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사원증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옛 대한조선공사(한진중공업)의 사원증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23733’ 사번과 함께 스물셋 김진숙의 사진이 있다. 이 사원증을 쓰기 시작한 것은 입사한 뒤 2년이 지난 1983년. 그전까지는 종이로 된 출퇴근 카드를 썼다고 한다.
“출퇴근 카드에 사번, 이름, 날짜가 적혀 있죠. 타각기에 ‘찰칵’ 하고 찍으면 출근이 기록됩니다. 우리가 지나다녔던 서문의 벽에 카드가 ‘쫘악’하고 붙어있었어요.
카드를 찍을 때마다 ‘내가 저녁에 이 타각기를 찍고 퇴근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죠. 워낙 사고도 잦고, 죽는 사람도 많았으니까. 퇴근할 때마다 ‘오늘 하루도 살았구나’ 생각하게 하는 출근 카드였어요.”
그렇게 출근을 해 일을 하던 어느 날, 사원증을 만든다며 회사에서 갑자기 사진을 찍자고 했다. 눈가에는 용접 불똥이 튀어 생긴 흉터가 있고 얼굴은 지금보다 살이 붙은 모습이다. 굳게 닫은 입술로 무뚝뚝해 보이기도 한다. “당시에는 기쁠 일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서인지 조선소를 배경으로 찍은 다른 사진도 하나같이 웃음기가 없는 얼굴이다.
조선소 생산직 노동자들은 그 시절 화장실이 없는 환경에서 일했다. 조선소 배 밑에서 볼일을 봤다. 식당도 없었다. 쥐들이 지나다니는 현장의 어딘가에서 꽁보리밥을 공업용수에 말아 먹었다.
“인간의 기본이 먹고 싸는 것인데 화장실을 안 만들어 줬다는 건 (노동자들이) 인간의 자격이, 가치가 없었다는 것인지…. 관리직이 일하는 곳에는 식당이랑 화장실도 번듯하게 있었어요.”
작업을 하다 임시로 용접해 놓은 철판이 떨어져 그를 덮치기도 했다. 김진숙은 자서전 <소금꽃나무>에 그 순간의 기억을 “‘죽나 보다’ 그 네 글자를 떠올릴 틈도 없어 죽네, 했던 그 섬광 같던 찰나에 왜 오히려 편안한 느낌이 들었는지 지금도 기이하다”고 적었다. 지금도 철판에 깔린 양쪽 발목은 겨울만 되면 시리고, 아리고, 저리다.
야근과 철야가 일상이었던 젊은 노동자
‘시다’(재단사 보조) ‘아이스크림 장사’ ‘우유 배달’ ‘122번 버스 안내양’ 열여덟부터 김진숙은 일했다.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고, 그나마 할 수 있는 것도 조건은 열악했다. “노동 자체가 굉장히 힘들었어요. 13시간은 기본이었습니다.” 대우실업에서 재단사 보조 일을 했을 때는 “산더미처럼 쌓인 와이셔츠에 파묻혀 물집이 나도록 실밥을 따다 목표량을 채우지 못해 야근, 철야, 곱빼기 철야가 일상이었다”고 했다.
“그중 제일 힘든 건 모욕감이죠. 우리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옷 만드는 보세 공장에서는 관리자들이 여성 노동자(의 몸)들을 그냥 주물러요. 자연스러운 작업의 한 공정인 것처럼, 허가된 일인 것처럼, 다 용납되는 일인 것처럼요. 성추행, 성희롱이 일상적으로 일어났어요. ‘하지말라’는 말도 못 해요. 비명을 지르거나, 짜증만 내고 지나가 버리는 일도 많았고요.”
버스 안내양은 그의 어머니가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했던 일이다. 김진숙은 <소금꽃나무>에서 안내양으로 일했던 시간을 이렇게 말한다.
1976년 등교시간에 초만원을 이룬 버스에 매달린 안내양을 밀어주는 경찰과 승객들. 버스 안내양은 김진숙의 어머니가 "절대 해서는 안 된다" 고 했던 일이었다. 여성 노동자에게 성추행, 성희롱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순진하고 세상 물정을 몰라서라기보단, 무력했다. 무력하기 짝이 없다 보면 타협하게 되고, 타협에 길들다 보면 그게 사는 요령이라고 믿게 된다. 인간임을 끊임없이 부정당하다 보면 스스로 부정하게 되고 오로지 연명하는 일이 지상과제이자 존재 이유인 이들에게 인간의 품위와 계급적 자존감이란 성가신 일일뿐이다.”
안내양들은 퇴근할 때 요금을 훔치지 않았다는 확인을 받아야 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알몸으로 검신을 당했다. 발가락까지 펴보라고 했다. 저항하면 ‘떳떳하면 왜 못 벗느냐’며 ‘경찰을 부르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치욕스럽다가 나중에는 일상이 되어버렸어요. 노동운동을 하면서 그때 생각을 하니 묵인하고, 동조하고, 싸움도 못 해보고, 말 한마디 못 해봤다는 것이 지금도 부끄러워요.”
