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 교수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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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동래 할머니 경상도 동래부(현 부산)에 한 여성이 있었는데 극심한 가난을 이기지 못해 몸을 팔아 겨우 끼니를 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났다(선조 25년, 1592). 왜적이 온 나라의 보물을 훔쳐갔는데, 그들은 여성들도 닥치는 대로 붙들어갔다. 동래의 불쌍한 여성은 이미 30여 세도 넘었으나 일본으로 끌려가 10여 년 동안 온갖 험한 일을 하며 살았다. 미수 허목이 쓴 ‘동래 할머니’란 글에 이 여성의 기구한 사연이 실려 있다(<기언>, 제22권). 선조 39년(1606) 기유년 봄, 조정에서는 일본과 조약을 맺어 억울하게 끌려간 포로를 데려왔다. 다행히 동래 출신인 그 여성도 사신 일행을 따라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일본에 억류되어 있던 중에도 자나 깨나 한 가지 소원이 있었다. 연로한 어머니를 상봉하는 것이었다. 왜란 중에 억지로 헤어진 이후 우리 이야기의 주인공인 여성은 오직 모친을 그리워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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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안도 다로, 신미양요의 그늘에 숨은 일본의 촉수 1875년 일본은 운요호사건을 일으켜 마침내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들이 벌인 소동은 그보다 4년 전에 일어난 신미양요를 본뜬 것이었다. 1871년 6월, 미국은 조선 원정을 목적으로 군함 5척을 강화도로 파견했다. 그 당시에는 우리가 몰랐던 사실이지만, 미 군함에는 영어에 능통한 일본 외무성 하급 관리 한 명이 동승하였다. 안도 다로(安藤太郞, 1846~1923)였다. 사건이 벌어지기 석 달쯤 앞서 일본 외무성에서 부산에 주재하던 자국 관리에게 보낸 문서가 우리의 관심을 끈다. “미국이 군함 몇 척을 그곳으로 파견할 예정이다. 몇 년 전에 해난을 당한 배(셔먼호)를 심하게 다룬 죄를 묻고, 해난구조에 관한 조약을 조선과 체결할 것이라 한다. … 미국에 선수를 빼앗겨서 유감이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미국과 조선 사이에서 적절히 처신하며 이익을 꾀하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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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털끝만큼의 차이 “털끝만 한 차이에서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일어난다.(毫釐之差 天壤以謬)” 16세기 조선의 대학자 이언적은 이렇게 말하며 매사에 신중을 더하였다(<회재집>, 6권). 처음에는 차이가 없어 보이는 것이라도, 시간이 갈수록 그 틈이 벌어져 결국에는 전혀 다른 것이 되고 마는 것이 적지 않다. 이러한 깨침은 본래 유학자들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8세기 중국 불교의 고승에게서 나왔다(승찬, <신심명>). 옛날 명의들도 ‘호리’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세종 때 완성된 <의방유취>(1권)에는 ‘호리천리(毫釐千里)’라며, 털끝 차이가 천리까지 멀어진다는 표현이 있다. 의원이 진맥을 잘못하면 생사람을 죽이는 수가 있다는 경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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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천고마비’를 쓰레기통에 내버리며 이맘때 자주 듣는 구절이 하나 있다. 학창 시절 교장 선생님은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을 맞아 오늘의 행사가 더욱 즐겁고 유익할 거라는 식으로, 판에 박힌 훈화를 늘어놓으셨다. 가을 하늘이 맑고 투명한 것(천고)은 쉽게 수긍이 되지만, 하필 왜 말이 살찌는(마비) 계절이란 점을 강조하는 것일까. 가을에는 풀이 성장을 멈춰 말 먹이가 외려 부족해지는 것은 아닐까. 가을의 아름다움과 말의 살집이 무슨 관계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나는 학창 시절을 마쳤다. 그런데 요 며칠 전 페이스북에서 어떤 친구가 바로 그 문제를 건드렸다. ‘천고마비’란 사자성어의 연원을 도대체 모르겠다는 푸념이었다. 그의 생각에 공감한 나는 여러 가지 문헌을 꽤 꼼꼼히 조사하였고, 마침내 다섯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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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남편을 윽박지르는 조선의 억센 아내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 많이 들어본 말인데, 중국 고대에 왕촉이란 학자가 한 말이다. 이 말을 근거로 후대에는 신하의 의리와 아내의 도리를 단정하는 경향이 심하였다. 특히 조선 시대에는 신분의 고하를 떠나서 홀로 된 모든 여성에게 수절을 강요하기도 하였다. 실학자 성호 이익은 왕촉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공자와 맹자만 하여도 왕을 버리고 나른 나라로 떠나가기 일쑤였으니, 신하와 임금의 의리는 영원한 것이 아니었다. 부부가 죽도록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말도 틀렸다며, 이익은 이렇게 말하였다. “남편이 일찍 죽었는데, 어째서 아내가 남편이 살아 있을 때처럼 해야 하는가?”(‘출부(出婦)’, <성호사설>, 제7권) 그 말 끝에 이익은 한마디를 보탰다. “나이도 어리고 의지할 데도 없는 여성이 원한을 품은 채 일생을 마치게 하였으니, 이것은 지나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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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성종의 균형감각 성종은 신구세력의 협치를 원했다. 왕은 어린 나이에 옥좌에 올랐고, 그때 조정은 기득권층인 훈구파로 가득했다. 성종은 그들을 견제하려고 개혁을 바라는 신진사류를 조금씩 끌어들였다. 세월이 흐르자 조정 안에는 신진사류의 숫자가 늘어났고,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도 커졌다. 알다시피 신진사류는 성리학의 이념에 충실한 선비들이었는데, 왕은 그들을 언관으로 삼아 조정의 잘잘못을 따지게 했다. 이러한 정책은 효과가 있었다. 언관들은 훈구세력의 부정부패를 파헤쳐 고발하고, 그들을 호되게 비판했다. 