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용출
미국 워싱턴대 잭슨국제대학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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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180석의 메시지 위기는 동시에 기회라고 한다. 위기 상황에서 미래를 읽어내는 힘이야말로 진정한 국력이라 볼 수 있다. 한국 사회는 1997~1998년 위기 상황을 잘 극복한 사례로 꼽힌다. 정부는 다급한 외환 부족을 메꾸느라 동분서주했고 국민은 금 모으기로 화답했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이라는 외부조직에 의해 강요된 각종 계획은 급한 불을 끄는 선에서 끝났고 금 모으기로 단합을 보였던 한국 사회는 진영대립의 사회로 변모했다. 한국 사회는 혹독한 경제위기 상황을 겪으면서도 고질적인 노사 관계나 재벌 지배구조 개혁에 성공하지 못하고 우연히 중국 경제의 호황에 힘입어 위기에서 벗어나면서 현실에 안주하는 데 그쳤다. 이번 코로나19 위기는 외환위기와 그 성격이 크게 다르다. 경제적 피해 규모는 파악조차 어렵다. 이번 사태는 마치 전쟁과 같이 한국 사회 전체에 영향을 주면서 미처 알지 못했던 한국 사회의 구석구석을 점검하는 효과를 보이고 있다. 드러난 것만 하더라도 경제적으로 취약한 업종과 그룹, 알려지지 않았던 각종 종교 및 다른 집단들, 요양시설과 병원실태 등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다. 실로 새로운 경제·사회 지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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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한국 사회의 대외 인정결핍증 코로나19 사태에 대한 대처를 둘러싸고 나온 이슈 중 하나는 한국의 처리과정에 대한 외국의 반응이다. 정부와 여당은 한국의 방역과 치료가 세계 수준으로 해외에서 인정을 받고 있다고 하고, 야당은 초기 방역 실패를 호도하는 행위라며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대외 인정에 대한 갈구는 어제오늘의 문제도 아니고 한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한국의 경우 그 뿌리는 역사적으로 항상 주변세력의 영향권 밑에서 신음했던 국제정치적 경험이 크게 자리 잡고 있겠지만, 보다 가깝게는 경제발전 후발 주자로서 산업화의 성공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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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관료체제의 부재와 위기 대응 갑작스러운 코로나19의 침입은 마치 전쟁처럼 한국 사회를 불안감에 빠뜨리고 있다.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쟁에서 한국 정부가 제대로 대처하고 있는가에 대해 거센 논란이 일고 있다. 이번에도 바이러스 대응 과정에서 예외 없이 나타난 정치화 현상은 어려운 한국 사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그런데 백신도 없는 역병이 발생했을 때의 불안과 걱정 및 혼란은 한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미국의 경우 아직 감염률이 낮은 편인데도 사재기 열풍이 불고 있고, 특히 마스크는 대형 마트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항상 그러했듯이 상호 비방하면서 문제를 풀어가는 데 익숙한 한국 사회는 이번 위기도 그럭저럭 나름대로 극복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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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뿌리 없는 한국 정당의 표류 총선이 다가오면서 각 정당들의 이합집산과 인재 영입 노력이 한창이다. 이런 노력은 이번만의 일이 아니라 한국 정당들이 선거를 목전에 두고 늘 해왔던 일상화된 일들이다. 왜 이런 일들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국민을 무시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평상시에는 동물국회, 식물국회라 일컬을 정도로 일반 국민을 위한 일을 하지 않은 정치인들이 선거 때만 되면 유난히 무언가 새로운 것을 내세우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한국 선거법 개정 패턴을 보면 거의 선거 직전에 이루어진 사례가 많다. 국민들에게 한 일이 없으니 거의 비현실적인 선거법 개정으로 자신들의 죄의식을 회피하려는 의식에 불과했다. 정당 간 이합집산도 염치 없는 행동이다. 해방 이후 정당 이름만 100여개에 달하고 이합집산도 300여회에 이른다. 평소에는 가만히 있다가 선거 때만 되면 내용도 없는 정치공학의 게임을 시도해 왔기 때문이다. 이런 정치집단에 표를 던져야 하는 국민들의 실정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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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정치 판갈이, 이제부터 시작이다 2020년대가 시작되었다. 한국민주화 32년을 돌아보면 민주주의 정착이 얼마나 더디고 어려운 것인가를 실감하게 된다. 경제발전과 달리 지정된 방향타가 없는 혼돈과 갈등 속에서도 한국민주주의는 긍정적 방향으로 흘러온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가장 큰 변화는 보수와 진보 모두 막다른 골목이라 새로운 변신이 불가피해졌다는 것이다. 경제발전이라는 것 이외에 이렇다하게 내세울 것 없이 지역주의에 기반했던 소위 한국 보수는 밖으로는 세계화, 안으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막장에 이르렀다. 진보세력 역시 독재투쟁 과정에서 반민주주의적 이론과 개념으로 무장되었다가 민주화 이행기에는 지역주의와 타협했다. 이후 한국 상황에 맞는 이렇다할 진보적 이념과 정책 개발보다는 정권 쟁취에 여념이 없었다. 이 과정에서 실질적인 지역주의가 형식적 진보라는 허울로 합리화되었다. ‘조국사태’는 진보의 일상이 보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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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한·중관계의 연속과 단절 중국을 방문한 이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중국의 엄청난 발전이다. 중국의 발전이 분명히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것이라는 데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내가 최근 상하이에 체류하면서 갖게 된 의문은 ‘이렇게 번성하는 중국에 한국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이었다. 우선 드는 생각은 인구, 영토, 경제력 그리고 이에 따른 군사력 등을 고려할 때 군사전략적 고려를 제외하면 한국의 존재감이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인식은 중국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 상당수의 한국인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생각들은 중국의 조그마한 행동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데서 잘 나타난다.