그는 어머니의 부고조차 ‘대신 일할 사람이 없어 알리지 않았다’는 버스회사의 설명에 다시는 회사로 돌아가지 않았다.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어 조선소에 들어간 용접공
안내양으로 일하던 김진숙은 신문에서 용접공 훈련생을 뽑는다는 모집 공고를 봤다. 라디오에서 선박의 녹을 털어내는 여성들의 사연을 소개하며 진행자들이 ‘훌륭한 여성’이라고 칭찬했던 기억이 났다.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어 그는 조선소로 찾아갔다. 용접을 해본 적도 없었지만 “남성들의 일이니까 돈을 더 많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용접분야에도 여성 기술자가 진출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 현대조선은 80여명의 여성 기술자를 길러 반자동 용접 기술에 투입시켰다. 중화학 분야에 여성 기능인력이 참여한 효시였다. 1977년 2월 9일자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제공>
신발공장에서는 월급을 5만 원도 안 줬는데 조선소는 13만 원을 줬다. 1981년 입사한 그는 연수원에서 용접기능사 자격을 따고 ‘땜장이’가 됐다. 김진숙은 1977~1981년 사이에 대한조선공사 조선소에 용접공이나 절단공으로 고용된 약 100여 명의 여성 노동자 중 한 명이다. (남화숙 미국 워싱턴대 교수 책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 대부분은 기혼 여성이었고,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그가 처음이었다.
당시 용접공은 여성이 취업할 수 없는 30개 업종 중 하나였다. ‘어머니로서의 여성을 보호하고 약한 여성의 신체적 조건을 감안’해 법으로 금지한 것이다. 하지만 조선업이 호황을 맞으면서 숙련노동자 수요가 늘어났고 조선소들은 용접공 자리를 여성들에게 개방하게 된다. 여성 취업 금지 직종을 명시한 근로기준법 시행령은 1982년 이런 현실을 반영해 일부 개정됐다. 용접공, 목공, 지게차운전 등 24개 직종의 취업 금지가 풀렸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조선소는 생각과 아주 달랐다. 용접공은 잔업에 특근, 철야까지 해야 그나마 먹고살 수 있는 정도의 월급을 받았다. 그는 부당한 현실을 바꾸려고 했지만, 입사한 지 5년 만인 1986년 해고됐고 35년이 지났다.
“사원증을 아직 가지고 있는 이유는 그냥 ‘복직하면 쓸 거니까’ 하는 생각에 못 버린 거죠. 그런 꿈, 희망을 못 버렸던 거예요.”
사원증에 남아있는 초보 용접공 김진숙. 그는 2010년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하며 20대로 돌아가고 싶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강연회 때 한 여학생이 같은 질문을 했어요. 저도 모르게 학생이 무안해할 정도로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였어요. 저의 청춘은 대공분실, 해고, 수배, 감옥, 그런 기억들로 얼룩져 있으니까요.
다시 돌아간다면 좀 유치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한 시간짜리 영화 보고 서너 시간 수다 떨고 크리스마스 때 남들처럼 들떠보기도 하고. 제가 모르는 감정이 ‘연애 감정’ 같은 거예요.”
02
전태일 평전
“저의 삶을 적어놓은 듯했어요. 책을 보면 전태일 열사가 현실들을 바꾸기 위해 굉장히 노력하잖아요. 그런데 나는 뭘 하고 있는 것일까. (현실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거든요.
공장도 여러 곳 옮겨 다녔고 한진중공업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열심히 일했어요, 불량도 만들지 않고 (남보다) 먼저 진급하면 (삶이) 나아질 거로 생각했고요. 그런데 책을 보면서 아니라는 걸 느낀 거죠. 나 혼자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구나.”
20대 김진숙은 야학을 하러 다녔다. “똥 구더기 같은 현장”에서 벗어나는 길은 대학생이 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노동 야학을 갔다. 야학 선생님이었던 부산대 학생이 건네준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 전태일 평전>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처음에는 안 읽었습니다. 노동자라는 말 자체가 싫었어요. ‘험한 일을 한다’는 이미지에, 불온한 느낌도 들잖아요. 아주머니가 영정 사진을 끌어안고 우는 표지도 궁상스럽다고 느껴서 안 읽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비가 많이 와서 일을 쉬었어요. (용접공은) 난장에서 일하니까 비가 많이 오면 일을 못 하거든요. 낮에 할 일이 없어서 집에서 책을 꺼내 끄적끄적 봤죠. 저도 모르게 한 권을 다 읽었어요.”
그 시절 김진숙은 자신의 존재가 ‘벌레’처럼 느껴졌다고 <소금꽃나무>에서 썼다.
“나는 내 존재 자체가 벌레처럼 징그럽고 싫었다. 벌레가 뭘 할 수 있으며 벌레에게 무슨 희망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전태일은 너는 벌레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고 인간이 당연히 품어야 하는 희망에 대해서 절규하고 있었다. 지금보다 나은 삶이 있다는 진실이 기뻤고, 그 진실은 뭐든 할 수 있다는 용기가 돼 주었다.”
