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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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2019년 나를 가장 기쁘게 한 일 매년 이맘때가 되면 한 해 동안 잘한 일과 잘못한 일들을 헤아려보곤 한다. 잘못한 일들을 꼽아보다 열 손가락으로는 부족해서, 더 속상해지기 전에 그만뒀다. 그러고는 잘한 일들을 생각했다.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데, 선물 같은 순간까지 여럿 있었다. 꽤 살 만했던 한 해였다. 제대로 따지고 보면 뭐 하나 나아진 것 없지만, 그럼에도 대책 없이 삶을 낙관하고 있다니! 내 존재를 뒤흔드는 고난은 아직 오지 않은 게 분명하다. 개인적인 성취들을 잠깐 자랑해본다. 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실업계 고등학교 지하 납땜 실습장에서 박사학위 수여식까지 17년 걸렸다. 나름 한길로 잘 걸어왔다고 생각하니 스스로가 대견해 뭉클했다. 산문집과 문학비평집 등 두 권의 책을 더 냈고, 한 매체에 반년 동안 매주 동해안 기행문을 연재했다. 박사 후 국내연수과정 연구원이 됐고, 강사로 임용돼 대학에서 강의도 하게 됐다. 글쓰기보다 더 맹렬히 몰두하는 취미활동인 낚시에서도 큰 성과가 있었다. 지난 6월 러시아 아무르강에 가서 ‘지구상 모든 연어의 아버지’라는 신령한 물고기 ‘타이멘’을 낚아낸 것이다. 1m가 훌쩍 넘는 대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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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고3 아닌 고3 202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났다. 11월 들어서도 가을볕이 내내 온화하더니 수능시험이 있던 14일에는 전날에 비해 최저기온이 6도가량 떨어져 영하권에 머물렀다. 하지만 수능 한파는 낭설이다. 1993년부터 올해까지 스물여섯 번 수능시험이 치러지는 동안 기온이 영하권으로 떨어진 날은 일곱 번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날씨보다는 마음의 온도가 더 차가웠던 것이다. 이번엔 춥긴 했다. 하루 종일 온 나라가 긴장 상태였다. 지각 수험생을 태운 경찰차를 위해 운전자들이 꽉 막힌 도로를 터줬다는 미담이 올해도 들려왔다. 인천 상공에서는 항공기들이 듣기평가가 끝날 때까지 착륙을 하지 못한 채 빙빙 돌았고, 학부모들은 교회와 성당, 사찰에서 애타게 기도했다. 포털 사이트에는 과목별 난이도, 정답, 등급컷 등이 실시간 검색순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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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유리창만이라도 투명했다면… “죽음은 그가 앗아간 사람의 육체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서 그의 육체를 제거하여, 그것을 다시는 못 보게 하는 행위이다. (…) 죽은 사람의 육체는 부재하는 현존이며, 현존하는 부재이다”라는 문학평론가 김현의 오래된 글을 읽는 사이 가을이 깊어졌다. 사당동에서 시흥동으로 가는 버스 안이었다. 정류장은 서늘한데 버스 안은 더웠다. 유리창은 햇빛을 햇빛일 수 있게 하는구나, 생각했다. 유리창을 통과한 빛은 뜨겁고 환했다. 유리창이 차가운 바깥 공기를 차단해준 덕분에 나는 햇빛의 온기를 만끽했다. 유리창을 흐리게 하는 스티커나 틴팅 필름이 붙어 있지 않은 덕분에 나는 눈부시게 맑은 금빛 반짝임을 오래 바라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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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주워 담을 수 없는 ‘말’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한 번 잘못 뱉은 말로 그 자신이 평생 고통받거나 타인을 지옥으로 떠밀게 된다. 단 한마디 말실수에 삶이 나락으로 추락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말 이전의 삶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괴로운 낙인이 찍힌 채 죄인으로 산다. 정말 몰라서, 또는 한순간의 경솔함으로 실언을 해버린 경우에는 말의 ‘회수불가성’이 때로 가혹하기도 하다. 영화 <어톤먼트>에서 영국 귀족 가문의 딸 세실리아는 하녀의 아들인 로비와 신분 차이를 넘어 사랑에 빠진다. 짝사랑하던 로비가 자기 언니와 결혼하는 걸 용납할 수 없던 13살 소녀 브라이오니는 어느 날 밤 대저택 안에서 일어난 성폭행 사건의 범인으로 로비를 지목한다. 거짓 증언을 한 것이다. 