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재
시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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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의 시의 마음 장기적이고 포괄적이며 심층적인가 남쪽 바닷가에 사는 친구가 짧은 글과 함께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김종철 선생님 49재 중 1재, 제7일.’ 초 세 자루를 밝혀놓고 아미타경을 필사한 노트가 펼쳐진 사진 두 컷. 지난 7월8일 2재 때는 몇 사람하고 같이 산책을 했다며 역시 짧은 글과 함께 녹색으로 흐드러진 숲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사진을 첨부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산책하다 길을 떠나셨다고 해서 우리도 오늘 같이 걸었다. 선생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길을 걸었다. 맑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산을 오르면서 광명진언을 외었다.” 친구는 강원도에서 농사를 짓다가 전남 장흥으로 이주했는데 선생님과 각별한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몇 년 전 선생님께서 근처 도시에 강연하러 오셨을 때 한 번 뵌 것이 전부라고 합니다. 하지만 친구는 그 전부터 ‘녹색물’이 잔뜩 들어 있었습니다. 올해 들어서는 문명 전환에 지푸라기라도 하나 얹는 마음으로 기후 관련 독서모임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아마 선생님을 직접 뵙지 않았더라도 선생님의 급작스러운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을 친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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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의 시의 마음 다시 낙타를 타게 될 것이다 충남 청양군 운곡면 방축길 참동애농원.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더니 도착까지 2시간 남짓. 수도권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증가해 외출을 자제해야 할 때이지만 꼭 가보고 싶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개인 위생수칙을 잘 지키면 별 문제 없으리라 생각하고 차를 몰았다. 서울을 벗어나자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굳이 청양을 찾게 된 계기가 있다. 얼마 전, 아내가 옷가게에서 건구기자를 사온 것이다. 옷가게에서 구기자를? 내가 의아해하자 아내가 답하기를, 옷가게 여주인 아들 부부가 청양에서 구기자농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거기까지는 한쪽 귀로 흘려들었다. 그런데 귀농한 젊은 부부가 음악을 전공했다는 것이었다. 악기를 연주하던 손으로 농사를 짓다니, 직접 만나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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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의 시의 마음 심청이 아빠에게 한 말 지난 주말 별마당도서관에 다녀왔습니다. 서울 삼성역 가까이에 있는데요, 사진으로만 보다가 직접 가보니 규모가 엄청났습니다. 특히 바닥에서 천장 높이가 어마어마했습니다. 10층 건물 높이쯤 되어 보였습니다. 높이는 깊이의 다른 말이겠지요. 포괄적인 넓이만큼 심층적인 깊이 또한 절실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넓이와 깊이가 교차하는 십자가 같은 걸 떠올려 보았습니다. 강단에 서보니 돔구장 한복판에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강연 주제는 ‘관계’로 정했습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오두막에 있었다는 의자 세 개를 매개로 삼아 ‘나’를 둘러싼 관계를 성찰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소로는 친구가 찾아오면 의자 두 개를 내놓았고 나그네들이 방문하면 의자 세 개를 내놓았답니다. 혼자 있을 때는 의자가 하나만 필요했겠지요. 소로의 의자는 각각 자기 성찰, 우정, 환대를 의미합니다. 저 세 관계가 조화와 균형을 이룰 때 우리가 바라마지 않는 ‘좋은 삶, 좋은 사회’가 가능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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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의 시의 마음 “위기를 낭비하는 것은 범죄다” 늦은 밤, 주택가 골목 가로등 아래. 한 사내가 고개를 내밀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지나가던 이웃이 사내를 발견하고 물었다. “뭘 그렇게 찾고 있소?” 그러자 사내가 등 뒤 자기 집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현관 열쇠를 잃어버려서요.” 이웃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아니, 집은 저쪽인데 열쇠를 왜 여기서 찾는 거요?” 사내가 답했다. “여기가 밝잖아요.” 