어느 날 간첩이 되어버린 젊은 용접공은 해고됐다
어용 노조에 반기를 들었던 그는 1986년 대한조선공사 노조 대의원에 당선됐다. 남성 노동자가 대부분인 조선소에서 왜 비혼의 여성 김진숙이 나섰을까.
“아저씨들은 ‘처자식 없는 네가 해봐’라고 했어요. 노동조합을 제대로 하면 어떤 일이 기다릴지 아니까 그렇게 이야기했던 거죠.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너무 절박한 문제였거든요.
사람이 너무 많이 죽었어요. 떨어져 죽은 아저씨들, 감전 사고로 죽은 아저씨들을 보면요. 썩은 밥을 먹으며 사람대접 한 번 못 받고 돌아가셨다는 생각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조선소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 노동자들을 ‘아저씨’라 부른다.
공장에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김진숙과 같은 해에 연수원 25기로 입사한 여성 용접공 황순란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회사에 빨갱이 소문이 돌았어. 일하고 있는데 회사에 ‘간첩이 나왔다’고 그래. 진숙이가 간첩이라고. 진숙이가 우리 노동자들 편에서 말을 하니까 우(위)에서 그렇게 나쁘게 말을 하더라고.”
김진숙은 어용 노조를 비판하는 유인물을 돌린 뒤 대공분실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고문도 당했다. 수많은 간첩 조작 사건이 국가 권력에 의해 벌어진 대공분실. 회사는 그곳에서 조사를 받았다는 이유로 1986년 7월 14일 그를 해고했다.
김진숙은 멈추지 않았다. 함께 해고된 이정식, 박영제와 회사 밖에서 복직 투쟁과 노동운동을 이어갔다. 시작은 ‘도시락 투쟁’이었다. “연간 8000만 원의 흑자를 내면서도 우리가 먹는 점심밥은 이대로 가도 좋단 말인가? 인간이 먹을 수 있는 밥을 위해 개밥을 거부하자.”
그가 유인물을 만들면, 회사 안 동료들이 돌렸다. 한 사람이 “느그 개나 묵이라”며 도시락을 패대기쳤다. 그러자 너도나도 부실하기 짝이 없던 도시락을 모두 거부하기 시작했다. 손도 대지 않은 도시락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복직 투쟁을 시작했고 노무현을 만났다
6월 항쟁 직후였던 1987년 7월, 노동자 대투쟁이 시작됐다. 대한조선공사의 파업은 부산지역 노동자 대투쟁을 이끌어냈던 사건이다. 임금 인상과 안전한 작업환경, 차별 중단 등을 요구하는 20개 항목을 써 붙인 대자보를 관리자들이 찢어버리자 15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농성에 들어갔다.
“아저씨들은 입만 열면 여자 이야기, 사창가 이야기였어요. 정말 싫었어요. 그런데 투쟁을 같이하면서 사람이 변해가는 것을 봤어요.
관리자만 보면 그렇게 주눅 들었던 사람들이 도시락을 엎고, 하이바(헬멧)도 삐딱하게 쓰고. 아저씨들이 웃기 시작했어요. 희망을 찾는 법을 몰랐던 것뿐이더라고요.
방법을 알게 되면 사람들이 달라지는 모습들을 저는 제 눈으로 다 봤어요. 노동자들이 얼마나 벅찬 존재인지를 알게 된 거죠.”
김진숙은 복직의 희망도 놓지 않았다. 법무부 장관과 부산시장, 김수환 추기경에게도 탄원서를 보냈다. 부산시장은 “정부에서 우리 근로자를 위하여 보다 나은 근로조건 향상에 노력하고 있으니 현실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라”고 충고했다.
대부분 답을 주지는 않았다. 노동청에 부당해고구제도 신청했다. 혼자 치른 1심 재판에서 패소하고 변호사를 찾아갔다. 왜 항소를 안 했냐는 변호사에게 그는 답했다. “항소가 뭔데요?”
그때 김진숙의 재판을 맡았던 변호사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김진숙은 입사 동기였던 박창수 등과 ‘노동자도 이론이 있어야 세상을 바꾼다’며 노동법을 공부했고 1990년 박창수는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 됐다.
1991년 5월 7일,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은 경찰은 8개 중대 1천2백여명을 투입해 영안실 인근에서 시신인도를 거부하며 농성중이던 노동자와 학생 5백여명에게 물을 뿌리고 최루탄을 쏘며 강제 진압해 시신을 훔쳐갔다. 박창수 위원장의 부검은 가족들의 완강한 거부로 입회없이 강제로 실시됐다. 1991년 5월 8일자 경향신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제공>
이듬해 박 위원장은 대우조선 노조 파업 회의에 참석했다가 ‘3자 개입’ 혐의로 구속됐다. 옥중에서 머리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같은 해 5월 사망했다.
경찰은 자살이라고 결론지었으나 고문치사 의혹이 불거지자 병원 벽을 뚫고 시신을 훔쳐 갔다. 올해 30주기를 맞은 박창수 사망 사건은 여전히 미제로 남았다.