감옥으로 끌려간 로비는 세계대전에 징집되어 패혈증으로 사망하고, 비슷한 시기에 세실리아도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훗날 유명 작가가 된 브라이오니는 자신의 거짓말로 헤어지게 된 언니와 로비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쓴다. 두 남녀가 사랑을 이루는 것으로 결말을 맺지만, 허구일 뿐이다. ‘어톤먼트(Atonement)’는 ‘속죄’ ‘죗값’을 뜻한다. 브라이오니는 소설에서 두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으로 70년 전의 위증을 속죄하려 했지만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 물정 모르고 감성적인 어린 소녀가 질투심으로 한 거짓말조차 그 파급은 무섭고, 대가는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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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탈서울’의 가치 여수 돌산대교를 건너는 차 안에서 라디오를 틀었다. <정오의 희망곡>이 송출될 시간인데 진행자 목소리가 낯설었다. 여수MBC 지역방송 <박성언의 음악식당>이었다. 방송을 듣다가 놀랐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진행에 선곡도 좋고, 게스트와 주고받는 이야기도 재밌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 수준의 라디오 프로그램은 서울에서도 듣기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라디오에 매료된 김에 여수MBC TV도 시청했다. 박성언 아나운서는 생활정보 프로그램 <어바웃 우리동네> MC도 맡고 있었다. 함께 진행하는 한보선 아나운서와 주고받는 개그가 찰떡처럼 죽이 맞았다. 동시간대 서울 지상파 채널의 유사 콘셉트 방송들과 비교해 구성도 알차고 더 유익했다. 숙소에 있는 동안 채널을 내내 고정했다. 한보선 아나운서는 뉴스 진행도 잘했다. 지방방송이라 해서, 지방이라 해서, 서울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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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시인의 ‘죽음’ 시를 쓰려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한 부음이 생각의 유리창을 깨고 날아온 것이었다. 깨진 유리 같은 장면들이 떠올랐다. 몇 번 지나치듯 본 것 말고는 풍문으로만 그를 알았다. 죽음 앞에선 할 말이 없어 내 시를 쓰는 대신 그의 시를 읽었다. 나름의 애도로 오후가 깊어지는 동안 비가 쏟아졌다. 시인의 죽음에 세상은 빗소리처럼 와글거렸다. 지나가는 비였다. 죽은 시인은 숨을 거둔 지 보름 만에 부모에게 발견됐다. 장마철 더위와 습기에 죽어서도 괴로웠을 것이다. 아들의 비참한 주검을 눈앞에서 본 부모에게도 슬픈 악취에 젖은 연립주택은 지옥이었으리라. 고독사라고 했다. 불쌍하게 죽었다고 했다. 누군가는 사회적 타살이라고도 했다. 굳이 그 죽음을 명명해야 한다면 어떤 수사도 없이 그저 ‘시인의 죽음’이라고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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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더 많은 ‘한선태’가 승리하길 역사적인 순간을 보았다. 3 대 7로 지고 있는 팀의 경기 후반 투수 교체는 흔하디흔한 장면이지만, 그날만큼은 특별한 사건이었다. 한선태, 그가 마침내 프로야구 마운드에 올랐다. 그것도 한국 야구의 심장인 잠실에서, 최고 인기구단의 유니폼을 입고 말이다. 한선태는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비선수 출신 선수’다. 초·중·고·대학 어디서도 선수로 뛰어본 적 없는 100% 일반인이다. 중3 때 처음 ‘야구’를 접한 그가 야구선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떤 고생길을 걸어왔는지는 이미 알려졌으므로 부연하지 않겠다. 2018년에 비선수 출신도 프로 선수가 될 수 있게끔 KBO 규약이 바뀌면서 기회가 열렸고, 2019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LG 트윈스의 지명을 받았다. 규약이 바뀌는 데에는 닫힌 문을 향한 한선태의 끊임없는 두드림이 작용했다고 들었다. 꿈을 이루려는 간절함이 세상을 바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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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자 재난 영화나 범죄 수사물에는 상투적인 스토리라인이 있다. 폐사한 물고기들이 해변으로 밀려온다거나 쥐떼가 대이동을 한다거나 멀쩡한 도심에 싱크홀이 연달아 생긴다거나 하는 재난의 징후가 나타난다. 관련 현상을 오랫동안 추적해온 한 박사가(보통 학계의 ‘왕따’다) 시민들을 대피시켜야 한다고 정부에 수차례 경고하지만 묵살당한다. 