신입생 없는 입학식이 지나고 비대면 온라인 강의도 어느덧 두 달째다. 웨딩드레스처럼 화사했던 벚꽃도 신록에 가려 빛을 잃었다. 환하고 고요해서 가상현실 같은 캠퍼스를 바라보며 팬데믹 이후를 생각한다. 미래의 문을 여는 열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마 처음일 것이다. 전 세계가 이렇게 ‘하나의 목소리’를 낸 적이 있었던가. 국적과 인종 가릴 것 없이 인류가 ‘위기’라는 한 단어로 수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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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의 시의 마음 ‘방역 주체’에서 ‘전환 주체’로 손꼽아 세어보니 열 번이 넘는다. 아파트 출입문을 열 때 여섯 번, 집 안으로 들어설 때 또 여섯 번 번호판을 눌러야 한다. 2층에 살아서 엘리베이터 버튼에 손대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배달음식이나 택배가 오면 또 긴장한다. 배달하는 분이 마스크를 썼는지 즉각 확인하고 얼른 물건을 받아드는데 그때마다 손잡이 부분이 신경 쓰인다. 밖에서도 마찬가지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마다 예민해진다. 손잡이를 잡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코로나19 사태가 손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일상적 삶은 다름 아닌 손을 매개로 이루어진다는 엄연한 사실을 절감한다. 사회생활이란 수많은 문을 드나드는 것이고, 그 문은 매번 손을 써야 여닫을 수 있다. 과학기술이 진전하면서 손의 역할은 크게 줄었지만, 손이 하는 일은 여전히 압도적이다. 손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회를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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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의 시의 마음 또 다른 기도, 버킷리스트 “부담 갖지 마세요, 그림책이니까.” 책읽기 모임을 통해 알게 된 선생님께서 집 주소를 여쭤보더니 엊그제 책을 한 권 부치셨다. 선생님 친구분이 펴냈는데 널리 알려진 작가도 아닌 데다 1인 출판사에서 나온 것이어서 여기저기 알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포를 열어보니 유현미 작가의 그림책 <마음은 파도친다>(도서출판 가지)였다. ‘지구를 닮은 얼씨 드로잉(Earthy Drawing)’이란 부제가 달렸다. 작가가 낯설어서 프로필부터 살폈더니 미술치료를 공부하다 우연찮게 그림에 빠졌다고 한다. 작가는 구순인 아버지에게 그림을 가르치며 함께 그림책을 만들고 촛불집회를 기록한 그림책도 펴냈다. 개인전과 원화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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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의 시의 마음 ‘이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입학식이 따로 없다고요?” 내가 되물었더니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네. 초등학교 들어갈 때 입학식이 없어요.” 내가 재차 캐물었다. “입학식만 없는 거겠지요.” 돌아온 그의 답이 더 놀라웠다. “자기 생일날 학교에 갑니다.” 아이들마다 입학 날짜가 다 다르다는 것이다. 지난해 여름 뉴질랜드에 갔다가 현지 교민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여덟 살이 되던 그해 3월 초, 코흘리개 또래들과 함께 왼쪽 가슴에 흰 손수건을 매달고 줄 맞춰 서 있던 기억이 생생한 내게 뉴질랜드 어린이들의 ‘개별 입학’은 낯설다 못해 불편하기까지 했다. 교민분께 우리나라와 같은 입학식이 왜 없는 것이냐고 물었지만 그분도 거기까지는 잘 모른다고 말했다. 전체보다 개인을 우선하는 이쪽 문화가 녹아든 것이라고 넘겨짚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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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시선 해 질 녘 꽃 뒤에 숨어 보이지 않던 꽃이 보인다 길에 가려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인다. 나무와 산과 마을이 서서히 지워지면서 새로 드러나는 모양들. 눈이 부시다, 어두워 오는 해 질 녘. 노래가 들린다, 큰 노래에 묻혀 들리지 않던. 사람에 가려 보이지 않던 사람이 보인다. 신경림(1935~) 때마다 끝맺음이 있다. 일몰도, 계절의 끝도, 한 해의 바뀜도 우리가 겪는 끝맺음의 때이다. 물론 일생의 해 질 녘도 있다. 연만하여 일생의 석양을 마주할 때가 있다. 시인은 이와 같이 해가 질 무렵이 되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이 잘 보이게 되었다고 말한다. 거대한 것이 오히려 지워지고 작고 소박한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하잘것없어 보이던 것이 곧 꽃이요, 길이요, 노래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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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의 시의 마음 화내지 않고 화내는 법 손가락이 떨렸다. 