작은 힘을 보태서 지켜야 하는 것
김진숙은 해고된 이후 지금까지 민주노총 부산지부 지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1995년 부산 동래 봉생병원 노동조합 파업에 참여하며 3자 개입 혐의 등으로 구속됐을 때 그는 항소이유서에 이렇게 썼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래도 할 수 없고 대답 없는 메아리래도 어쩌겠습니까. 힘이 약해 만날 당하고 깨지기만 하는 약자들은 본능적으로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에게 그렇게 힘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을.”
김진숙은 자신의 작은 힘이 보태져 노조를 지켜냈다면 할 수 있는 일을 해낸 것이라고 했다.
“이 땅 어느 구석에선가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가 탱크 앞에서 맨주먹으로 자기는 노예가 아니라고 외치며 대항할 때 우리가 외면한다면 도대체 우린 무엇이란 말입니까.”
03
85호 크레인
부산 영도조선소의 85호 크레인은 100t까지 들어 올릴 수 있는 지브(Jib) 크레인이었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309일간 농성했던 운전실 높이는 지상에서 35m 거리 정도였다.
“살아서 못 내려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회사를) 이기려고 올라간 건 아니었어요. 제가 기다렸던 건 129일이었어요. 김주익이 목을 맸던 날짜만 지나면 나는 내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지금은 해체돼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지만 85호 크레인은 김진숙이 올라가기 8년 전, 동료 김주익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 먼저 올라갔던 곳이다.
2003년 한진중공업은 50대 노동자 650명에 대해 명예퇴직을 실시했고, 노조는 천막 투쟁과 상경 투쟁, 삭발 투쟁, 단식 투쟁으로 해고 철회를 요구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주익 위원장은 85호 크레인에 올랐다. 그해 초가을 태풍 ‘매미’가 부산을 강타하면서 크레인이 180도 돌아가는 위험천만한 순간도 있었지만 그는 내려오지 않았고, 회사 측은 협상을 거부했다. 고공농성 129일째, 그는 크레인 난간에 목을 맸다.
2003년 10월 한진중공업 노조원들이 고 김주익 위원장이 사망한 크레인 아래 광장에서 추모집회를 열고 있다.
김주익 위원장의 시신은 드라이아이스에 파묻혀 한 달을 더 85호 크레인 위에 남았다. 동료가 떠나자 곽재규 씨는 85호 크레인 맞은편 도크에 몸을 던졌다. 꿈쩍도 하지 않던 회사는 두 사람이 죽고 나서야 협상을 시작했고 ‘대규모 구조조정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과거에 부당하게 해고된 사람들도 복직시키기로 했다. 18명의 부당해고자 가운데 17명의 복직을 합의했다. 복직 명단에는 김진숙만 빠졌다. 1986년 함께 해고됐던 이정식과 박영제는 회사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
김진숙은 “만성적이고 고질적인 부채감을 형들에게 고스란히 다시 지우는 게 아니길 바랄 뿐”이라며 두 사람의 복직을 축하했다.
해고 노동자 가운데 김진숙만 남았다
“왜 김진숙만 복직 대상에서 빠졌는지, 왜 노조가 그 합의를 해줬는지는 지금도 이해가 잘되지 않아요. 두 분이 돌아가셨고, 조합원들은 밥을 먹지 않고 술만 마시고 울기만 하는 상황이었죠. 노조가 ‘김진숙까지 복직시켜야 한다’고 얘기할 수 없는 분위기라서, 어쩔 수 없이 합의했다고 생각하지만, 저도 인간인지라 서운하기는 해요.”
그는 2021년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2003년에 나만 빼고 모두 복직됐을 때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가족이 없기 때문에, 가장이 아니기 때문에 내 존재를 노조에서조차 소홀히 취급한 면이 있었다고 본다”며 “당시 노조 간부였던 남성 동지들이 요즘 나한테 회한과 부채감을 털어놓는다”라고도 말했다.
홀로 회사로 돌아가지 못한 김진숙이 85호 크레인을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2009년 한진중공업이 필리핀 수비크에 조선소를 지으면서다. 인건비가 싼 비숙련 노동자를 투입해 배를 만들면 이윤을 더 남길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수비크 조선소의 노동자는 정규직은 많지 않았으며 필리핀 현지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회사는 수주한 물량을 부산 영도 대신 필리핀 수비크에서 만들기 시작했다. 영도 조선소에서는 또다시 대규모 정리해고가 진행됐다. 2011년 1월 6일 이번에는 김진숙 지도위원이 85호 크레인에 올라갔다.
2011년 1월 6일 새벽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영도조선소의 85호 크레인 조종석 (35m 높이)에 혼자 올라가 고공시위에 돌입했다. <연합뉴스>
“회사는 ‘구조조정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8년 만에 깨버렸어요. ‘누군가 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구나’ 생각했죠. 회사의 약속이 얼마나 기만적인지 폭로해야 했어요. 그래서 85호 크레인에 올라갔습니다.”
크레인에서 그는 400명의 정리해고를 철회하라고 외쳤다. 자신의 복직은 요구하지 않았다. 올라간 지 한 달이 조금 지나 회사는 직장폐쇄를 결정하고 생산직 노동자 172명을 정리해고했다. 그날 김진숙은 세상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다.
