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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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처음 시를 쓰던 날 “외로웠다. 돌아보건대, 생은 늘 외로웠다”로 시작하는 한 편의 글을 읽었다. 외롭다는 말에 무심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첫 문장부터 돌부리에 걸린 듯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생을 돌아보아야 할 만큼 나이를 먹은 건 아니라고 여기지만 생을 돌아보기에 좋은 나이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닐 테니 이런 문장 앞에서는 잠시 숨을 고르며 머물러도 괜찮을 듯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내가 쓴 최초의 시도 외로움에 대한 것이었다. 그 시를 쓴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담임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 부임한 지 몇 해 안되었지만 인기가 많은 분이어서 다른 반 동급생들의 부러움을 샀다. 첫인상은 좀 무시무시했다. 키가 크고 비쩍 마른 분이어서 까다로운 성격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되었으니까. 6학년이 되기 전부터 동네 형들과 누나들에게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던 터라 잔뜩 긴장한 탓도 있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반 친구들은 다들 그런 듯했다. 그렇지만 며칠 안되어 왜 인기가 많은 선생님인지를 알게 되었다. 당신은 어린 학생들이라고 해서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집이 가난하다고 해서 공부를 못한다고 해서 차별하지도 않았다. 그런 차별이 흔하다 못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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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당신의 편지 아버지와 나는 여느 부자지간처럼 소가 닭을 보듯 닭이 소를 보듯 하며 오랜 세월 서로를 견뎌왔다. 어떤 점에서는 현명한 처사였다고도 할 수 있었다. 대놓고 으르렁거렸다면 서로에게 상처만 줬을 테니까. 그런 이유로 우리 부자는 보고도 못 본 체하거나 에둘러서 말하는 방식에 익숙해졌다. 이처럼 말이 통하지 않아 아예 말을 별로 나누지 않는 사이였음에도 기억에 남는 아버지와의 일화는 너무 많아서 아버지를 생각하면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다. 내가 중학생이던 어느 주말이었다. 그날쯤 편지가 도착하리라 여긴 나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쉬지 않고 달려서 집으로 돌아갔다. 오전에 이미 우체부 아저씨가 다녀갔을 테니 기다리던 편지가 도착했을 거였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가 아니던가. 고운 필체로 다정한 이야기가 담겼을 여학생의 편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간지러워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마루에 놓인 편지봉투가 와락 눈에 들어왔다. 나만 보면 심드렁하게 되새김질을 해서 밉상이던 외양간의 소들조차 그때만큼은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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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꿈꾸는 노인 고향 마을에 가면 한 번씩 들러 안부를 묻는 이가 있다. 그이는 나와 비슷한 나이지만 나보다 키가 크고 늘씬하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낮이거나 밤이거나 아직은 넉넉하다 할 수는 없어도 제법 무성해진 가지를 마을 정자 지붕 쪽으로 드리운 채 그 곁을 한결같이 지키고 있다. 수령 사십 년에 가까운 이 느티나무를 심던 날이 여전히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유는 어린 시절 동네 아이들이 흰수염 노인이라 부르던 이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겨서이다. 본래 그 자리에는 족히 이백 년은 넘은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시름시름 앓더니 더는 잎사귀가 돋지 않게 되었고 어느 날 번개에 맞아 몸통 일부가 떨어져 나가기까지 했다. 한동안 방치되었던 고사목을 뿌리째 뽑은 뒤 마을 사람들은 어린 느티나무 한 그루를 추렴하여 사다 심었다. 그 일에 앞장선 이가 흰수염 노인이었다. 나는 땅을 삽으로 파거나 물 양동이를 나르며 그 일을 도왔는데 내 어린 손아귀에 다 들어올 만큼 가느다랬던지라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러야 예전의 느티나무만큼 자랄 수 있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한마디로 나는 별 흥미도 기대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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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기억이라는 유산 이즈음 딸은 손가락이나 무릎, 다리 등을 어딘가에 살짝 부딪히기만 해도 아빠 이거 봐, 아파! 하면서 내 관심을 끌려는 말과 행동을 자주 한다. 나는 아프겠다 하면서 호호 불어주는데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해왔던 터라 나의 이런 말과 행동에 아이는 익숙한 평안을 느끼며 안심을 한다. 나도 평소에 아이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애썼다. 아침에 일어나 얼굴을 보면 잘 잤는지 무슨 꿈을 꾸었는지 묻고, 어린이집에 갔다 오면 오늘은 뭘 했는지 뭐가 재미있었는지를 묻는다. 