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혜정
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
최신기사
-
조한혜정의 마을에서 무엇이 우리를 살게 하는가 ‘브런치’라는 사이트에 종종 들른다. 서로의 글을 읽으며 서로를 작가로 살리는 곳이다. 이번주엔 “버거운 삶을 이어가게 해주는, 저렴한 것들”이라는 제목의 글을 읽었다. 정신과 의사 이두형씨가 쓴 글인데 청양고추 한 봉지가 얼마나 큰 행복을 줄 수 있는지를 쓰고 있다. 딱 적당한 냄비에 대파와 냉동 만두를 깔고 따로 끓인 물을 넣고 면을 넣고 청양고추 씨를 가위로 발라내고 잘라 막판에 살짝 넣어서 완벽하게 끓인 면을 뚜껑에 덜어 한입 한입 먹다가 숭늉까지 만들어 마시는 과정을 소상하게 들려주는 글이다. 실은 라면을 자신의 미각과 지식과 재능을 총동원해서 정성껏 끓이고 맛있게 먹는 과정을 세밀화 그리듯 그린 글인데 예술가의 작은 공연이나 진지한 요리사의 수행을 보는 듯 위로가 되었다. 작가는 주거비, 자녀 양육, 커리어, 노후 준비 등 인생의 ‘큰 것들’로 숨 막히지만 이런 작은 행복이 주는 기쁨으로 잘 버텨내자고 말한다.
-
조한혜정의 마을에서 새 기술과 의식이 만나는 비상의 시간을 찾아 요즘 암울한 생각을 하지 않는 훈련을 하고 있다. 강의 요청이 와도 잘 움직이지 않게 되는데 최근 광주의 한 교사 모임엔 갔다. 학생들이 선생님을 너무 좋아해 황송할 지경이라며 그 현상에 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교사들이 모이는 자리였다. 코로나19 사태로 우울해진 분위기를 바꿔보자고 매일 수업 전에 다 같이 부르기로 한 노래가 ‘걱정 말아요, 그대’였다며 교실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는 것을 걱정하는 선생님을 만난 것은 기쁨이었다. 선생님들과 이야기하다보니 교실 붕괴 후 바닥을 친 교실·학교가 팬데믹을 거치면서 새로운 의식이 움트는 시공간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
조한혜정의 마을에서 ‘전태일 3법’이 담아낼 것들 택배노동자들의 잇따른 사망뉴스를 듣는다. 일정한 시간(주 52시간) 이상 근무를 금지하는 근로기준법은 개인사업자 신분인 택배기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한다. 택배노동자 사망 건으로 ‘필수노동’이라는 개념이 부각되고 대책을 모색 중이다. 8월26일 민주노총은 국민동의 청원을 통해 노동환경 변화를 반영하는 ‘전태일 3법’을 발의했고 이 법안은 10만명 이상 동의를 받아내 국회에 회부된 상태다. 특수고용, 간접고용, 플랫폼 고용 노동자들도 노동자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노동법과 근로기준법을 개정하자는 것인데 입법 촉구 1인 시위가 노동자, 국회의원, 시민들 사이에서 이어지고 있다. 11월13일은 전태일 열사가 세상을 떠난 지 50년이 되는 기일이다.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며 분신한 그가 지금 여기 있다면 어디서 누구와 함께 있을까?
-
조한혜정의 마을에서 한 아이를 위한 삶터와 배움터의 재구성 코로나19로 인한 비등교 사태로 우리는 학교를 다시 보게 되었다. 부모들은 학교가 얼마나 고마운 곳인지를 알아차리게 되었고 아이들 역시 학교가 열리면 즐겁게 달려간다. 1990년대와 2000년대만 해도 학생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지식을 가르친다며 잠을 자거나 교사들에게 반항하면서 ‘교실 붕괴’ 현상을 일으켰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물결 이후 비정해진 ‘돌봄 결핍’ 세상을 살아내면서 아이들은 자신에게 신경을 써주는 담임선생님이 고맙기만 한 모양이다. 수업 시간은 지루하지만 꿀 같은 휴식 시간이 있고 따뜻한 집밥이 나오는 곳. 엄마의 과로와 불안을 견디지 않아도 되는 곳. 그래서 학교는 좋은 곳이다. 또한 재난 상황을 겪으며 아이들은 어른은 믿을 존재가 못 된다는 것을 감지한 듯하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비롯해서 청소년 판타지 소설에는 부모가 등장하지 않는다. 길을 잃고 허둥대는 어른들을 보면서 아이들은 자기 나름의 생존방식을 터득해가고 있다.
