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효상
건축가·이로재 대표·동아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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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효상의 지금 우리의 도시와 건축 지속 불가능한 사회의 생태적 회개 화상회의여서 그랬을까? 요즘 연이어 외교에서 괄목할 성과를 올리는 우리 대통령의 주도로 세계 지도자들과 주요 기관이 머리를 맞댄 지난달 말의 P4G라는 국제행사가 각광받지 못하고 슬며시 넘어가고 말았다. 심각한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전 지구적 연대를 이루자는 이 회의가 그래도 궁금하여 P4G의 뜻부터 찾아보니 G로 시작되는 네 단어였다. Green Growth Global Goal. 성장이나 글로벌, 목표, 이런 단어들에 회의적인 나는 이내 흥미를 잃었다. Green도 그렇다. 우리가 이 단어를 상투적으로 대하는 것을 나는 안다. 예컨대, 건물은 대충 짓고 그 위를 녹색으로 슬쩍 장치하고는 생태회복이라고 주장하는 억지, 말 그대로 가식이고 위선인 경우가 하도 많아서다. 땅을 들쑤셔서 해야 하는 건축은 본래 반자연적이며 그래서 환경파괴의 원죄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니 환경을 보전하자면 되도록 새 건물을 짓지 않아야 하며, 기존 집을 가능하면 고쳐 오래 쓰는 게 옳다. 바로 도시나 건축의 지속 가능성이 보다 중요한 과제라는 말이며 그래서 P4G의 의제 중 하나였던 지속 가능한 공동체라는 대목에 눈이 갔으나 내용은 별무해 또 시큰둥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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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효상의 지금 우리의 도시와 건축 좋은 집을 짓기 원하십니까? 1200년 전 중국 당나라 시대의 문장가 유종원이 쓴 ‘재인전(梓人傳)’은, 지금으로 보면 건축가라고 할 수 있는 한 재인의 직능에 대한 태도를 빌려 나라의 재상이 지녀야 할 덕목과 자격을 서술한 고전이다. 양잠(楊潛)이라는 이름의 재인이 유종원의 매부 집에 세 들어 살았는데 집 짓는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자기 방의 허술한 침상도 잘 고치지 못하는 자라며 업신여김을 받는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사람이 일하는 현장을 우연히 목격하고 놀란다. 담벼락에 작은 도면 한 장을 붙여놓고 여러 직공을 불러 일사불란하게 지휘 감독하는 모습이 한 치의 오차도 없다. 그리고 그 집이 완성되자 오로지 자기 이름만 대들보에 써붙이며 모든 영광과 함께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종원은 그 재인을 손기술은 버리고 오로지 마음의 지혜만 사용하는 자라고 하며, 육체의 힘을 쓰는 자는 부림을 당하고 정신을 쓰는 자는 다른 이들을 부리며 일을 계획한다고 기술한다. 勞心者役人 勞力者役於人. 바른 건축가라면 이 지점을 직능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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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효상의 지금 우리의 도시와 건축 광화문광장 재론 4년 전인 2017년 1월, 주말마다 광화문광장이 촛불로 뜨거워지는 것을 지켜보며 한 일간지에 ‘광화문광장은 광장일까’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 적이 있었다. 그 졸문을 다시 들추는 게 부담스럽지만 요즘 새 서울시장의 등장으로 광화문광장이 갈 길을 또 잃고 심지어 하찮은 내 이름까지 항간에 나돌아 재론한다. 광장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사람이 모여 산 흔적으로 가장 오래된 유적이 1만년 전의 것이니 그때에도 광장 같은 시설이 있었겠지만 건축 역사에 광장을 뜻하는 명칭은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가 시작이다. 항구 옆에 있어 배를 통해 들어온 물품을 거래하던 곳이 민중들이 모여 의견을 교환하는 장소로 기능이 확대된 게 아고라여서, 그 어원에는 ‘거래하다’ ‘말하다’의 두 가지 뜻이 있다. 즉 아고라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 광장으로 쓰인 것인데, 장소로서 광장을 뜻하는 말은 ‘문밖’이라는 어원을 갖는 로마시대의 포럼이다. 로마인들이 집에서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모두 여기로 나와 일상을 보낼 정도로 포럼은 도시의 거실이었다. 팍스로마나를 외치며 세계를 정복하던 시절, 로마는 정복지마다 군단 캠프를 설치하여 중심에 포럼을 두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캠프는 도시가 되고 포럼은 그곳의 가장 오래된 광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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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효상의 지금 우리의 도시와 건축 도와 시 그리고 시장 집단지성의 산물인 언어 자체에 진리가 있다고 여기는 나는 말의 어원을 따지는 게 버릇이 된 지 오래다. 오래전에 ‘도시(都市)’라는 한자가 만들어진 과정을 추적하다가 都와 市라는 글자에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도시에 대한 정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都는 원래 물가라는 뜻의 저(渚)와 마을 읍(邑)이 합해진 글자로, 이를 해석하면 물가에 형성된 마을이며 곧 마을의 형태를 뜻하는 글자라고 했다. 반면에 市의 자원을 따지면 많은 사람들이 왁자지껄 모여 있는 모습 곧 한 공동체의 삶이라는 뜻이어서, 물리적 형상인 ‘도’와 그 형상에 담는 생활을 뜻하는 ‘시’, 이 둘이 합해져야 비로소 도시가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도’는 하드웨어인 셈이요, ‘시’는 소프트웨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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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효상의 지금 우리의 도시와 건축 주거냐 혁명이냐 지난 2월3일, 블룸버그가 발표한 ‘국가별 혁신지수’에서 우리나라가 1위를 차지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생산성이나 연구개발, 첨단기술 등을 따지는 모양인데 지난 9년 동안 일곱번이나 1위를 차지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튿날,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우리나라를 ‘완전한 민주국가’의 그룹으로 발표하였다. 시민의 권리, 선거절차, 정부기능, 정치참여 등을 따져 전 세계 167개국을 4개 등급으로 분류하고 민주주의의 모범이라고 강조해 온 미국을 2등급인 ‘결함 있는 민주주의’로 매겼다니, 민주주의 성취를 위한 투쟁의 역사가 아직도 생생한 우리로서는 참으로 감개무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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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효상의 지금 우리의 도시와 건축 다시, 미학이 아닌 윤리의 시대 지난해 12월14일자의 타임지는 숫자 2020을 크게 쓰고 그 위에 붉은색 가위표를 덧댄 후 아래에 “THE WORST YEAR EVER”라고 쓴 도발적 이미지의 표지로 발간되었다. 사상 최악의 해, 마치 저주를 퍼부은 듯한 이 표지 디자인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였을 게다. 아직도 그 정점과 종점이 어디쯤인지 모른 채 맹렬히 진행 중인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의 일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전 세계인 모두가 매일 이 공포스러운 질병의 추이와 변화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이 전대미문의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우리에게 마치 미래를 꿰고 있는 듯한 해답들도 파편처럼 난무한다. 세기말의 풍경이 이런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