“저는 지금 주익 씨가 앉았던 자리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보고 간 세상의 풍경을 봅니다. 무심히 지나다니는 행인들과 분주히 오가는 차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스물여섯 살에 해고된 뒤 동료 곁에 돌아오겠다는 꿈 하나를 붙잡고 27년을 견뎌온 여성 노동자가 그 동료를 지키겠다며 다시 이 크레인에 매달려 세상을 향해 간절히 흔드는 손을 저들 중 몇 명이나 보고 있을까요?”
김진숙은 그 후 9개월이 더 지나 ‘1년 뒤 정리해고자를 복직시킨다’는 노사 합의가 이뤄지자 309일 만에 85호 크레인에서 내려왔다.
크레인은 흔적도 없이 해체되어 사라져버렸다
회사는 크레인 해체 작업에 들어갔다. 김진숙이 내려온 뒤 열흘쯤 지나서였다. 85호 크레인에 붙어있던 ‘CT85’ 명패가 떼어지고, 기둥부에 솟은 ‘지브’가 지상으로 내려왔다. 세 번에 걸쳐 크레인이 해체됐고 고철로 팔렸다.김진숙은 2021년<씨리얼>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크레인 두 개가 하던 일을 하나가 왔다 갔다 하면서 해야 하니까 지금도 (현장에서는) 일이 잘 안된다고 해요. 그런데도 회사는 (85호 크레인이) 싫은 거예요. 작업에 차질이 있거나 없거나, 손해를 보거나 말거나…. 85호 크레인도 그렇게 꼴 보기 싫은데 김진숙은 얼마나 꼴 보기 싫겠어요”
영도 조선소 정문에선 2021년 5월에도 아침마다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진중공업이 진행 중인 조선소 매각 반대 시위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지금의 위기는 100% 필리핀 수비크 조선소에 잘못 투자한 경영진의 잘못이다. 경영에서 손만 털면 아무 책임도 묻지 않으면서 무고한 노동자들더러 고통을 분담하라는 게 맞나? 노동 존중 정부라면서, 노동자들에게는 단 한마디도 묻지 않고 투기자본에 매각하려는 게 말이 되나”라고 말했다.
2011년 8월, 한진중고업과 쌍용차 등의 해고노동자로 구성된 ‘소금꽃 공동투쟁단’이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의 청문회 발언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강윤중 기자
김진숙이 크레인에 올라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진중공업은 2007~2009년 3년간 1433억 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렸다. 2010년 517억 원의 손실을 기록했지만 건설 부문에서 발생한 손실이었다.
조선 부문 영업이익률은 13.7%에 달했다. 하지만 경영상 위기라며 정리해고를 추진한 2010년 임원들의 급여는 37% 늘었고, 노동자의 임금은 6.5% 줄었다. 2011년 8월 국회 청문회에 출석한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은 “정리해고는 불가피했고 철회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조남호 회장은 2019년 한진중공업 경영에서 물러났다. 필리핀 수비크 조선소의 부실로 회사 전체가 자본잠식에 빠졌기 때문이다. 수비크 조선소는 이미 호주·미국 컨소시엄에 넘어갔고, 산업은행 등 채권단이 영도 조선소의 매각을 진행 중이다. 인수 의사를 밝힌 업체들은 조선업과 관련이 없는 사모펀드들이다.
04
희망버스
“저는 사실 여기 올라온 순간부터 정리해고 철회보다는 이 크레인을 마징가 제트로 개조하는 일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근데 자기 전에 꼭 이 크레인 아래서 외치고 가는 아저씨가 계세요. ‘절대 딴생각 하지 마이! 알았제?’ 저 아저씬 도대체 어떻게 아셨을까요?”
85호 크레인에 올라간 지 열흘이 되던 날 김진숙은 140자 멘션을 남겼다. 35m 고공 위에서 말라가던 그를 버티게 한 건 트위터였다. 스마트폰 안의 작은 화면을 통해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부산에서 고공농성이 계속되는 사이 서울에서는 해고됐던 홍익대 청소노동자들이 복귀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홍대 노동자 문제를 풀기 위해 트위터를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 ‘날라리 외부세력’과 배우 김여진이 해결을 이끌었다. 김진숙은 김여진에게 트윗을 보냈다.
어어~ 보고싶은 분이다!! 거기, 괜찮으신가요?? RT @JINSUK_85: @yohjini 여진님! 고맙소 저는 노동운동아니었으면 청소용역노동자로 살고있을겁니다 환속하면 닛빠들고가서 트윗 고쳐주께요
— 김여진 (@yohjini) February 26, 2011
“여진님! 고맙소. 저는 노동운동 아니었으면 청소용역 노동자로 살고 있을 겁니다” 김여진이 답했다. “어어~ 보고 싶은 분이다!! 거기, 괜찮으신가요??”
트윗을 주고받고 두 달 후, 김여진과 ‘날라리 외부세력’은 김진숙이 있는 영도 조선소로 향했다. 그리고 크레인 앞에서 웃고 떠들다 저녁까지 먹고 돌아갔다.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회사와도 싸우고 경찰과도 싸우는 중이었어요. 회사에서는 85호 크레인 건너편 아파트에 CCTV를 설치해 감시하고 있더라고요.