한바탕 언성을 높인 직후였다. 떨리는 손가락을 지켜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회의 전에 목소리를 높이지 말자고, 천천히 말하자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런데 엎질러진 물이 문제였다. 다시 주워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엎질러진 물이 내 안으로 스며들어 며칠 나를 괴롭혔다. 베갯머리가 젖는가 싶었는데 내 꿈속까지 축축해졌다. 잠꼬대까지 한 모양이다. 여러 의견을 모아 책을 한 권 내야 했다. 내가 편집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여서 합의를 이끌어내야 했다. 만장일치를 바란 것은 아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찬성하는 사안은 큰 의미가 없다고 믿는 편이다. 모두가 찬성하는 사안은 대개 변화와 무관한 안이한 사안일 경우가 많다. 나는 한두 가지 쟁점이 분명하게 부각되고 이를 중심으로 논의가 모아져 뭔가 달라지기를 바라는 쪽이다. 하지만 이번 회의는 엇박자였다. 이전 회의의 반복이었다. 어느 쪽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결국 내가 탁자를 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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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의 시의 마음 김장에 관한 한 생각 “황석어젓도 준비했음^^.” 내가 답신을 하지 않자 후배가 마지막으로 보내온 문자였다. 후배는 지난여름부터 올해 김장을 자기 집에서 하자고 말했다. 나는 그때마다 요즘 누가 김장을 집에서 하느냐며 한쪽 귀로 흘렸다. 게다가 김장을 하기로 한 날이 원고 마감일이었다. 그런데 저 한마디에 마음이 동했다. 황석어젓이라. 나는 음식을 가리는 편이 아니다. 미식가도 아니고 대식가도 아니다. 그런데 유독 젓갈 앞에서는 흔들린다. 결국 원고 마감을 지키지 못했다. 아내와 함께 차를 몰아 강화대교를 건넜다. 후배는 강화 토박이가 아니다. 10여년 전, 귀촌 비슷하게 강화로 들어가 주경야독하고 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학생들을 가르친다. 시간을 쪼개 지역문화를 되살리기 위해 힘을 보태기도 한다. 몸집이 큰 데다 얼굴도 검게 타 영락없는 농사꾼이다. 후배가 김장을 같이하자고 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얼마 전 새집으로 이사했는데 마당에다 텃밭까지 있어 배추농사를 제대로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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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의 시의 마음 국립대 도서관에서 1박2일 한문교육을 전공한다는 학생이 <박물관은 살아있다>라는 영화 이야기를 꺼냈다. 밤 9시 박물관이 문을 닫으면 그때부터 전시된 유물들이 살아나 움직인다는 판타지 영화. 학생은 “우리 대학 도서관도 이렇게 살아있다”며 웃었다. 지난 수요일 밤 충남 공주시 국립공주대학교 중앙도서관 3층. 평소와 달리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대학과 지역사회가 함께하는 ‘1박2일 독서여행’이 밤 11시를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1박2일이란 말은 설렘을 부추긴다. 듣기만 해도 일상 탈출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어제와 다름없는 지금 여기를 벗어나면 시간의 속도가 달라지고 낯선 환경도 어느새 발견의 대상으로 다가온다. 더욱이 책과 더불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대학 도서관에서 하룻밤을 지새는 프로그램이라면 설렘의 크기는 사뭇 커질 수밖에 없다. 심야라는 말이 주는 울림은 또 어떤가. 심야극장, 심야식당, 심야주점, 심야책방… 깊은 밤 시간대가 돌연 장소의 성격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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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의 시의 마음 ‘세 번째 개인’과 새로운 장소 2층 창가 구석진 자리. 내가 들를 때마다 노인 한 분이 앉아 있었다. 탁자 한쪽에는 조간신문과 커피잔, 그리고 생수병. 팔순에 가까워 보이는 노인은 늘 책을 읽고 있었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 책을 펼친 것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실루엣이 그렇게 단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인은 작은 자를 대고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곤 했다. 두 시간 가까이 꼼짝 않고 읽기에 몰두했다. 때로 반신상(半身像)처럼 보였다. 일주일에 한두 번 찾아가는 카페가 있다. 인테리어가 소박하고 자그마한 뒤뜰에는 파라솔이 몇 개 펼쳐져 있다. 점심시간을 피하면 빈자리가 많다. 도심의 고층빌딩 숲에 숨겨놓은 ‘비밀의 정원’ 같은 곳이어서 드나들 때마다 재개발 광풍에 휩쓸리지 않았으면 하고 혼잣말을 하곤 한다. 얼마 전부터는 매번 ‘책 읽는 노인’을 볼 수 있어 카페가 그 자리에 그대로 버텨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더 간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