길로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중식당을 그만뒀다. 집에서 가까운 한 공장에 취직했다. 월 80만원. 그러나 프레스에 손가락이 물렸다. 오른쪽 검지 뼈가 으스러져 수술을 받았다. 약간의 돈만 받았고 산재 신청은 못 했다.
100만원
2000
비교적 쉽다고 생각했던 일은...
부동산 텔레마케터를 시작했다. 전화만 돌리면 100만원을 주니 흥이 났다. 오래가진 못했다. 어느 날 출근하니 사장이 사기죄로 잡혀들어가 있었다. 기획부동산 사기였다. 석 달 치 월급을 떼였다.
110만원
2006
요양보호사 일을 시작하다
요양보호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하루 두 케이스(가사간병 4시간, 장기요양 4시간)를 맡아 일하면서 월 110~120만원을 벌었다.
90만원
2017
돌고 돌아, 하위 10%
정부 정책이 바뀌면서 근무시간이 줄었다. 급여는 90만원으로 줄었는데 실제 일하는 시간은 줄지 않았다. 요양보호 일은 시간을 딱 맞추기가 어렵다. 한때 하위 20%를 벗어났던 그의 소득은 하위 10%다.
THE END
50만원
1989
열심히 일해 '집 사겠다'는 꿈으로
남편 소득만으로는 늘 생활이 빠듯했다. 옆집 교사 월급이 17만원인 걸 보고 '저리 벌면 집 사겠다' 싶어 취업에 나섰다. 막국숫집, 봉제 공장 등을 전전했다. 1989년에는 인터폰 제작 공장에서 월 50만원을 받았다.
70만원
1993
컨베이어벨트와 함께 흘렀던 청춘
'한국 리데이'라는 회사에서 한 달 70만원을 받았다. 지하철이나 버스 등 자동문에 들어가는 부품을 만드는 회사였다.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움직이는 부속품을 조립하거나 완성품을 검수하는 일을 했다.
80만원
1995
'한 달만, 두 달만' 어린이집에서 10년
구립 어린이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월급은 80만원이었다. 10년 일하는 동안 월급은 100만원까지 올랐다. 소득 하위 30% 정도에 해당했다.
70만원
2005
직장을 잃고, 용역 노동자가 되다
어린이집이 통폐합되면서 직장을 잃었다. 인천대에서 용역노동자로 청소를 시작했다. 월급은 70만원으로 떨어졌다. 당시 대학이 직접 고용한 미화원들이 남아있었는데 그들은 3배의 월급과 각종 수당을 받았다.
152만원
2017
12년 동안 69만원 오른 월급
월급명세서에는 152만5380원이 찍혔다. 2014년에는 10만원 삭감, 2015년에는 동결됐다. 한 번은 월급이 안 나와 학교본부를 찾아갔더니 "당신네 회사 가서 받으라"고 했다. 용역회사는 대구에 있다. 그나마 매년 바뀐다.
THE END
100만원
1987
남부럽지 않았던 정규직 청소노동자
처음 김포공항에서 청소 노동을 시작했다. 정규직이었고 월급은 100만원 가량 나왔다. 상여금도 있었고 학자금 지원, 주택조합 가입까지 됐다.
60만원
1998
외환위기와 함께 비정규직으로 전락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용역회사 직원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정규직 혜택은 모두 사라졌다. 첫 달 급여명세서에는 60만원이 찍혔다. 충격이었다. 생계를 위해 퇴근 후 식당에서 서빙과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120만원
2003
월급은 조금 올랐지만 여전히
김포공항에 다시 국제선이 취항하면서 들어온 용역회사는 월급 120만원을 줬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전 상위 20%에 속하던 소득은 여전히 하위 20%에 머물러 있었다.
170만원
2017
물가는 치솟고 월급은 제자리
지금 강씨의 월급은 170만원 정도다. 2003년에 비해 50만원 올랐지만, 같은 기간 소비자 물가가 1.37배 오른 걸 감안하면 제자리다. 그는 "지금 받는 월급보다 2003년 받은 120만원이 더 크게 느껴진다"고 했다.
THE END
150만원
월급 증가
2조
GDP 증가
"35년 재봉틀을 돌리고도 하위 20%"
미싱사 장경하씨가 말하는
어떤 사람들은 최저임금이 오르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떠들지만, 이들이 바라는 월급은 그리 많지 않다.
"…많은 돈을 바라는 건 아닙니다. 다만 일이 안정적이었으면 좋겠어요. 봉제공장에서 일할 때 야학에 다녀본 것이 전부이지만, 요즘 저는 시를 씁니다. 글을 쓰면서 '아,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하는 소소한 즐거움을 느낍니다."
"…일하는 시간을 더 늘려도 되니 한 달에 150만원은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몸이 허락하는 한 요양보호사로 계속 일할 생각입니다. 여러 가지 일을 해봤지만 지금 하는 일이 나에게는 천직이에요."
"…190만원 정도는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자식 뒷바라지 끝에 노후 대책은 이제 시작입니다. 몸은 멀쩡하지만 나이가 다 돼 일을 관둬야 하는 나이가 오니 걱정입니다."
"…200만원 정도를 희망합니다. 열심히 공부해 들어온 정규직만큼 많이 받겠다는 게 아니라 그저 일한 만큼, 나라에서 주라는 만큼, 용역회사가 떼가는 만큼은 받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