그러면 아이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재잘재잘 즐겁게 말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질문이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걸 나도 잘 안다. 아이가 무언가를 내게 보여주고 싶어 할 때, 그림이나 공작물이나 뭐든 자기가 만든 걸 자랑하고 싶거나 내게 주고 싶어 할 때 나는 얼마나 자주 딴짓을 하면서 그걸 보았던가. 오롯이 아이 앞에 앉아 귀를 기울이고 감탄한 적이 몇 번이나 되었던가. 아이는 또한 내 말과 행동에서 무관심하면서도 관심 있어 하는 척한다는 걸 얼마나 자주 느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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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달이 녹다 보름달이 뜬 어느 저녁에 딸과 산책하러 나갔다. 날이 흐린 탓에 보름달인데도 영 밝지가 않아 입김이 서린 창 너머에 떠오른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우리는 함께 고개를 들어 달을 보았다. 달이 어떻게 보이는지 말해주고 싶었기에 무슨 표현을 고르면 좋을지 잠시 고민을 했다. 아무래도 산문을 쓰는 사람이라 그런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솥에 든 찐빵 같다거나 야단맞고 나와 시무룩해 보인다는 식의 긴 묘사문들만 떠올랐다. 어쨌든 그럴듯한 비유를 찾아보려 애쓰는데 딸아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거였다. 아빠, 달이 녹았어. 아이의 그 한마디에 혀끝에 맴돌던 모든 말들이 스르르 녹아 버렸다. 그래, 달이 녹았구나. 그보다 더 그럴듯하고 적확한 표현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 안에서는 결코 생겨날 수 없을 것만 같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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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일본 말고 오키나와 오키나와라는 지명을 처음 인식하게 된 건 미군기지와 관련해서였다. 오키나와에 주둔한 미군의 범죄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자 언론을 통해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우리나라에 주둔한 미군의 범죄도 그에 못지않았던 터라 동질감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오키나와는 여전히 먼 나라였다. 지도를 보면 오키나와가 일본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좀처럼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일본 열도의 남쪽 끄트머리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오키나와는 일본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였으니까. 오키나와에 정말 관심을 갖게 된 건 메도루마 슌의 소설을 읽고 난 뒤부터였다. 그제야 오키나와의 역사를 다룬 글을 찾아 읽으며 오키나와를 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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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과유불급 오랫동안 글을 써왔지만 정말 좋은 글이 무엇인지 좋은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직도 잘 모른다. 어떤 글을 읽고 참 좋은 글이라며 감탄하는 경우는 많지만 왜 좋은 글인지를 설명해야 한다면 곤혹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게 하나 있다면 좋은 글을 읽고 나면 마음이 어느 방향으로든 아주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훌륭한 글이라 해도 단번에 사람의 마음을 저만큼 옮겨놓는 일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처럼 훌륭한 글이 있다면 사람이 쓴 게 아니라고 해도 좋을 테다. 어쨌거나 마음을 움직일 만큼 좋은 글들은 부드럽게 우리 내면으로 스며들어와서는 우리의 마음을 어느 쪽으로든 한 뼘 정도 움직여 놓고 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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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뒷모습 나른한 어느 평일 오후였다. 나는 집 근처의 카페에 혼자 앉아 있었다. 다른 손님이 없어 호젓한 터라 책을 읽고 글을 쓰기에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런 시간이란 하루가 알맞게 익어서 어떤 글을 읽어도 난해하지 않고 어떤 글을 써도 난잡하지 않을 듯해 자신만만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카페를 홀로 소유한 듯한 기분인 데다 성질마저 넉넉하고 부드러워져서 나도 다른 작가들처럼 밝고 곱고 따뜻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출입문이 벌컥 열렸다. 카운터 안쪽에서 졸던 직원이 일어났고 내가 누리던 평온도 깨졌다. 나보다 서너 살 많아 보이는 중년의 부부 뒤로 초등학교 오륙 학년쯤으로 보이는 아이가 따라 들어왔다. 세 식구는 남은 자리도 많았건만 하필이면 내 앞자리에 앉았다. 부부의 얼굴은 검게 그을린 데다 고생한 흔적이 역력했고 딸은 주름이 많이 잡힌 원피스 차림에 토끼 귀처럼 봉긋 솟은 장식이 있는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나는 되도록 그이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으려 했지만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이혼하자고! 그래, 이혼해! 엄마, 아빠 이혼하지 마, 응? 