결국 지진이 나고 쓰나미가 밀려와 대규모 인명피해가 발생한다. 범죄물도 비슷하다. <다이하드2>에서 존 맥클레인 형사는 주차 위반으로 견인된 차를 찾으러 공항 터미널에 갔다가 수상한 자들을 발견하고 공항경찰서장에게 테러의 위험을 알리지만 서장은 코웃음친다. 몇 시간 후 총성이 울리고, 테러범들은 시민들을 살해하고 비행기를 납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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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지상의 방 한 칸 “삼백에 삼십으로 신월동에 가보니 동네 옥상으로 온종일 끌려다니네. 이곳은 연탄창고 아닌가? 비행기 바퀴가 잡힐 것만 같아요. 삼백에 삼십으로 녹번동에 가보니 동네 지하실로 온종일 끌려다니네. 이곳은 방공호가 아닌가? 핵폭탄이 떨어져도 안전할 것 같아요. 평양냉면 먹고 싶네.” 인디 뮤지션 ‘씨 없는 수박’ 김대중의 ‘300/30’이라는 노래다.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30만원짜리 자취방을 구하려 녹록지 않은 현실과 분투하는 한 청춘의 이야기다. 가진 돈을 다 털어봤자 얻을 수 있는 방은 연탄창고 같은 옥탑이나 방공호를 연상시키는 지하방뿐이다. 방값을 치르고 나면 밥 한 끼 사 먹을 돈조차 남지 않는다. “평양냉면 먹고 싶네”라는 유머러스한 신세한탄이 절규처럼 들리는 건 나 역시 반지하방 주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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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위대한 승츠비’의 결말은? “개츠비의 푸른 정원에서는 남자들과 여자들이 속삭임을 주고받으며 샴페인을 사이에 두고 별빛 아래서 부나비처럼 오갔다. 주말이면 그의 롤스로이스가 버스가 되어 아침 9시부터 자정이 넘도록 시내에서 파티에 오가는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스콧 피츠제럴드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한 대목이다. 첫사랑인 데이지를 되찾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이룬 개츠비는 자신의 재력을 데이지에게 과시할 목적으로 매일 밤 화려한 파티를 연다. <모래시계>의 최민수처럼 “그렇게 하면 널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츠비는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치정극에 휘말려 살해당한다. 비극적 결말을 통해 피츠제럴드는 1920년대 미국 경제 부흥기의 도덕적 타락과 무질서를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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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SKY 캐슬’ 잔혹한 해피엔딩 <SKY 캐슬>이 끝났다. ‘본방사수’를 하면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나는 종영을 앞두고 몰아 보는 쪽을 택했다. 채팅방에 친구들이 감상평을 보내오길래 스포일러를 피하고자 스마트폰을 끄고 부지런히 15, 16, 17회… 밤새워 최종회까지 다 봤다. 창밖이 밝아오고, 충혈된 눈은 빠질 듯 아픈데, 허탈했다. ‘내가 본 것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19회까지 드라마를 끌고 온 온갖 욕망과 갈등들이 거품처럼 사라지고, 등장인물들이 일제히 개과천선해 공익광고나 청소년 성장드라마를 본 기분이었다. ‘19회와 20회 사이에 편집된 내용이 있나?’ ‘다들 교화 시설에라도 다녀왔나?’ ‘성령을 입고 회개했나?’ 별의별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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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새해 효도 결심 새해에는 수많은 결심들이 태어난다. 나도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의욕적으로 몇 개 적어봤다. 저축, 주거 안정, 다이어트, 연애, 결혼, 베스트셀러 집필, 절주, 효도… 어려워 보이는 것들을 하나씩 제외하니 남은 건 효도뿐이다. 매년 결심하고 매년 실패하면서도 어김없이 새해의 최우선 과제로 채택되었다. 사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 무작정 곰살맞게 굴거나 안 하던 짓을 하면 부모님은 불편해하신다. 가만 보니 효도를 내 마음 편하기 위해서 한다. 부모님이 원하시는 게 뭔지 모르면서 일단 내키는 대로 한다. 부모님은 걷고 싶으신데 억지로 업어드린다. 자식들의 효도라는 게 대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