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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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수의 참! 마누라, 여사, 당선자…호칭의 어원학 2월11일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김윤 국민의당 서울시당위원장은 이재명 대통령 후보의 부인을 ‘도지사 마누라’로 불렀다가 김어준 진행자한테서 “표현을 바꾸라”는 핀잔을 받았다. 그러자 김윤은 ‘도지사의 처’로 바꿔 말했다. 순우리말이 어느새 비속어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처’(妻)라는 한자말은 갑골문자에서 여자의 머리칼을 만지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고대 중국이 부권사회로 전환된 뒤 여성의 정조가 강조되는데 ‘처’는 ‘머리칼을 만져도 되는 여자’라는 뜻이니 좋은 말은 아니다. 이에 견주어 ‘마누라’는 아내를 허물없이 부르는 말이 됐지만, 원래는 극존칭이었다. ‘만’은 ‘첫째, 우두머리’라는 뜻이었으니 ‘맨’꼭대기, ‘맏’아버지 등에 말의 뿌리가 남아 있다. ‘오라’는 집안·가문을 뜻하는 말이고 ‘만오라’는 ‘집안의 우두머리’라는 뜻이 되니 모계사회의 유습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마노라’를 거쳐 ‘마누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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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수의 참! 성공한 대통령 되려면 반대자를 만나라 1954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라이너스 폴링은 반핵운동을 하다가 매카시즘 광풍 속에 미국 연방수사국의 수사를 받고 상원 조사위원회에도 소환됐다. 미국 노벨상 수상자들을 위한 백악관 만찬이 있던 1962년 어느 날도 그는 백악관 앞에서 반핵시위를 벌였다. 만찬 시간이 되자 턱시도로 갈아입고 들어온 그를 케네디 대통령은 특별히 예우했다. “당신이 만찬에 참석한 데 경의를 표합니다.” 그래도 쓴소리를 멈추지 않은 폴링은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고, 소련과 맺은 부분핵실험금지조약은 케네디의 최대 업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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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수의 참! 말 바꾸는 이들이 가짜다 “‘기다려라’(Wait)라는 말은 거의 언제나 ‘안 돼’(Never)라는 말이었습니다.”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비폭력 시위를 주도하다가 투옥된 뒤 띄운 편지의 한 대목이다. ‘시기상조’ 등 온갖 핑계를 대며 인종차별을 철폐하지 않으려는 백인들의 의도를 꿰뚫어본 것이다. 우리 형법의 기초를 닦았다고 평가받는 엄상섭 국회의원은 1954년 법전편찬위원회 공청회에서 “우리나라도 조만간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해방 직후에는 경찰이 너무 힘이 센 데다 친일 경력자도 많아 견제 차원에서 검찰에 일시적으로 수사권까지 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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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수의 참! ‘양심에 뿌린 씨앗’과 ‘욕망의 씨앗’ 1973년 9월11일 칠레 수도 산티아고, 화창한 아침인데 국영 라디오가 난데없이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는 방송을 반복한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피노체트의 쿠데타 개시를 알리는 군부의 암호였다. 라틴 아메리카 최초로 민주적 선거를 통해 집권한 아옌데 대통령은 미국 기업이 독과점한 구리광산의 국유화를 추진하는 등 칠레 경제의 자립을 추구했다. 쿠데타군은 대통령궁을 폭격한다. 폭격 직전 아옌데는 남아 있던 라디오방송을 통해 죽음과 칠레의 미래를 예고한다. 장기지속 구조로 기득권층 재집권 “제가 칠레인의 양심에 뿌린 씨앗이 영원히 시들어버리지는 않을 것임을 확신합니다. 그들은 무력이 있고 우리를 지배할 수 있겠지만 사회변혁은 범죄로도, 무력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고, 국민이 역사를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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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수의 참! 