-
조한혜정의 마을에서 노년 세대를 위한 ‘디지털 시민 학교’ 우리나라 1인당 학생 공교육비는 연간 1200만원이 넘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도 높은 편에 속한다. 100세 시대를 맞은 노년 세대의 재교육비는 얼마나 될까?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로 도서관마저 갈 수 없게 된 이들이 허구한 날 가짜뉴스를 퍼나르는 양상을 보며 묻게 된다. 며칠 전 미국에 있는 언니가 전달한 e메일 내용은 이러했다. “2019년 우리나라 예산은 469조원이고 독일은 439조원입니다. 독일은 대학까지 무상교육, 아동수당으로 만 15세까지 월 30만원을 줍니다. 독일 인구는 8300만명으로, 한국 총인구수의 1.7배수나 되지만, 예산이 30조원이나 더 적은데도 월등히 많은 복지를 두루 시행합니다. … 이럼에도 한국은 돈을 빌려서 전 국민한테 코로나19 재난지원금을 줍니다. 또한 빚을 내는 등 3차 추경 35조원을 지출합니다. … 이런 상황에도 조속히 한국 재정으로 북한에 고속철도 등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인들이 있는 나라가 한국입니다.”
-
조한혜정의 마을에서 여성가족부, 그 곤란한 자리에 대하여 여성가족부가 또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한 것 같다. 지난 7월17일 대한민국 국회 국민동의 청원 게시판에 ‘여성가족부 폐지에 관한 청원’이 올라왔다. 성평등 정책은 하지 않고 예산을 낭비하며 여성인권 보호조차도 최근 수준 이하의 대처능력을 보이니 폐지하라는 내용이었다. 나흘 만에 10만명의 동의를 얻은 이 사안은 국회에 전달되어 답을 기다리고 있다. 2001년 3월, 여성부가 출범했을 때를 기억하는 나로서는 20년의 시간을 새삼 돌이켜보게 된다. 코로나19에 대한 ‘K방역’을 극찬하듯이 20년 전 당시 세계 언론과 해외 페미니스트들은 경제 기적과 정치 민주화를 동시에 해낸 아시아의 작은 나라 한국이 ‘성평등부’까지 설립한 것을 두고 극찬했다. 참고로 ‘여성부’의 영어 표기는 ‘성평등부(Ministry of Gender Equality)’이다.
-
조한혜정의 마을에서 소년은 어떤 세상을 만나 어떤 어른이 되는가? 나의 동네 친구 달나라는 늘 이웃을 챙기며 즐겁게 지내려 노력한다. 그녀의 이웃집엔 딱히 직업이 없는 부모와 네 딸이 사는데 코로나19 자가격리 기간에 자주 술파티가 벌어진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하루는 그 집의 어린 두 딸이 놀이터 시소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가 자기들만 보면 웃통을 벗는다고 일러서, 우리는 경찰을 불러 그곳에 다시 얼쩡거리지 못하게 한 적이 있다. 최근 ‘웰컴투비디오’ 관련 뉴스를 들으며 이 아이들을 지킨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온라인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어느 집 아이도 실은 안전하지 않다.
-
조한혜정의 마을에서 전환시대 전문가의 자격 애니메이션 작가 스티브 커츠(Steve Cutts)가 2012년 12월21일 유튜브에 올린 <Man>은 한 남자 인간이 딱정벌레를 밟아 죽이고 손을 번쩍 들며 “앗싸” 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지나가던 뱀 두 마리를 잡아 가죽구두를 만들어 신은 그는 닭을 잡아 살을 부풀려 튀겨 먹고 양의 다리도 분질러 먹는다. 총을 들고 나타난 그는 물개를 잡아 코트를 만들어 입고 거대한 곰을 죽여 박제시키고 코끼리 상아로 피아노 키보드를 만들어 연주하는 고상한 교양인이 되기도 한다. 엄청난 양의 종이를 찍어내느라 우거진 삼림은 사라지고 콘크리트 빌딩 숲을 이룬 거대 도시는 밤낮없이 에너지를 태우며 탄소를 배출한다. 거대 축산 농장과 유전자 조작 농작물 가공소가 곳곳에 들어서고 온갖 생체 실험이 자행되면서 생태계 균형은 깨져간다. 쓰레기 더미 지구 꼭대기 왕좌에 오른 이 남자는 스스로 왕관을 쓰고 흐뭇해하며 시가를 피운다. 이때 우주선을 타고 도착한 눈이 몇 개 달린 외계인들이 그를 기이하게 여기며 왕좌에서 끌어내 밟아 버린다. 그리고 “Welcome!”이라는 팻말을 남기고 지구를 떠난다.
