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권우
출판평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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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우의 책과 세상 백석이 열망한 ‘불의 시학’ 김연수의 <일곱 해의 마지막>을 읽었다. 이 장편소설은 한국전쟁 이후 러시아문학을 주로 번역하던 백석이 1956년 동시를 발표하며 다시 시작활동을 하다가 1962년 역시 동시를 발표하고 절필한 시기까지를 서정적 문체로 복원했다. 작품을 읽으며 백석이 자문했던 세 가지 질문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첫 번째 질문. “나는 왜 시를 다시 쓰기 시작했을까?” 이 질문은 백석이 한동안 시를 쓰지 않았다는 뜻이다. 당의 선전선동에 동원되고 수령의 우상화에 이바지하는 시를 쓸 수는 없었다. 사람살이의 정겨움과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깃든 “음식 이름들, 옛 지명들, 사투리들”의 시어는 박살나고 “미리 제작한 벽체를 올려 아파트를 건설하듯이 한정된 단어와 판에 박힌 표현만으로 쓰인” 사회주의 공화국의 시만 넘쳐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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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우의 책과 세상 각자도생의 무간지옥에서 구원받는 법 나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일단, 오늘을 지배하는 세력과 연배는 비슷하지만 그 어떤 권력을 추구하지도 않았고 누리지도 않았다는 다소 낭만적인 삶의 태도에서 비롯한다. 그다음에는 좀 더 이타적이고 더욱 정의로워지려고 나름대로 애써왔다는 알량한 자존심 덕이다. 물론 어찌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정의의 표본에 이른 분들과 비교하겠느냐만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생각이 바뀌었다. 어느덧 나를 포함해 우리 세대가 ‘척결’의 대상이 되고 있구나 싶었다. 좋은 말로 하면 세대교체가 되겠지만, 나는 이 말로는 지금의 분위기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고 본다. 거칠게 파고들어온 칼날은 페미니즘이었다. 권력의 상층부를 이루는 대다수가 남성이었으니, 권력에 대한 도전은 남성에 대한 단죄와 동의어였다. 다음에 몰아친 바람은 공정성이었다. 민주와 정의를 외친 세대가 과연 일상적 삶의 영역에서 공정했느냐고 매섭게 질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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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우의 책과 세상 우리가 닮아야 할 진정한 지도자 “흔히 말하듯, 지도자란 타인을 돕기 위해 안전지대를 벗어난 사람이다.” 죽음을 앞두고 쓴, 성공한 한 과학자의 파란만장한 자서전에서 만난 인상 깊은 구절이다. 이 한마디에 지은이 바레스의 삶이 오롯이 응축되어 있었다. 가난했다. 끼니를 거를 정도는 아니었으나 아버지는 일보다 친구와 도박을 하거나 카드 게임하는 걸 더 즐겼다. 어머니는 40대 중반에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 어머니한테서 공부머리를 물려받아 학업성적은 늘 우수했다. 아버지는 중독성향을 물려주었으나, 도박이 아니라 ‘과학과 연구’에 대한 중독이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스스로 자신의 특징을 일러 연구를 향한 주체할 수 없는 강한 열정과 인내와 끈기, 그리고 회복력과 탄력성이라 했다. 갖은 난관을 이겨내고 MIT에 들어갔다. 당시 MIT 전체 학생 가운데 여학생은 5%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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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우의 책과 세상 고전에서 길어 올린 삶의 지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읽고 나면 당혹감이 든다. 신화를 읽는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이 서사시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다. 오디세우스가 10년에 걸쳐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은 신화의 얼개와 상당히 유사하다. 