이런 이야기들이 오가는 터라 무심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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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괜찮아요 여럿이 모여 식사를 하는 자리가 있었다. 조금 늦게 식당에 들어갔더니 이미 상이 차려져 있었고 다들 막 식사를 하는 참이었다. 나는 후배 옆 빈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달게 밥을 먹었다. 수저를 내려놓고서야 내 옆의 후배가 찌개를 전혀 먹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넌 왜 찌개를 안 먹니? 하고 묻다가 퍼뜩 깨달았다. 뚝배기로 나온 찌개는 두 사람에 하나씩이었다. 그걸 내 찌개인 줄만 알고 나 혼자서 다 퍼먹어 버렸던 거다. 멋쩍고 부끄러웠다. 식사 자리에 조금 늦어 차림상의 면모를 한눈에 알아채지 못한 탓도 있었다지만 조금만 신경을 썼다면 피할 수 있는 실수이기도 했다. 이미 식사는 끝나버렸고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자 후배는 선배가 맛있게 먹었으니 괜찮다고 했다. 그 말에 심사가 복잡해졌다. 비록 나는 먹지 못했으나 선배가 맛있게 먹었으니, 그게 누구든 맛있게 먹은 사람이 있었으니 다 괜찮다는 후배의 넉넉함에 비하자면 나는 얼마나 초라한가. 나이를 이렇게 먹고도 이런 실수, 정말 실수라면 그나마 다행일 이런 일들을 여전히 겪는 스스로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만약 후배가 그냥 괜찮다고 말했다면 나는 속으로 후배가 전혀 괜찮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언제까지나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다. 선배가 맛있게 먹었으니 괜찮다는 말은 괜찮다는 말에 하나의 설명이 덧붙여진 말이 아니라 진정으로 괜찮은 게 무엇인지를 생각하게끔 하는 말이었고 실수를 저지른 이의 마음까지 다독이고 배려하는 힘을 지닌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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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문학적 표현 글 쓰는 사람이 빠지는 함정 가운데 하나는 어떤 문장을 쓴 뒤 스스로에게 열광하는 것이다. 그런 경우 글쓴이는 흐뭇하다 못해 신이시여, 이걸 정말 제가 썼단 말입니까! 라고 탄식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런 문장이야말로 기교적일 수는 있어도 좋은 문장일 수는 없다. 아깝더라도 재빨리 삭제해버리는 게 글쓴이의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 기교적인 문장과 좋은 문장의 차이란 아마도 글을 통해 실현하려고 했던 글쓴이의 세계관이 각각의 문장에, 좀 더 엄밀하게는 각각의 단어에 스며들어 있느냐 아니냐에 있는 듯하다. 스스로 감탄해마지 않는 문장은 전체 글의 맥락에서 동떨어져 홀로 멋진 문장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 문장은 기교적일 수는 있어도 아름답거나 좋을 수는 없다. 담백하고 평범한 단어들이 모여 아름다운 문장, 한 편의 아름다운 글이 될 수 있는 것도 각각의 단어와 문장이 서로를 끌어당기고 밀어내며 긴장을 형성하기 때문이고 홀로 존재할 때는 결코 생겨날 수 없는 낯설고 매혹적인 이미지가 태어나 글 전체에 생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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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나경원의 희극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지난 12일 국회 연설에서 대통령을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수석대변인이라고 비유했다. 영상자료를 보니 문제의 발언은 “북한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옹호와 대변, 이제는 부끄럽습니다. 더 이상 대한민국 대통령이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라는 낯 뜨거운 이야기를 듣지 않게 해주십시오”였다. 이 대목에서 나 원내대표는 일부러 또박또박 한 단어 한 단어를 강조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자신의 발언이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킬지 이미 짐작했던 것이며 혹시라도 자신의 의도가 관철되지 못할까 봐 확실히 해두기 위해 주의를 환기시키며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던 것이다. 이 발언에 항의하는 의원들을 보며 가소롭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돌리는 장면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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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관용어 글 쓰는 이에게 관용어의 사용은 대체로 피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다. 사유와 반성을 거치지 않고 습관적으로 구사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용어의 예는 무수히 많겠지만 세간에서 논란이 되었던 표현을 언급하고 싶다. 그중 하나는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인데 보통 부정적이고 희화화된 느낌을 준다. 좀 오래된 일이기는 하지만 그 지역의 의회에서 이 관용어를 추방하자는 결의서를 채택한 적이 있다. 그 결의서에서 언급되었던 한 선배 소설가가 관용적으로 사용했을 뿐인데 비난받는 게 부당하다면서 투덜대던 게 기억이 난다. 다른 하나는 ‘소설 쓴다’는 말이다. 의도적으로 진실을 왜곡하는 경우나 터무니없는 일 등을 가리키는데 그냥 소설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