언론은 ‘민주주의의 적’인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헌법에 명시돼 있는데 국민은 그런 막강한 권력을 가져본 적이 없다. 선거는 민주주의 최대 행사지만 권력의지에 불타는 후보와 열성적으로 조직된 정치세력에 밀려 대다수 유권자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존재다. 번드르르한 공약들을 내놓지만 집권하면 이행률이 매우 낮아 시민들은 열망과 실망을 반복한다. 유권자는, 주주총회에 초청돼 선물이나 챙기는 소액주주 같은 신세다. 세계가 한국의 촛불혁명에 경의를 표한 것은 광장민주주의가 그만큼 실현되기 어렵다는 방증이다. 광장민주주의가 거의 불가능해진 시대에 그 권력을 대행하는 것이 언론이다. 그리스의 고대 민주주의와 달리 현대 민주주의는 언론이 공론장 임무를 적절히 수행해야 작동할 수 있다. 민주주의가 목적이라면 언론은 수단이다. 그런데 한국 언론 상당수는 민주주의 핵심 요건인 표현의 자유를 수단화해 사적 목적을 취한다. 가짜뉴스를 검증 없이 전파해 확증편향을 강화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수익과 영향력을 확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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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수의 참! ‘치킨호크’가 대선 후보라니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다.’ 전쟁의 본질을 이만큼 잘 대변하는 말도 없으리라. 프로이센 육군 건설의 공로자이자 군사평론가인 클라우제비츠가 주장한 건데, ‘전쟁이란 내 의지를 강요하기 위해 사용하는 폭력행위’라는 말도 했다. 이에 영국 군사학자 리델 하트는 “1·2차 세계대전을 유발한 폭력만능주의 전략사상”이라고 비판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핵미사일 발사 조짐이 보일 때 3축 체제의 가장 앞에 있는 킬체인, 즉 선제타격밖에 막을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이는 보수 대통령들의 전쟁 회피 노력조차 부정하는 역사의 퇴행일 뿐 아니라 사실에도 맞지 않는다. 1972년 박정희의 7·4남북공동성명은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통일 3대 원칙, 1991년 노태우의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 화해·불가침·교류협력을 선언했다. 김영삼은 취임사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고 말했고, 1994년 클린턴이 북한 핵시설을 폭격하려 하자 “절대 안 된다”고 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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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수의 참! ‘능력주의 폭정’으로 퇴행하는 선거판 ‘퇴계선생’ ‘율곡선생’이란 명칭에서 보듯이 ‘선생’은 구한말까지도 학문이 깊은 이에게 붙는 최고 경칭이었다. 그러나 서양 학위제도가 도입되면서 학사-석사-박사라는 일종의 계급이 생겼다. 우리만큼 ‘표절 학위’가 많은 나라도 없을 텐데, 위험 부담을 안고도 박사 학위를 따 두면 그 이상 보상이 따르기 때문이다. 런던대 골드스미스 칼리지 제임스 커런 교수는 세계적 석학이고 박사 제자가 전 세계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막상 그는 케임브리지대 학사 학위밖에 없다. ‘박사’ 같은 ‘증’보다 실력이 있으면 통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지도교수 입학 면접 때 “나이도 많은데 왜 학위를 따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한국에서는 학위가 없으면 발언권이 적다”고 실토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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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수의 참! 삼각관계의 비극 ‘한·미·일 공조’ ‘브란트가 깔아놓은 철길 위로 콜이 기관차를 운전해 통일의 종착역에 도착했다.’ 독일 통일 과정을 한 문장으로 설명하면 그렇다.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1969년 취임하면서 동독을 지원하는 동방정책에 착수했다. 우파는 ‘조국의 배신자’, 좌파는 ‘사회주의의 배신자’라 비난했다. 보수당인 기민당 소속 헬무트 콜 총리는 정적이던 브란트의 정책을 계승해 주변국과 여당의 반대를 무마하고 동독 공산정권에 10억마르크 차관 등 퍼주기 정책을 폈다. 