유혹을 떨쳐버리고 잇따른 위험을 지혜롭게 이겨내 마침내 귀환에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신화는 흔히 주인공이 과거보다 성숙해지고, 타인을 위한 희생을 통해 영웅으로 발돋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디세이아>에서는 그런 면을 읽을 수 없다. 아내를 지키고 왕국을 되찾을 뿐이다. 뭔가 다른 독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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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우의 책과 세상 슬프고 외로운 우리 시대의 예수 본디 난분분하는지라 평정이 깨지고 심신이 산란해야 할 계절 아닌가. 햇볕은 졸음을 몰고 오고 바람은 얼굴에 난 솜털을 간질이며 꽃은 터져 나왔는데, 모두가 코로나19 탓에 심란하기만 하다. 거리 두기로 우울하기까지 하건만, 잇따라 요란한 일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신천지라는 교파 탓이었다. 그러다 이번에는 이 교파를 이단이라 부르는 일부 기성 교단에서 일이 터졌다. 당황스러웠다. 어렵고 힘든 시절에 모범을 보이고 위로가 되어야 하거늘, 지탄의 대상이 되고 말다니. 착잡한 마음으로 이것저것 뒤적이다 손에 쥔 책이 김용옥의 <나는 예수입니다>와 김근수의 <슬픈 예수>였다. 전자는 마가복음을 기초로 예수의 삶을 재구성했고, 후자는 마가복음을 신학적으로 해설했다. 신약성경 편제를 보면 마태복음이 맨 앞에 나와 있지만, 성서학자들은 복음서 중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쓰였다고 본다. 마태와 누가의 복음서는 마가복음을 바탕으로 또 다른 전승이나, 또 다른 종교적 염원을 담아 썼다고 보면 된다. 기실, 이 사실부터 전통적 해석과 갈등한다. 기성 교단은 천사가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었다 해서 성경무오설을 주장하는데, 성경은 김용옥의 말처럼 담론 주체의 원망(願望)이 투사된 것으로, 김근수의 말대로 “인간의 고뇌와 한계를 숨김없이 드러낸 책”이라 봐야 마땅하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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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우의 책과 세상 재난 현장에서 피는 ‘연대의 꽃’ 콧등이 시큰해지며 울컥해진다. 얼마 전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코로나19로 피해를 본 대구 주민을 위해 써달라며 119만원을 기부했다는 보도를 접하며 감동했다. 대구지역에서 확진자 숫자가 급증하자 광주에서 감염병 전담병원의 병상 중 절반을 대구 경증환자를 치료하는 데 내놓겠다고 발표했다. 두 지역의 골 깊은 지역감정과 그것이 빚은 역사적 참극을 생각하면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경희대 학생 세 명이 뜻을 모아 코로나19와 싸우는 의료진을 돕자는 취지로 학내 커뮤니티에서 모금활동을 펼쳤는데, 일주일 만에 4600만원 정도 모았다고 한다. 애초 목표는 50만원. 뜻이 갸륵한 데다 말만 앞세우는 어른보다 낫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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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우의 책과 세상 혐오를 넘어 환대의 길로 진화심리학자 전중환은 혐오가 병원체 감염을 예방하는 심리적 적응이라 말한 바 있다. 낯선 병원체에 감염되지 않으려고 혐오 정서가 발동하도록 진화했다는 뜻이다. 새삼스럽게 이를 입증할 실험을 찾아볼 필요도 없게 되었다. “전염병이 다시 드러낸 바닥”.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퍼지자 우리 사회에 일어난 혐오증세를 개탄한 한 칼럼의 제목이다. 그 칼럼의 내용대로 전염병을 무서워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혐오와 배척의 정서가 일어나면서 공동체의 근간을 뒤흔드는 현상을 보는 것도 무서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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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우의 책과 세상 극단에서 균형의 시대로 눈이 번쩍 띄었다. 제목이 심상찮았다. <중용>을 <일상사에 초점 맞추기(Focusing the familiar affairs of the day)>라 번역했다. 당연히 우리 학자는 아니다. 오랜 관행을 깨고 이미 그 뜻을 짐작하는 제목을 굳이 풀어낼 리 없다. 서구의 동양철학자라 가능한 일이다. 중용을 이처럼 번역하는 근거가 궁금해 책을 뒤적여보았다. 로저 에임스와 데이비드 홀은 먼저 중용을 철학적으로 어떻게 해석하는지 밝히고, 주요 용어를 영어로 그렇게 옮긴 이유를 밝혔다. 