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이 문재인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팔을 가져다 댄 것에 대해 외교적 실례라는 반응 등이 그 좋은 예다. 아마도 이 이면에는 일개 외교부장이 한 나라의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대우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깔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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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입시 개혁 서두르지 말자 최근 미국에서도 연예인, 부유층 부모들이 관련된 입시 부정이 언론에 회자됐다. 자식들을 유수한 사립대학에 넣기 우해 미국식 수능을 조작하거나 대학의 하키, 조정 등 스포츠팀 코치나 감독에게 뇌물을 공여한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 주요 언론들이 들고일어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상당 기간 미국 사회의 비판적 여론들이 비등했다. 그런데 이 사건들은 범법자들이 죄의 경중에 따라 필요한 법적 조치, 즉 실형이나 중한 벌금형, 사회봉사 명령 등을 받는 것으로 끝이 났다. 또한 의회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입법조치에 들어갔다. 미국 사회 누구도 미국 입시제도 자체를 폐기하고 다른 대안을 들고나오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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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한국 사회의 두 얼굴과 민주주의 장래 탄핵으로 물러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자기 변호가 아직도 귀에 선명하다. 압축해서 말하자면 자신에게 직접 돌아온 것이 없기 때문에 결백하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개인의 착복이 아니기 때문에 청렴하다는 것이었다. 민주화가 30여년 가까이 진행된 시점에서 대통령으로부터 아주 전통적인 생각을 듣는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법 절차적 문제, 즉 영향력을 행사해도 문제가 된다는 의식이 아직 정착되지 않은 것이다. 한국은 산업화 과정에서 법이나 절차보다 결과가 더 중요했다. 그 시절 팽배했던 규범 아닌 규범은 독식하지 않거나 주위에 관련된 사람들과 청탁의 떡고물을 공유할 경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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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조국, 가족, 사욕 조국 법무부 장관의 임명과정과 관련해 많은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다. 그중에서 핵심적인 것은 공적인 발언과 행동에서 그렇게 도덕성과 공정성을 외치던 사람이 사적으로 정반대되는 되는 행위를 하는 이중성일 것이다. 조국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견해, 그가 대표하는 ‘386세대’의 구조적 모순 등 이를 설명하려는 시도 역시 많이 제기되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보통사람과 달리 유난히 도덕성과 공정성을 외치던 사람이 어떻게 그 정반대되는 행위를 하고도 장관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인가이다. 이런 주장들은 모두 일리가 있지만 한국 사회가 이러한 행동에 익숙할 수 있는 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한국 사회는 고도의 경제성장 과정에서 목적이 수단을 합리화했다. 그 수단 가운데 혈연, 학연, 지연으로 연결되는 신가족주의 구조와 행태가 나타났다. 한국 사회는 계급화도, 계층화도 아닌 눈에 보일 정도로 크지도 않고 상당히 유동적인 혈연, 학연, 지연의 단위가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영향을 끼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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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원숙한 민주주의가 극일이다 후쿠시마 원전사태가 난 직후 미국의 한 방송이 현지의 한 가족을 인터뷰했다. 기자가 가장에게 원전사태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고 물었다. 짧은 시간이 흐른 후 그 가장은 모든 사람의 책임이라고 하였다. 이 장면은 나에게 충격적이었다. 만약 같은 상황이 한국이나 중국에서 벌어졌을 때 이 같은 대답을 기대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침착하고 정제된 답변은 나에게 일본과 한국의 차이를 다시금 돌아보게 했다. 이에 대한 일말의 해답은 국가와 사회(개인), 위정자와 일반대중 간의 관계에 있지 않나 생각된다. 일본의 산업화와 근대화는 기본적으로 서구에 대한 위협에 사회 전체가 대응하는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서구의 제도와 문화 수용은 일본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고 일본 정체성을 고수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 일본은 일본식으로 산업화·근대화에 성공했다. 그러나 아이러니는 너무 일본적이라 다른 나라들의 모방을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제국주의 시대에 이루어진 일본의 근대화는 제국주의적 방식을 통해 국제적인 인정을 요구했고 그 결과는 패전으로 귀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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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개혁, 우리 자신을 알고 하자 제도의 개혁이나 새로운 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 제도와 정책의 기반인 사회적 조건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기초해야 한다.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 4대강사업, 최저임금제에 따른 논란 등은 그 중요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강요된 각종 제도 개혁과 정책의 혼선은 총체적으로 한국 제도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제기했다. 산업화 이후 한국 사회의 모습에 대한 파악이 끝나기도 전에 외부에서 강요된 개혁은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한 이해와 분석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자기 분석과 이해 없이 무분별한 제도 개혁은 그 실효성도 문제일 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신뢰의 위기와 불안감을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