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수경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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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어떤 이야기를 원하십니까? 가장 오래된 옛날 ‘상고시대’를 상상하여 구현한 드라마 <아라문의 검>은 최초의 국가 ‘아스달’을 통해 문명과 인간의 길을 묻는다. 이방인과 소수자를 혐오하고 인간을 착취하고 자연을 훼손하는 문명,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약탈적 전쟁, 공포와 불안을 이용하는 정치와 종교 등 드라마가 보여준 세계는 ‘오늘’이 품고 있는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행히도 ‘예언의 아이들’이 나타나 거대한 문명과 맞서 싸워 승리하여 폭력과 공포, 차별과 착취의 세계를 끝내고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며 드라마는 끝난다. 그 결말은 새로운 이야기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인간의 역사란 갈등과 저항, 퇴행과 진보가 뒤숭숭하게 엮인 이야기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나는 세계는 그런 이야기의 결과물이기도 하고 앞으로 쓸 이야기의 첫 페이지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원하는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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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사랑은 두려움을 넘어섭니다 몇주 전, 개신교 주요 교단의 성소수자 차별적 법과 제도를 분석하고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 토론회에 참여했다. 발제자들의 발표를 듣는 동안 여기저기서 탄식 소리가 들렸다. 꼼꼼하고, 집요하고, 악랄하게 성소수자를 차별하자는 의견을 ‘뜨거운 사명감’에 도취된 신앙의 언어로 기록한 것을 보고 있노라니, 저들과 내가 믿는 신이 과연 같은가 의심이 되었다. 그 의심은 절망에 가깝다. 내가 믿고 따르는 신앙의 언어가 누군가를 혐오해도 된다는 확신으로 활용될 때 나는 절망한다. 물론 그들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랑해서 성소수자들이 죄에서 돌이키길 원한다고. 나는 그걸 사랑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으로 포장된 두려움이다.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세계가 무너질까봐 두려운 것이다. 그들이 두려움을 상쇄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삭제’다. 눈앞의 성소수자를 삭제하고, 그 성소수자를 지지하거나 축복한 목회자를 삭제하고, 그런 결정에 반대하는 이들의 의견을 삭제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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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전쟁 ‘드라마’를 보다가 요즘 즐겨 보는 드라마 <연인>은 ‘로맨스’ 사극이지만 전쟁 드라마이기도 하다. 1636년 조선, 능군리에 사는 길채는 “연모하는 이와 더불어 봄에는 꽃구경하고 여름엔 냇물에 발 담그고 가을에 담근 머루주를 겨울에 꺼내 마시면서 함께 늙어가”는 게 꿈이다. 길채뿐 아니라 많은 이의 바람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들이닥친 전쟁에 그 바람은 거침없이 짓밟힌다. 백성들은 삽시간에 삶의 터전을 잃고, 사랑하는 이를 잃고, 내일을 잃었다. 대부분의 전쟁이 그러하듯 <연인>에서도 전쟁의 가장 큰 희생자는 무고한 백성들, 특히 노약자와 어린이, 여성이었다. 남성들이 ‘나라의 근본(왕)’을 구하기 위해 의병으로 자원한 사이 청나라 군대는 노약자와 어린이, 여성들이 남은 마을에 들이닥쳐 거침없이 죽이고, 약탈하고, 인질로 잡아갔다. 비록 드라마 속 상황이지만 청나라 군대에 의해 백성들이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눈을 질끈 감게 된다. 그만큼 전쟁은 아무리 드라마라도, 과거 일이라 할지라도 지켜보기 힘들다. 드라마도 이런데 ‘현실’ 전쟁에 관해서는 말해 뭐 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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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사과의 위기 “이 가격 실화냐?” 사과 한 알에 5000원이 넘는 걸 보고 눈을 의심했다. 결국 마트 한 편에 마련된 세일 코너에서 흠집 있는 사과 네 알에 5600원 하는 꾸러미를 샀다. 흠과라도 맛만 좋으면 되지. 결과는 꽝. 달콤한 맛을 상상하며 한 입 베어 물었지만 백설 공주도 마다할 ‘무맛’이었다. 사과뿐 아니라 좋아하던 수박과 복숭아도 올해는 큰마음 먹고 샀다가 실패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기후 변화에 취약한 것으로 알려진 감자, 포도, 사과의 타격이 컸다. 