나중에 조합원들이 발견하고 철거했죠. 심리적으로 굉장히 힘들었어요. 크레인 출입문을 두들기고 부수거나 술 먹고 행패 부리며 욕하는 어용노조와 싸우는 일도 그렇고요.
‘정치적 야심으로 크레인에 올라갔다’ ‘자기 복직하려고 올라갔다’ ‘자기 세를 늘리기 위해서 올라갔다’ 이런 이야기들도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희망버스가 분위기를 바꿔놓았죠.”
2011년 7월 , 정리해고 철회 등 한진중공업 문제 해결을 바라는 2차 희망버스 참가자 1만여명이 부산역 광장에 모여 문화제를 열고 영도다리를 건너 한진중공업을 향해 행진을 하고 있다. 김영민 기자
2011년 6월11일 700명이 넘는 시민들이 16대의 ‘희망버스’에 나눠 타고 부산 영도조선소로 향했다. 해고된 기륭전자·재능교육·이랜드뉴코아 비정규직 노동자, 쌍용자동차·콜트콜텍 노동자들이 같은 처지의 김진숙을 응원하기 위해 희망버스를 기획했다. 백기완 선생과 문정현 신부 등이 희망버스 일행을 이끌고 조선소 담장을 넘었다. 김여진과 날라리 외부세력도 희망버스 대열에 합류했다. 김여진은 김진숙에게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라는 글을 적어 크레인 위로 올렸다.
“‘웃으면서’ 네 글자가 제겐 아주 거대한 깨달음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크레인에 오면 늘 울었거든요. 울다 가는 사람의 마음도 무겁겠지만 저도 마음이 무거운 거예요. 너무 힘들더라고요.
울면서는 못 싸우잖아요. 울면서는 끝까지 못 가요. 그런데 웃으면서 싸우기 시작하니까 사람들이 오고, 같이 하게 되고 그러니까 더 웃게 되고… 싸울 수 있는 힘이 거기에서 나왔던 것 같아요.”
2011년 8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촉구하는 4차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서울 용산구 한진중공업 본사 앞에서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있다.김기남 기자
뉴욕 ‘월가 점령’ 시위대로부터 온 전화
희망버스는 같은 해 다섯 번을 달렸다. 두 번째(7월 9~10일)와 세 번째(7월 30~31일) 버스는 보수단체가 길을 막고 경찰이 차벽을 쌓으며 저지했지만, 결국 김진숙이 올라간 크레인 인근에 다다랐다. 네 번째(8월 27~28일) 버스는 한진중공업 본사가 있는 서울 용산을 찾았고, 다섯 번째(10월 8~9일) 버스는 영도가 바라보이는 남포동 광장까지 왔다.
▲2012년 10월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앞에서 열린'한진중공업 정리해고자 복직을 위한 영화인 희망버스'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노래를 함께 부르고 있다. 정지윤기자 ▲2011년 6월 쌍용자동차와 유성기업 해고노동자 가족들이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희망열차'를 타고 부산을 찾았다. 김영민 기자
‘희망버스’ 외에도 청소년들의 ‘영의정 버스’, 청년들의 ‘반값등록금 버스’, 성소수자들의 ‘퀴어 버스’, 장애인을 위한 ‘장애인 연대버스’가 영도로 왔다. 2009년 쌍용자동차에서 해고된 노동자들과 가족 70여명도 무궁화호 열차 한 량을 빌려 ‘희망열차 85호’란 이름을 붙이고 부산으로 향했다.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오는군요.” 김진숙은 크레인 위에서 버스를 보며 감격했다.
“희망버스가 오면서 그야말로 ‘희망’을 느꼈습니다. 김주익 지회장(노조위원장)이 크레인에 올랐을 때는 조선소가 완전히 봉쇄돼서 외부에서 출입이 불가능했거든요. 그러다가 어느 날 조합원 3000여 명이 봉쇄된 정문을 뚫고 85호 크레인 앞에 모인 적이 있어요.”
2011년 6월 부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크레인 위에서 농성 중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김문석 기자
그때 김 위원장의 첫마디도 똑같았다.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오는군요.”그는 희망버스를 보며 김 위원장의 감정을 느꼈다고 했다.
2011년은 미국 뉴욕에서 ‘월가 점령(Occupy Wall Street)’ 시위가 열렸던 시점이었다. 금융자본의 탐욕과 경제적 불평등에 항의하며 뉴욕 맨해튼 증권거래소 인근 공원에서 점거 시위를 이어가던 젊은이들이 공개총회에 김진숙을 초대했다.
부산 영도를 전화로 연결했고 그는 “저와 여러분들의 거리는 멀지만, 우리가 투쟁하는 이유,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의 모습은 같을 거라고 믿습니다”고 말했다.
“노동이 존중받고 돈보다는 인간이 우선인 사회. 그 꿈은 하나입니다.”
