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재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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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비인간적 수용, 돈으로 환산된 삶 지난달 18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성당 종탑에 오른 세 명의 장애인 탈시설 활동가는 2주간 고공농성을 지속했다. 이들은 전국 175개 장애인 집단 거주 시설을 운영하는 한국 천주교가 장애인의 지역사회 자립을 위한 탈시설 권리를 부정하며 장애인자립지원법 제정을 막고 있음을 규탄했다. 종탑에 오른 활동가들은 장애인자립지원법과 탈시설의 필요성을 외치며 최근 울산 최대 규모의 장애인 거주 시설인 태연재활원 등에서 발생한 폭행 문제를 함께 언급했다. 20여명의 직원들이 한 달 890여건의 폭행을 일으켰고, 시설 거주 장애인을 질질 끌고 가거나 뺨을 때리고 발로 차는 등 가혹한 학대를 자행한 일을 가리켰다. 지난 5년간 16명의 장애인이 사망했음에도 세상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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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시간을 되찾은 지금 지난달 어머니 장례를 위해 귀국길에 올랐을 때, 유럽과 한국 사이 시차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언제 어디서나 일정하고 규칙적으로 변하는 줄 알았던 시간은 내가 있는 장소와 환경에 따라 몇시간씩 앞지르거나 되돌아가고 말았다. 변화하는 시간 앞에서 멀미가 났다. 내 몸이 아무리 곧 잠들 시간이라며 수면을 준비한들, 창밖의 해가 그대로 떠 있는 이상 시차는 내 몸을 괴롭혔고 머잖아 두통으로 이어졌다. 개인과 사회의 시간이 해소될 수 없는 이격을 둔 채로 흘러갈 때 나의 시간은 사회의 시간과 불화하며 정상 작동을 포기했다. 시차 속 나는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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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시끌벅적한 도서관 덴마크 여행길 3일 차. 덴마크 제2 도시 오르후스에 도착 후 먼저 향한 곳은 시립도서관이었다. 오르후스 도서관은 미국 타임지가 2016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 1위로 선정한 바 있다. 독창적인 도서관 디자인과 바다 전망과 자연광이 투명하게 들어오는 건물 설계뿐만 아니라, 도서관의 지평을 넓히는 혁신성이 주된 선정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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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동짓날 동지가 되어 크리스마스 연휴 중 여행지에 도착해 휴대폰을 켠 순간 시작 전에 여행이 끝나버렸다. 여행지에 송출된 유튜브 추천 영상엔 맥없이 멈춘 트랙터의 모습이 비쳤다. 숙소 입실 시간을 가리키는 늦은 오후 무렵, 8시간의 시차를 둔 한국은 한창 칠흑 같은 밤을 가리키고 있었다. 1년 중 가장 긴 어두움과 냉혹한 추위를 가득 품은 동짓날이었다. 동영상은 윤석열 정부의 농정 실패에 항의하는 전봉준 투쟁단이 내란범 윤석열 체포와 구속에 앞장서겠다며 나섰던 상경 투쟁이 사흘 새 서울 진입을 앞에 두고 남태령의 경찰병력에 가로막힌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시커멓게 캄캄한 밤, 뼛속까지 아리게 하는 강추위가 깜깜한 어두움으로 대신 전달되고 있었다. 가혹한 한파가 대치 상황을 종료시키겠거니 하는 마음에 시청을 시작했으나, 대치가 밤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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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내란 진행 중인 국가 12월3일 유럽 시각 오후 6시경. 벨기에 대학 강의실에서 나오는 길. 기숙사에 사는 유럽인 룸메이트 친구로부터 급박한 메시지를 받았다. “재원아. 괜찮아? 너희 가족은? 너희 친구는?” 메시지 영문을 알지 못한 채, 뭘 묻는지 되물었다. 친구는 나에게 한국의 쿠데타 소식을 알렸다. 나는 그 순간까지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마치 북한 정권이 붕괴하나 생각하며, 북한에 소란이 있냐고 다시 물었지만 그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South’, 남쪽이라는 단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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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태어나길 잘했다 얼마 전 서른 살 생일을 맞았다. 생일 직전, 유전자 사회학 강의에서 착상 전 유전 진단 검사에 대해 배웠다. 한정적인 질병만 검사할 수 있었던 과거 유전자 검사가 개선되어, 이제 배아 단계에서 검사를 통해 암, 지능, 키, 조현병 등의 발병 소지 등을 확률적으로 진단하는 새 유전자 검사 기술이 등장했다는 소식을 접하며 심란함을 느꼈다. 정교한 유전자 검사가 등장한 지금 나는 과연 태어날 수 있는 유전자를 가졌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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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병실 냄새와 고기 냄새 “병실 안 냄새가 너무 힘들어. 나 여기서 나가고 싶어.” 암 수술 후 요양병원에서 투병 중인 엄마로부터 퇴원 희망 의사를 처음 건너 들었을 때 당황스럽고 기가 막혔다. 