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섭
‘잉여사회’ 저자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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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촛불이 준 ‘개혁의 시간’은 길지 않다 빙하는 녹아내리고 아마존은 불탄다.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구는 과학자들이 예측했던 것보다 더 빠르게 뜨거워지고 있다. 현상의 이면에 세계적으로 창궐하는 극우 포퓰리즘 정권들이 있다. 미국의 트럼프 정권은 기후변화 부정론까지 피력하며 환경규제와 국제협약을 폐기하고 있다.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정권은 아마존이 브라질 경제 성장의 걸림돌이라며 아마존의 훼손을 방임했고 거대한 우림이 불타는 것마저 사실상 방조했다. 이외에도 다수의 극우 포퓰리즘 정권들은 환경규제 같은 ‘도덕적’ 허울을 벗어던지고 규제를 풀어서 경제성장을 하자는 구호를 공통적으로 외치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의 동력이란 결국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거대한 체념과 갈 곳을 잃은 분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미래를 불태우고 녹여서 얻는 이득마저도 소수가 독점하게 된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그 소수가 될 수도 있다는 환영만이 잠시 눈앞에 펼쳐졌다가, 곧 이전보다 더 짙은 어둠만이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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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위기는 공평하지 않다 1994년 TV에 방영된 한 광고는 당시의 번화가에서 치마저고리를 입고 서 있는 ‘정신대’ 여성을 비춘다. 그러다 “역사는 되풀이될 수도 있습니다. 정복당할 것인가 정복할 것인가”라는 내레이션과 함께 브랜드의 로고가 등장하며 광고는 끝난다. 비록 이 광고의 의미를 깨닫기까지는 좀 더 나이를 먹어야 했지만, 고작 국산 운동화를 팔기 위해서 사람들이 겪은 지옥같은 경험을 무례하기 짝이 없는 방식으로 동원한 천박함은 나의 기억 속에 길이 남았다. 내가 민족주의나 애국심 같은 단어들에 냉담해진 것은 이런 기억들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 ‘애국은 악당의 마지막 도피처’라는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곳곳에서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아보겠다는 악당들이 출몰해 웃기지도 않은 티셔츠를 팔거나, 인기를 얻으려 날뛰고 있는 상황이 그것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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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오늘날 칼럼을 쓴다는 것 ‘칼럼니스트’라는 직함이 있다. 칼럼을 쓰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과거에는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신문에 글을 쓴다는 것만으로도 어깨에 힘을 주던 시절이 있었다. 인터넷이 없고 방송이나 신문을 통해서만 세상사와 그에 대한 의견을 접할 수 있었던 시절에는 저널리즘의 중요한 축을 맡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누군가가 저 직함을 걸고 으스댄다면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칼럼니스트들의 잘못은 아니다. 그저 시대가 변한 것이다. 갑자기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은 불현듯 칼럼 쓰기가 너무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2009년부터 칼럼을 썼고, 칼럼집만 두 권을 냈다. 근 10여년을 해온 일인데 언제까지 이럴 셈인가라고 고민하다보니, 최근 꽤나 많은 것들이 변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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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홍콩이 건네는 물음들 거리에 100만명의 홍콩 시민이 나오고 이어서 200만명이 나왔다. 캐리 람 행정장관은 결국 사과했고, 문제의 송환법은 무기한 중단되었다. 그러나 시위대는 이제 행정장관의 퇴진을 주장하고 있다. 이 시위의 배경에 대해 많은 분석과 설명이 나왔다. 또 수많은 지지와 응원의 목소리도 나왔다. 어떤 이들은 지금의 홍콩과 한국의 민주화운동 혹은 촛불집회의 유사성에 주목했다. 시위대가 ‘님을 위한 행진곡’의 주광둥어 버전을 노래했다는 뉴스도 화제가 되었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 국경을 넘어서 연대하는 모습은 꽤 감격적이다. 또 이유가 어찌 되었든 폭력과 통제로 체제를 존속하려는 권력들의 불의함도 이론의 여지가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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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치안의 정치 한 번이라도 인사불성 상태의 취객을 상대해본 사람이라면, 과도한 알코올이 인간을 얼마나 강하고 대책 없는 존재로 만드는지 알 것이다. 아무리 건장한 사람이라도 취객을 손쉽게 제압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므로 최근 언론에서 대서특필하고 있는 동영상에 대해 논평을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다. 오히려 그 영상을 반복적으로 재생하고, 대응에는 문제가 없었다는 동료와 전문가들의 의견을 전하면서 ‘그럼에도 논란’이라는 식의 보도를 지속하는 언론들이 논평의 대상일 수는 있을 것이다. 여경 폐지라는 억지주장을 하는 이들의 주장을 계속해서 사회적 여론인 것처럼 다루며 의미 없는 수선을 피워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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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콜트와 콜텍 ‘콜트콜텍’은 오랜 시간 동안 나에게 너무 익숙하고 안쓰럽고 분노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사람에게는 튼튼한 벽과 지붕이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내가 콜트콜텍의 해고노동자들을 목격했던 곳은 죄다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 시내 한복판 한쪽에 자리 잡은, 너무나도 빈약해 보이는 천막이었다. 그리고 그 목격담은 마치 유령처럼 장소를 옮겨가며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부끄럽게도 나는 이제야 그 지난한 투쟁이 콜트와 콜텍의 공동투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3년 만에 사측으로부터 ‘유감 표명’과 ‘합의금’을 받게 된 것은 1988년에 설립되고 통기타를 만들던 콜텍이고, 1973년에 설립되어 전자기타를 만들던 콜트에서 해고된 노동자는 여전히 대법원 앞에서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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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적의 생각법 서울대생들이 사용했던 펜을 수험생과 학부모에게 7000원에 판매하려던 서울대의 한 창업동아리가 있었다. 