사과의 경우 사과꽃이 진 자리에 맺히는 ‘착과수’가 올해 무려 16%나 감소했다고 한다. 고온 현상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긴 장마에 탄저병까지 덮쳤다. 다른 과일도 마찬가지다. 생산량도 당도도 줄었다. 6월이면 만날 수 있는 포슬포슬한 감자도, 여름의 상징 수박도,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아삭하고 달콤한 사과도, 껍질과 씨 때문에 귀찮긴 하지만 자꾸 손이 가는 새콤달콤한 포도도 이제는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된 것이다. 풍작인 해가 있으면 흉작인 해가 있기 마련이니 내년에는 다시 맛있는 과일을 먹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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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사실 우리는 초능력자다 내게 초능력이 생긴다면? 우선 얼마 전 갑자기 잎을 우수수 떨구며 죽어버린 식물의 마음을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응. 그랬구나. 그게 힘들었구나. 내가 잘못했어…. 떨어지는 잎에게 사과라도 할 수 있게. 요즘 드라마에 초능력자들이 부쩍 많아졌다. <힙하게>에서 수의사 예분은 번개를 맞은 후 사람이든 동물이든 엉덩이를 만지면 상대의 기억을 읽을 수 있는 초능력을 갖게 된다. <무빙>에는 어떤 상처도 금세 회복되거나 공중 비행이 가능하거나, 손만 대면 전기를 만들 수 있거나, 망원경이나 도청기급 오감 능력을 가진 초능력자들이 나온다. 초능력이 있다면 마냥 좋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자신이 가진 능력 때문에 불편을 겪거나 손해를 보기도 한다. <무빙>에서 공중 비행이 가능한 초능력을 가진 고등학생 봉석은 시도 때도 없이 두둥실 떠오르는 몸을 땅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모래주머니를 차고, 쇳덩이를 담은 가방을 메고 다녀야 한다. <힙하게>의 예분은 하필 엉덩이를 만져야 상대의 기억을 읽을 수 있어서 곤란을 겪곤 한다. 그래서 이들에게 초능력은 약점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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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어떤 학교를 원하세요? 초등학교 1학년 때 우리 반에 두 살 많은 발달장애인 오빠가 있었다. 선생님은 짝꿍인 내게 그 오빠를 맡겼다. “OO이를 잘 도와주고 화장실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으면 선생님에게 알려주렴.” 이게 내 임무였다. 그날부터 1년 동안 오빠를 졸졸졸 따라다녔다. 언제 화장실 가야 할지 몰라 바지에 오줌을 싸거나 수업 시간에도 떼를 쓰는 아이들로 가득한 초등학교 1학년 교실이 장애를 가진 오빠에게는 얼마나 낯설고 위험한 공간이었을까? 아주 오래전 기억이지만 가끔 오빠를 떠올리곤 한다. 무사히 잘 살고 있을까? 선생님은 나에게 왜 그런 중요한 일을 맡겼을까? 바쁘고 귀찮아서 ‘떠넘긴’ 것일까? 아니면 약한 친구들과 더불어 사는 경험을 하게 하기 위한 ‘큰 그림’이었을까? 오빠를 지켜보고 보살피는 일은 제법 귀찮았지만 싫지 않았다. 오빠도 그런 내가 좋았던지 노트에 삐뚤삐뚤한 글씨로 “수경이 좋아. 수경이 고마워”라고 써서 보여주곤 했다. 오빠의 엄마는 나를 볼 때마다 미안해하고 고마워했다. 그때 그분의 마음은 하루하루 얼마나 조마조마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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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행복을 위한 선택 “저 임신 8개월이에요!” 이 말에 대다수는 기꺼운 마음으로 임신부와 태아를 축복할 것이다. 그렇다면 레즈비언이 임신을 했다면? 안타깝게도 ‘사회적 논란’이 될 게 뻔하다. 동성애를 죄라고 주장하거나 이성애만 가능하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성적 지향을 추구하거나 지지하는 이들 중 누군가도 불편하게 여길 수 있다. 결혼과 출산을 통한 ‘정상성’ 추구가 오히려 그 정상성 안에 갇히게 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저출생 시대에 임신이라니!”라며 반가워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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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그 어디나 하늘나라 나의 첫 ‘퀴어문화축제’는 2014년 신촌에서 열린 서울퀴어문화축제다. 그날은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경험한 이상한 날이었다. ‘천국’은 다양한 모양으로 자신의 존재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참가자들을 통해 만났다. ‘지옥’은 바로 그 옆에 있었다. 