희망들과 함께 살아서 내려오다
2011년 11월 10일 한진중공업 노사협상이 타결된 직후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85호 크레인에서 내려오며 두 손을 번쩍 들고 웃어보이고 있다. 서성일 기자
김진숙은 2011년 11월 10일, 309일 만에 크레인에서 내려와 지상에 발을 디디며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을 외쳤다. 다큐멘터리 <그림자들의 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희망버스 전과 후의 세상을 보는 시각이 저 같은 경우는 굉장히 크게 달라진 거죠. 그전에는 정말 네 편 내 편이 칼로 딱 잘라서 정리가 됐었거든요.
근데 희망버스에는 온갖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타고 오신, 특히나 트위터를 통해서 여러 사람들하고 소통을 해보면서는 내가 굉장히 사람들을 협소하게, 편협하게 만나왔고 우리 편끼리만 소통을 해왔다는 걸 절실하게 느꼈어요.”
그는 35m 상공에 홀로 고립된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다. 희망버스를 타고 온 시민들, 외국의 석학들과 언론들도 그를 지지했다.
그 결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한진중공업에 정리해고자를 1년 내 재고용하고 2000만 원씩 생계비를 지원하라고 권고했다.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은 권고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김진숙의 복직은 이뤄지지 않았다.
“어차피 저의 복직을 요구한 건 아니었으니 해고자로 남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05
부채
‘부채요정’.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별명이다. 사람들과 함께 무엇인가 외칠 때 그의 손에는 언제나 부채가 들려있다.
2020년 12월 30일 경남 양산의 호포역에서 출발해 2021년 2월 7일 서울 청와대 앞까지 그는 사람들과 함께 걸었다.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의 마지막 해고 노동자, 김진숙의 복직을 요구하는 ‘희망뚜벅이’다.
2021년 1월 31일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인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맨 앞)과 그의 복직을 위해 '희망뚜벅이' 28일차 행진에 함께한 노동자와 시민들이 경기 평택시내로 들어서고 있다. 김 지도위원은 재발된 암 수술을 받은 지 한 달 만에 항암치료를 거부한 채 부산에서 청와대까지 도보행진을 이어갔다. 강윤중 기자
한겨울, 400㎞를 걷는 길에도 김진숙은 부채를 들었다. ‘한진중공업 고용안정 없는 매각 반대’ 부채에 글귀를 적었다. 회사 매각을 앞두고 조선업과 무관한 곳과 매매계약이 체결돼 또다시 집단해고 사태가 벌어지면 안 된다는 의지를 담아서.
2019년 영남대 의료원 옥상에서 복직을 요구하며 농성 중이었던 동료 박문진 전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을 만날 때도 손에는 부채가 있었다. ‘박문진 힘내라’ 부산에서 대구까지 100㎞를 걷는 내내 함께였다.
“박문진이 있는 곳까지 걸어가야 하는데 뭔가 말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왜 가야 하는지, 이야기는 해야 하는데 피켓을 들고 가려니 너무 무겁고. 그런데 부채가 손잡이도 있고 재활용 의미에서 좋잖아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대로’ ‘노동 존중사회는 어디로 갔습니까?’ 그가 들었던 부채에 적었던 문구들이다. 김진숙의 부채는 연대의 상징이다.
“아직도 우리 집에 이런 부채가 열 개쯤 있으니까, 앞으로 열 번은 더 갈 수 있습니다.”
2019년 12월, 부산에서 100여 km를 걸어온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182일째 대구 영남대 의료원 옥상에서 고공농성중인 박문진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을 만나 서로를 어루만지고 있다. 공동취재단
해고된 이들을 연결하는 부채의 힘
희망버스를 타고 수많은 사람들이 김진숙의 곁으로 와주었듯이 그는 자신과 같이 해고된 노동자들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달려간다. 첫날 3명으로 시작한 ‘희망뚜벅이’는 40일 뒤 청와대에 도착할 때는 수백 명으로 늘었다. 행렬에는 유독 해고자들이 많았다.
“80년대 삼화고무, 진양고무, 풍산금속 해고자들뿐만 아니라 2020년 해고된 아시아나KO와 코레일네트웍스, LG트윈타워, 대우버스, 한국게이츠 노동자분들도 있었어요.”
2020년 그의 정년을 앞두고 복직을 요구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는 1970년대 해고자들도 있었다.
“특히 감동적이었던 것이 동일방직 여성 해고 노동자들의 성명서였어요. 그 옛날 해고되신 분들이 어떤 마음이셨을까. ‘김진숙이 복직할 수 있도록 뭐라도 해보자’라고 하는 그런 광경들이 보였어요. 그래서 너무 너무 고맙습니다. 지금도.”
▲2014년 4월, 경기도 평택시 칠괴동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내부의 70m 높이의 굴뚝에서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이창근 정책기획실장과 김정욱 사무국장이 공장 밖 동료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2009년 6월, 쌍용차노조 조합원과 가족들이 서울시청 앞 서울 광장에서 삼보일배를 하고 있는 가운데 한 어린이가 이를 바라보고 있다. 남호진 기자
그는 지금까지 2번 구속됐는데 모두 ‘제3자 개입 금지’ 혐의를 적용받았다. 지금은 사라진 3자 개입 금지는 노사협의와 쟁의행위에 제3자가 개입할 수 없도록 하는 조항이다.