-
조한혜정의 마을에서 인류사 최초의 온라인개학을 응원하며 오늘 초등학교 1~3학년의 합류로 초·중·고생 500여만명이 온라인 학습에 들어간다. 코로나19 확산을 차단하기 위한 초유의 원격수업이 실시되는 것이다. 이로써 한국은 공교육장에서 대대적인 원격수업을 시도한 첫 국가가 되었다. 다행히 한국은 온라인학습을 위한 준비가 잘된 국가 중 하나다. 인터넷 연결 면에서 선진국이고 스마트기기를 수출하는 나라로서 모든 학생들에게 스마트기기를 줄 예산도 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사교육으로 인한 교육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EBS 온라인학습 시스템을 지원해왔고 사교육 시장에서는 인기강사의 ‘인강(인터넷 강의)’으로 수익을 올려왔다. 입시 교육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 못내 불편했지만 어쨌든 인강을 통해 많은 학생들이 온라인에 익숙해졌다. 교육부가 어떤 의도에서 이런 ‘무모한’ 발상을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국민이 모두 교육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볼 기회를 갖게 된 것에 크게 감사한다. 우리 모두는 지금 ‘진화’하는 중이고 한국은 꽤 훌륭하게 그 길을 가고 있다.
-
조한혜정의 마을에서 ‘자급자족적 교육공동체’를 만들어라 학교 안 가서 마냥 좋다던 동네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싶다고 한다. 학교를 안 간 지 3개월이 되어간다. 아침에 몰려오고 오후에 헤어지는 친구들, 넓은 운동장과 실내 체육관, 말끔하게 새로 꾸민 교실과 도서관, 맛있는 밥이 나오는 급식실과 리듬 있게 돌아가는 하루, 그리고 선생님이 살짝 그리운 모양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19세기 교실에서 20세기 교사들이 21세기 아이들을 키운다”고 했는데 지금 학교 환경은 매우 좋아졌고 평온해 보인다. 교육부 장관은 지난 6일 ‘포용국가 실현을 위한 사회관계장관회의’를 개최하고 개학 추가 연기 기간 중에도 꼼꼼하고 촘촘하게 아이들을 챙기겠다고 했다. 반가운 소식이다. 그러나 치료제와 백신이 나오기까지 시간은 꽤 걸릴 것이다. 상황 변화로 갈팡질팡하지 않을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 할 시점이다.
-
조한혜정의 마을에서 탈바꿈을 위한 재난학교를 만들자 *필자의 요청으로 수정한 글입니다. 지난 한 달은 평소 안 보던 뉴스를 부지런히 챙겨 보면서 지냈다. 전 지구적으로 일어난 두 사건, 곧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공포와 영화 의 오스카상 수상이 안겨준 기쁨 사이를 오가면서 말이다. 2002년 사스 이후 심심하면 출현하는 바이러스 탓에 세계는 비상에 걸렸고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던 인간들은 어디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쉽게 잡힐 것 같던 바이러스가 밀집된 종교 집단의 의례와 만나면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 사태는 글로벌 차원의 세계적 전문가들과 시민 연대 속에서 풀어가야 할 사안이다. 그러나 국제기구는 미약하고 글로벌 시민들은 정신없이 바쁘다. 그 사이에 미국, 중국, 일본 등의 국가 수장들은 자국민 보호라는 명목 아래 언론 통제도 불사하면서 국가 권력을 강화시키는 중이다. 이대로 가면 블롬캠프 감독이 (2013)에서 그린 미래 -질병과 전쟁으로 폐허가 된 지구를 버리고 소수의 선택된 자들이 위성을 지어 살아가는 시대-는 예상보다 빨리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다.
-
조한혜정의 마을에서 어찌할까, 이 깊은 우울을! 다시 칼럼을 쓰기로 하면서 상큼한 글만 쓰자고 다짐했는데 쉽지 않다. 오늘도 우울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는다. 스마트폰을 켜지 말았어야 했는데…. 호주 산불은 여전히 번지고 있고 미국은 호르무즈 파병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전쟁터에 가고 싶다는 청년의 댓글이 올라와 있다. 모든 비극에 참여하려 했다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될 테니 한 가지에만 관여하라던 사사키 아타루의 조언을 떠올려보지만 무력감은 이미 내 몸에 들어와 버렸다. 세상은 너무 많이 변해 버렸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글처럼 “나는 그것을 물속에서 느끼고, 대지에서도 느낄 수 있고, 공기 속에서 냄새로 느낀다. 그 모든 것은 이제 사라졌다. 그 모든 걸 기억하는 사람도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