그들은 자신과 성적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저주의 말을 쏟아냈고, 폭력을 행사했으며, 퍼레이드 차량 앞에 누워 통성 기도를 했다. 그날 내가 만난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에 난입한 훼방꾼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보수적 그리스도인인 나를 그해부터 매해 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하게 만든 이들은 ‘음란한 축제로 시민들을 미혹시킨 동성애자’들이 아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그들을 저주한 개신교인들이다. 퀴어문화축제 참가는 나의 연대 활동이자 신앙적 결단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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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노키즈존’은 없다 유튜브 콘텐츠 중 10년 후 일상을 그린 스케치 코미디(짧은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코미디극) ‘2033년’ 시리즈를 즐겨본다. 2033년에는 아동 인구 감소로 유치원이 망한 대신 노인정이 흥하고, 오은영 박사는 <요즘 효도 금쪽같은 내 부모>에 출연한다. 아이 돌잔치는 부산 사직 구장에서 열리고, 실수로라도 어린이를 울리만 해도 범죄자가 된다. 대학도 학생이 없어 경영학과는 ‘경영경제사회복지관광통일국문학과’로 통합되고 ‘저출산극복학과’가 의대보다 인기가 높다. <런닝맨>과 <나는 솔로>에서는 사람 대신 동물들이 달리고 짝짓기를 한다. 허무맹랑한 상상일까? 무서운 예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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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4월15일과 4월16일 4월6일. 사랑하는 이의 어머니이자 나의 시어머니가 별세했다. 장례 기간 내내 물색없이 딸기 생각이 났다. 최근 어머니 병세가 악화돼 음식을 거의 못 먹었는데 부드러운 딸기는 그나마 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남편이 병원 갈 때마다 딸기를 사고 싶었다. 하지만 게을러 미루고 미루다 서둘러 찾아온 죽음에 어머니와 함께 딸기 먹을 기회를 빼앗겼다. 내가 딸기 못 산 걸 후회하듯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후회를 남긴다. 그의 빈자리를 통해, 이젠 함께할 수 없는 텅 빈 시간을 통해, 그가 생전에 좋아했거나 싫어했던 모든 것을 통해 우리는 후회한다. 그 후회는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돼 꽤 오래 집요하게 우리 마음에 부활할 것이다. 물론 어머니의 죽음이 후회와 상처로만 부활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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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여성 여러분” 내 주변 여성 중 자신의 어머니를 ‘엄마’ 대신 이름을 부르는 이들이 있다. ○○○씨라고. 듣기에 따라 다소 예의 없어 보일 수는 있지만 이유가 있다. 누구의 딸로 태어나 누구의 아내와 엄마로 사느라 평생 사회적 이름을 가질 기회가 적었던 엄마에게 이제라도 제 몫의 이름을 돌려주고 싶은 마음. 나를 낳고 기른 엄마로서가 아닌, 함께 살아가는 동료 시민으로서 엄마를 재인식하겠다는 의지. 딸이 엄마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는 그런 뜻이 담겨 있다. 그렇다고 ‘엄마’의 의미가 축소되거나 훼손될까? 아니다. 그 이름을 호명함으로써 그의 인생이 존중되고 사회적 의미가 확장되는 것이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누군가를 호명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깊은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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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다리를 놓는 사람들 자신에 관해 길게 설명해야 하는 사람들은 슬프다. 세상은 그런 이들을 향해 무례하게 질문하며 설명을 요구한다. 물론 그 질문은 대개 경청하고 이해하기 위함이 아닌, 구분 짓고 낙인찍기 위함이며 질문으로 위장된 혐오다. “그래서 동성애자야, 아니야?” “하필 왜 출근시간에 휠체어를 끌고 지하철을 타는 거야!” “그래서 그날 이태원에 왜 갔는데?” 반면 설명을 길게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도 있다. ○○대학교를 나왔다는 이유만으로도 모든 것을 이해받을 수 있는 사람. 어느 지역 출신이라서 혹은 남자로 태어나서 “우리가 남이가!” 무리에 속할 수 있는 사람. 당연히 ‘이성애자’로 여겨지는 사람. 이런 이들에게는 질문을 하지도, 설명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해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