통일 직후에는 동독 출신 앙겔라 메르켈을 장관으로 발탁하는 등 화합정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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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수의 참! ‘토지공개념의 추억’ 현실에서 되살리자 “얼굴 흰 추장이 사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이해하기 힘들다. 대지의 따뜻함을 어떻게 사고판단 말인가? 우리는 대지의 일부이며 대지는 우리의 일부이다. 우리에게 그것은 누이와 형제와 우리 자신을 팔아넘기는 일과 다름없다. 결국 그의 욕심은 대지를 다 먹어 치워 사막으로 만들고 말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돼 있다. 대지에서 일어나는 일은 대지의 자식들에게도 일어난다.” 이 인용문은 1854년 인디언 추장 시애틀이 자신을 찾아온 미국정부 관리에게 한 연설 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얼굴 흰 추장’은 미국 대통령이다. 미국은 들소가 많은 목초지대 땅을 빼앗고 인디언을 살기 힘든 ‘보호구역’으로 몰아넣는 중이었다. 인디언의 먹을거리를 없애려고 들소도 멸종위기에 이르도록 마구 죽였다. 시애틀은 그를 기린 지명이었으나, 막상 시애틀시에서는 인디언이 거주할 수 없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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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수의 참! 이해진·김범수 의장님 ‘가두리 양식’ 그만두세요 영국 유학 중이던 2006년 5월 BBC가 한국인의 인터넷 뉴스 신뢰도가 유난히 높다고 보도하길래 신문방송 모니터링 데이터베이스에 넣어두었다. 조사에 응답한 한국인들은 다른 나라 평균치보다 훨씬 높은 85%가 인터넷을 통한 뉴스 접근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는 내용이었다.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이 대안언론으로 떴고, 김대중-노무현 정부도 인터넷과 포털을 통한 정보통신망 구축을 적극 지원하던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15년, 한국은 가구 인터넷 접속률이 99.7%로 세계 1위를 달리는 등 정보통신 최강국이 됐으나 언론 신뢰도는 꼴찌 수준이다. 한국 언론과 국민이 네이버와 다음, 양대 포털에 포획된 탓이다. 창피해서 신문에 싣지 못하는 기사도 포털에는 대문에 버젓이 걸린다. 한국 언론은 가두리양식장 물고기나 백화점 미끼상품 같은 신세다. 언론과 포털의 잘못된 만남은 우리 언론의 병폐를 중증질환으로 만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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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수의 참! 언론권력 옹위도 ‘가짜뉴스’로 하나 2008년인가, 기자 출신 언론학과 교수들이 고려대에서 세미나를 한 적이 있는데, 나는 세계 일류 언론과 한국 언론을 비교하는 기조강연을 했다. 수많은 슬라이드와 수집한 신문을 보여주며, 국내외 신문·방송을 모니터링하느라 하루 대여섯 시간은 보낸다고 했더니 한 교수가 질문했다. “선생님은 언제 공부해요?” “전 수십년간 이걸로 개인 DB 만들어 칼럼 쓰고 학생들 가르치고 취미생활도 하는데요.” 그 교수에게 신문·방송 보는 건 공부가 아니었다. 저널리즘을 가르치는 교수 중에도 국내외 언론을 자세히 모니터링하는 이는 아주 적은 듯하다. 문학 전공 교수가 텍스트인 소설과 시를 보지 않는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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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수의 참! ‘수구의 온상’ 서울대에 왜 세금을 쏟아붓나 ‘16, 14, 12, 10, 8.’ 이렇게 숫자를 나열하면 드는 생각은? 한국인은 싫어도 해야 하는 수학 공부 ‘덕분’에 대개 2씩 줄어드는 수열을 떠올릴 것이다. 이 숫자들은 노동자가 자본가에 맞서 ‘하루 8시간 노동’을 성취해온 역사이기도 하다. 1926년 헨리 포드가 임금을 두 배로 올리면서도 노동시간을 40시간으로 줄인 이유는 ‘오래 일한다고 생산성이 비례해 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여가시간과 돈을 줘야 차도 팔린다는 점에서 그는 멀리 내다본 경영인이었다. 2021년 한국에서 ‘노동의 역사’를 1세기 전으로 되돌리는 폭탄선언이 나왔다. 윤석열 후보는 “한 주 52시간이 아니라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시간은 합의하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노동현장을 너무 모르는 발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