유엔과 국제인권단체가 인권 침해 문제를 지적하면서 1980년 군사독재 정권이 노동 운동 탄압을 위해 만들었던 이 조항은 1997년 삭제됐다.
김진숙은 해고 노동자들에게 ‘제3자’가 아니다. ‘해고’라는 “존재를 부정당한” 같은 경험을 가진 노동자들에게 더욱 애착을 갖고 힘을 보탰다. 김진숙은 해고 노동자들에게 누나고, 언니고, 엄마이기도 하다. 일하는 일상이 간절한 이들이 ‘세상에 우리 편은 없다’고 느낄 때 “걱정하지 말라”며 토닥여 주는 사람이다.
“정신적으로 힘들 때마다 김진숙 지도위원 연설을 들으면서 다시 마음을 부여잡는 계기가 됐어요.”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
“대법원에서 패소했을 때 기댈 사람도 없고 막막했습니다. 그때 김진숙 지도위원한테 전화했던 기억이 나요.”
(김승하 전 철도노조 KTX열차승무지부장)
쌍용차와 KTX 노동자들은 김진숙과 동시대에 해고자의 시간을 보냈다. 쌍용차 해고자들은 모든 ‘희망버스’에 올라타 김진숙을 응원했다.
두 번째 희망버스가 출발했을 때는 평택에서 부산까지 걸어서 내려갔다. 고공과 지상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는 못했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대규모 정리해고에 맞서 싸웠다.
해고는 살인이다
일하던 회사에서 일방적으로 통보한 ‘해고’라는 충격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사회에서 내동댕이쳐진 경험”이자 “사회가 강요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 “되게 억울했던 기억”이다. 김득중 지부장과 김승하 전 지부장에게도 해고는 40대와 30대를 인생에서 통째로 사라지게 한 사건이었다.
“초중고 나와서 좋은 대학 가서 좋은 직업 갖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이렇게 가는 한 길만 있다고 믿어왔는데 그 길에서 벗어난 거예요. 10년 넘게 ‘정상 궤도’에서 벗어나서 헤매고 다니게 만든, 인생을 바꿔버린 사건이죠.”
(김승하)
김득중 지부장은 2020년 5월 일터로 돌아온 쌍용차의 마지막 복직자다. 복직을 요구하며 단식을 4번이나 했다. 45일간 밥을 먹지 않은 적도 있다. 자신을 혹사한 투쟁 경험은 몸과 마음에 흉터로 남았다.
▲2018년 7월 오후 서울 중구 서부역 광장에서 부당해고자 원직복직을 요구하며 천막 농성을 하고 있는 김승하 철도노조 KTX 승무원지부 지부장 ▲2013년 9월 추석 연휴에도 서울시청앞 광장 쌍용차 천막농성을 지키고 있는 김득중 수석지부장. 정지윤기자
2009년 2000명 넘는 집단해고를 막기 위한 옥쇄파업 때 함께 외쳤던 ‘해고는 살인’이란 구호는 현실이 됐다. 그의 동료와 그 가족 등 30명이 목숨을 잃었다. 자본이 ‘산 자’와 ‘죽은 자’를 나누며 양쪽 모두에게 생긴 상처는 여전히 다 아물지 않았다.
위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쌍용차가 회생 절차에 들어가면서 또다시 대규모 해고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KTX 승무원이었던 김승하 지부장과 동료들도 단식, 삭발에 철탑 고공농성까지 안 해본 게 없다. 12년 만에 회사와 복직에 합의했을 땐 “이미 내 몸이 만신창이가 됐는데 복직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정도로 죽기 직전”이었다. 사회에 대한 불신은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2018년 11월 철도공사 정직원으로 복직했지만 원래 했던 승무 업무가 아닌 역무원이 됐다. 승무는 여전히 자회사가 담당한다. 복직한 현장에서는 같은 노조원들조차 “센 애들”이라는 선입견으로 바라봤다.
2010년 8월 서울중앙지법은 KTX 해고 승무원들이 한국철도공사를 상대로 낸 근로자 지위확인 등 청구소송에서 “양측의 직접적인 근로계약 관계가 인정된다”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 판결이 나온 뒤 김승하 전 지부장이 전화 통화를 하며 울먹이고 있다. 김영민 기자
복직은 마침표도 아니다. KTX 승무원들은 2008년 법원에 해고가 부당하다는 소송을 제기해 1심과 2심에서 승소했지만 2015년 대법원에서 패소하며 깊은 좌절감을 겪었다. 판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동료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해고된 이후 노동자는 사회로부터 강요된 시간을 보낼 때가 있습니다. 김진숙 위원도 현장의 환경을 바꿔보려고 했던 유인물 한 장으로 이후 30년의 삶이 바뀌었죠. 그래서 누구보다 해고자들의 아픔이나 얼마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간절한지 알고 계실 거예요. 그래서 해고자 문제에 더 많은 신경을 쓰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