펜 주인의 손편지가 동봉될 계획이었는데, 편지는 ‘등급 컷’이 높은 순으로 선착순 판매될 계획이었다. 논란이 일자 해당 동아리는 판매계획을 중지하고 사과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이 ‘상품’의 수요는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어느 시점부터 우리 사회에서는 학벌에 대한 문제의식이 증발한 듯하다. 1998년에 출범했던 시민단체인 ‘학벌없는사회’는 2016년 해체를 선언하며 “학벌과 권력의 연결이 느슨해졌기에 학벌을 가졌다 할지라도 삶의 안정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것을 중요한 이유로 꼽았다. 학벌의 질서는 변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는 유의미한 사회경제적 권력의 획득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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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20대 남자라는 문제 ‘20대 남자’에 대한 말잔치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20대 남자들의 현실을 자세히 보려는 노력은 많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관심사는 이들이 어느 당을 지지할지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20대 남자의 목소리를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스피커들 역시 매우 편향되어 있다. 소위 ‘명문대’ 출신이거나, 안티페미니즘을 통해 주목을 끌고 그것을 돈이나 명성과 같은 자원으로 만들고자 하는 이들이다. 이들의 발언을 20대 남자의 생각과 주장으로 치환하는 것은 문제일 뿐만 아니라 위험하다. 진짜 문제를 보지 못하게 하고, 갈등으로 이익을 얻는 이들에게 권위를 실어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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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국가는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지난 28일 일본군 전시 성폭력 생존자이자 인권·평화 운동가였던 김복동 선생께서 93세의 나이로 영면하셨다. 일본의 제국주의와 전쟁, 그리고 그 전쟁에 참전한 남자들은 그의 몸을 강탈하고 강간했다. 살아남아 되돌아온 고국의 독재자는 그의 거대한 상처와 폭력의 기억을 경제차관 몇 푼에 도매금으로 팔아넘겼다. 군부독재가 끝나고 수년이 지나 그는 자신이 겪었던 일을 세상에 알렸다. 그러나 문제는 30년이 넘도록 해결되지 않았고, 대통령이 된 독재자의 딸은 이번에는 외교를 위해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자신이 이 문제를 ‘해결’했노라고 선언했다. 납득할 수 없었던 그는 계속해서 싸웠다. 그리고 끝내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 속에서 남은 이들에게 계속 싸워줄 것을 당부하며 숨을 거두었다. 역사의 버거운 상흔들이 고작 하나의 개인이었던 자신에게 몰려드는 가운데에서도 그는 숨죽이고 가만히 있기를 거부했다. 오히려 여전히 세계 어딘가에서 자행되는 전쟁 성폭력을 규탄하고, 그들에게 힘이 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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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죽음의 분배 산업혁명기 유럽 노동자들의 평균 수명은 30세 전후였다고 한다. 반대로 새롭게 세상의 주인이 된 자본가, 즉 부르주아들은 결혼에 앞서 양가의 가계도를 펼쳐놓고 장애인이나 병자가 없는지를 꼼꼼히 따져가며 자신들의 ‘선천적’ 우월성을 증명해줄 계급의 육체와 건강을 만드느라 애썼다. 죽음 앞의 평등이라는 이야기가 무색해지는 것은, 그것에 이르는 과정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모든 인간이 평등한 시간이란 심장이 멎는 찰나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그마저도 못 견디는 부자와 권력자들은 안간힘을 쓰며 그것에 맞서려고 노력한다. 기약 없는 미래에 기대어 자신의 시신을 냉동보관하겠다며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는 해프닝이 일어나고, 어느 굴지의 대기업 회장은 의식 없이 의료기기들에 의존해 ‘안정적으로 생존’해 있는 가운데에서도 새로운 차명계좌와 탈세 혐의가 발견되고 있다. 이들도 모두 결국에는 죽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죽음을 24세 하청 노동자가 맞이한 죽음이나, 안전설비 없는 낡은 건물에서 일어난 화재, 또는 환불을 해주지 않고 자신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남성에게 살해당한 성매매 여성의 죽음 같은 것과 비교해 평등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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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5·18과 남성성 일부 커뮤니티에서 내 저서 <한국, 남자>가 5·18민주화운동을 모독하고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 근거는 책의 목차 중 ‘남성성의 극한: 80년 광주의 공수부대’라는 부분이다. 놀랍게도 이들이 문제 삼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목차가 전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발을 하겠다거나 5·18기념재단에 제보를 하겠다는 주장을 하는 중이다. 나는 대한민국 건국 이후 한국군이 치른 3번의 ‘전쟁’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내전이자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던 한국전쟁이다. 두 번째는 희박한 명분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과 박정희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참전했던 베트남전쟁이다. 그리고 세 번째 전쟁이 바로 신군부가 정당성 없는 군부독재를 이어나가기 위해 광주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벌였던 5·18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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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바로잡습니다” 지난 10월26일 한국경제 오형규 논설위원은 ‘청년의 삶을 저당 잡은 나라’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내용은 귀족노조, 직능단체, 시민단체 등이 신규고용창출을 할 수 있는 구조조정과 노동개혁을 막고 있는지라, 청년들의 취업과 삶이 어려워졌다는 그야말로 흔한 사랑노래 같은 것이다. 경제지들이 엄청난 비리가 있는 것처럼 연일 맹공을 퍼부었지만 대다수가 과장이었던 고용세습 문제를 시작으로, 승차공유 서비스에 반대하는 택시기사들과 영리병원에 반대하는 의료계와 ‘좌파 시민단체’ 등이 취업준비생들의 헬조선을 만들어낸 주범들로 지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