신진사류가 훈구세력을 적절히 견제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성종이 내심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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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이순신과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 서애 유성룡이 이순신 장군에게 편지를 보냈다.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이 남쪽으로 내려갈 것이니, 잘 협력해 공훈을 이루기를 기원하노라고 썼다(<서애선생 별집> 제3권). 진린은 명나라 수군 5000명을 거느리고 와서 한동안 당진에 정박했다. 그러다가 남쪽으로 가서 이순신과 함께 지낼 예정이었다. 진린은 포악하고 교만했다. 선조가 멀리 양주(청파)까지 가서 전송할 때도 그는 조선의 관리를 폭행했다. 유성룡은 친구 이순신의 앞날이 걱정되어 편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마음을 헤아린 이순신은 음식을 많이 장만하여 진린 일행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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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세상을 일깨우는 죽비 같은 책 ‘칠극’ 방적아(龐迪我)라는 낯선 이름을 아실까 모르겠다. 본명은 디다체 데 판토하. 스페인 사람으로 중국에서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였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과 안정복의 저술을 비롯해 여러 문집에서 나는 그를 만났다. 방적아가 유명해진 것은 <칠극(七克)>이라는 책을 썼기 때문이다. 18세기 후반 조선에서 <칠극>은 <천주실의>와 함께 가장 인기 있었던 서학 서적이다. 이 책은 성리학자들의 애독서인 <사물잠>과 유사하다. <사물잠>이라면 공자가 수제자 안연에게 일러준 극기복례(克己復禮)의 방편을 풀이한 것으로, 예가 아니면 보지 말며,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담은 책이다. <칠극>은 비슷한 내용을 훨씬 체계적으로 서술한 데다 동서양의 명언 명구를 인용해 참신한 느낌을 주었다. 현대의 독자들에게도 감명을 주는 책이라 생각한다. 최근 간행된 <칠극>(정민 역, 김영사, 2021)을 다시 읽으며, 나는 풍부한 해설과 유려한 번역에 감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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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역사에 밝았던 이순신이란 사람 김육이란 정승이 이순신의 역사적 식견에 관해서 쓴 짧은 글이 나의 눈을 사로잡았다(<잠곡유고> 제13권). 이순신이 무과 시험을 볼 때 시험관이 물었단다. “한나라의 장량은 적송자란 신선과 함께 노닐었다고 <무경>에 나와 있다. 장량은 과연 죽지 않았던 것인가?” 그러자 이순신이 이렇게 대답했다. “한나라 혜제 6년(기원전 189년)에 유후 장량이 죽었다고 <자치통감강목>에 적혀 있습니다. 어찌 죽지 않았을 리가 있었겠습니까.” 시험관이 깜짝 놀라며, 평범한 무사라면 어찌 거기까지 알 수 있겠느냐고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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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우리들의 평양감사 단원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알려는 세 폭짜리 ‘평안감사향연도’를 아실 것이다. 몇 달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별전시한 작품이다. 대동강을 무대로 펼쳐진 풍속화인데, 영조 21년(1745년)의 그림이라고 한다. 그때 작품이라면 그림 속 평안감사는 이종성이었다. 영조 21년 4월5일, 이종성은 평안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실록> 참조). 그는 당대 명인으로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사도세자가 궁지에 빠졌을 때 최선을 다해 보호한 신하로 그 명성이 높았다.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숭되자 그 묘정에 배향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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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이순신의 죽음 왜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 조정에서는 수군을 없애려고 했다. 신립 장군의 건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자 이순신이 급히 글을 올려 수군이 중요한 이유를 조목조목 진술했다. 대신들은 그 글을 읽고 생각을 바꾸었다. 윤휴의 <백호전서>(제23권)에 기록된 내용이다. 윤휴는 충무공 이순신의 삶을 깊이 연구해 ‘통제사 이충무공의 유사’라는 글을 지었다. 마침 그의 서모(庶母)가 이순신의 딸이라, 윤휴는 이순신을 곁에서 모신 여러 부하와 집사 및 하인을 만나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유사’는 다른 문헌에서 볼 수 없는 내용도 많고 신빙성도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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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기생 두향과 퇴계 이황의 사랑, 진실은 매화꽃이 피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함초롬한 초봄의 매화를 떠올리니 내 생각이 퇴계 이황을 향한다. 그처럼 매화시를 많이 읊은 선비는 없었다. 마지막 순간에도 퇴계는 매화분에 물을 주라며 작별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런데 퇴계의 매화 사랑은 기생 두향(杜香) 때문이었다고 한다. 화분에 물을 주라는 유언도 두향을 부탁한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두향은 충북 단양 사람인데, 절세가인과 대학자의 아름다운 인연이라니, 송도 명기 황진이와 화담 서경덕의 만남을 다시 보는 느낌이다. 작가 정비석이 <명기열전>에서 두향과 퇴계의 사랑을 말했고, 최인호도 <유림>에서 그들의 애절한 사랑을 그렸다. 하지만 반론도 있다. 그것은 최근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뿐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