그리고 나서 중용 본문을 옮기고 주석을 달고, 맨 끝에 중용 텍스트 분석을 실었다. 본디 고전은 이런 식으로 옮겨야 마땅하다. 독자는 이 과정을 따라가면서 옮긴이의 독창적 해석에 매료되고 새로운 번역을 지렛대로 인식의 지평이 확대되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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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우의 책과 세상 품격 있는 과학문화를 위하여 언젠가부터 과학기술이라는 말이 입에 붙었다. 따지고 보면 예전에는 과학과 기술이라 했다. 그 ‘과’는 두 단어 사이가 무척 멀다는 것을 뜻했다. 앞은 좀 더 순수한 영역을, 뒤쪽은 좀 더 실용성을 띤 영역이라 여겼다. 그런데 어느 순간, 두 단어 사이에서 ‘과’가 사라지면서 과학은 곧 기술이 되고 이는 경제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낱말이 되었다. 과학은 한마디로 돈이 되는 것, 조금 고상하게 말해서 미래성장 전략을 뜻했다. 지적 호기심으로 충만한 괴짜가 세계와 우주의 근본원리를 파헤치려 고독하게 실험에 몰두하는 그림은 이제 떠오르지 않는다. 한마디로 품격이 사라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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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우의 책과 세상 윤동주를 읽는 마음 가을 들어, 남들은 일부러 짬과 돈을 내어 가고 싶어 하는 바닷가 아름다운 도시에 초대받아 몇차례 다녀왔다. 한 여고의 2학년 학생들과 인문도서를 함께 읽는 시간을 보낸 까닭이다. 강의도 하고 학생들끼리 토론도 하고 발표도 했다. 예상했던 것보다는 잘 읽어왔고, 자기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다. 입시준비로 찌들 시기이건만, 공 들여 책을 읽어오는지라 학생들을 만나면 가슴이 뿌듯했다. 누가 일러준 대로 답을 찾지 않고 스스로 고민하고 함께 토론해 합의점을 찾는 일은 책을 함께 읽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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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우의 책과 세상 어느 미국 능력자 계층의 고백 “우리의 행위가 개별적으로 떳떳하다면, 개별행위들을 합쳐놓은 결과도 사회에 유익할 거라는 믿음은 우리 능력자 계층의 착각일 뿐이다.” 매튜 스튜어트가 <부당세습>에서 한 이 말을 오래 곱씹었다. 이철승의 <불평등의 세대>를 두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이른바 86세대가 무엇을 잘못했느냐는 항변을 듣게 된다. 불평등이 계급 문제라고 하면 주억거리지만, 세대 문제라고 하면 거부반응을 보인다. 그 심리를 스튜어트는 정확히 파악했다. 이름하여 대항서사. 그 서사를 우리 식으로 풀면 이렇다.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오른 건 오로지 실력 덕일 뿐이다. 알다시피 나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공장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근근이 살아갈 만큼만 벌어왔다. 어머니의 현명함과 희생이 없었다면 대학에 들어가지도 못했을 터다. 고액과외나 받아 보았겠는가, 부족한 과목만 학원에서 보충하면서 스스로 공부해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도 아르바이트와 성적 장학금으로 나왔다. 두루 내가 노력한 대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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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우의 책과 세상 논쟁으로 보는 맹자 철학의 고갱이 아직도 기억이 선명하다. 오직 인의일 따름인데 하필이면 이익을 말하느냐는 맹자의 결기가 말이다. 젊은 날 <맹자>를 읽었을 때는 당당함이 돋보였다. 권력자 앞에서도 자신의 철학을 양보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그 용기야말로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신자유주의가 세상을 지배하면서 모든 것의 가치가 오로지 이익에 초점을 맞추는 상황에서 맹자는 돈에 미친 시대를 건너게 해주는 지혜의 등대라 여기게 되었다. 그러다 배병삼의 <맹자, 마음의 정치학>을 읽으면서 맹자 철학의 두터운 지층 가운데 한 켜가 철학 논쟁의 결과라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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