대장을 절제하는 큰 수술을 마치고, 먹지도 걷지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병원을 나가 혼자 살겠다는 건지. 그것도 한낱 냄새 때문에.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 속 단호한 퇴원 의사를 들었을 때 지금 한가로운 냄새 타령을 할 때인지 속으로 화를 냈다. 당신 퇴원은 누가 도울 것이며. 어떻게 그깟 냄새 때문에 온 가족을 힘들게 할 수 있냐고. 가족 그 누구도 삶을 다 바쳐 암환자 곁을 지킬 수만은 없는데, 각자 벌어 먹고살기 바쁜 처지에, 대체 왜 이렇게 이기적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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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싫어하는 마음이란 곧 “일하기 싫어. 어떡하지?” 친한 친구가 일요일에 이런 말을 했을 때 나는 그에게 어느 책에선가 읽은 표현을 읊곤 했다. “무언가를 싫어하는 마음은 사실 좋아하는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게 아닐까.” 마음씨 착한 내 친구는 한동안 곰곰이 생각하더니 “어. 정말 세상의 좋고 싫음은 나란히 존재하는 문제 같아”라고 대답하고 좋아하고도 싫어하는 출근을 준비하러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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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먹이는 존재 장면 하나. 친구 집에 놀러 간 날, 1층 세탁기 옆 공간에 누워 높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건물 앞 고시원 명패가 걸린 그곳은 좁은 공간 속 높은 천장을 확보한 복층형 원룸이었다. 친구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로 상경해 천장 높은 집에 둥지를 틀게 되어 좋다면서도 요리를 해줄 수 없어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곳은 화구를 쓸 수 없어 자신이 초대한 손님과 갓 만든 음식 냄새를 맡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의 슬픔은 고시원이라는 공간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타인을 먹이는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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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남해 농부 이야기 저녁 강의차 남해에 들른 날, 오후 늦게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한 농부를 만났다. 걷지 못하는 나의 남해 구경을 위해 기꺼이 자기 시간을 내준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새하얀 농사용 트럭에 태웠다. 밭일하던 트럭이 더러워 서울 손님 편하게 모시려고 열심히 청소했다는 깨끗한 차를 타고 초면인 우리는 영문 모를 남해 드라이브에 나섰다. “오늘 어느 도로에서 몸이 불편하신 분을 만났어요. 걷고 듣는 게 모두 불편한 분 같았는데, 제 차를 세우고 무어라 말하시더라고요. 알아듣지 못한 나머지 글로 대화하니까 차 좀 태워달라고. 바로 모셨죠. 목적지에 도착하니, 그분이 1만5000원을 주시대요. 안 받겠다 했더니 1만원을. 또 안 받겠다 했더니 5000원을. 결국 5000원 받고 말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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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아이고, 잘못 탔다 서울에서 강릉으로 향하는 기차 안. 객실에 오르자마자 나도 모르게 “아이고, 잘못 탔다”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기나긴 기차를 예매하며 몇호 칸에 앉는지 신경쓰지 않았다가 유아 동반석에 자리가 배정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내뱉은 말이었다. 객실 내의 한 어린 아기가 우렁차게 울음을 시작하자, 그 울음이 순식간에 전염되어 침묵하던 다른 몇몇 아기들을 금세 울리고 말았다. ‘앞으로 두 시간. 그리 길지 않을 거야’ 생각하고 늦은 밤 귀가 열차에서 눈을 짐짓 감았지만, 아기가 계속 울어 결국 잠들지 못했다. 실눈을 뜬 채로 아기가 우는 좌석을 바라보자, 아기 부모의 뒤통수가 아른거렸다. 앞뒤로 흔들거리는 머리를 보건대 아마 한창 아기를 달래는 중인 것 같았다. 부모의 어쩔 줄 모르는 모습도 짐짓 우는 아기만큼 당황한 것처럼 보였지만, 해당 칸이 유아 동반석이라는 사실 덕분인지 조급해 보이지 않았다. 아기를 혼내지 않고 다독여 천천히 그치게끔 해도 되는 분위기가 머무는 칸이었기 때문이다. 늦은 밤, 그렇게 기차 안에서는 저마다의 작고 동그란 머리들이 울고 있었고, 아기 부모들은 아기들의 합창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어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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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슬플 것 같아요 얼마 전, 한 중학교에서 장애인 인권교육 강의를 마친 뒤 질문 시간에 한 여학생이 나에게 장애인이 되어 억울하냐고 물어보았다. 정확히는 의사의 과실로 인한 의료사고로 장애인이 된 게 원망스럽냐는 질문이었다. 질문한 학생을 보며 말했다. 처음에는 원망스럽지 않다가, 언젠가 문득 원망스러웠다가, 이내 다시 원망스럽지 않게 되었다고. 연이은 수술을 거치며 줄곧 병실에 누워 있던 유아기부터 청소년기까지 삶은 힘겨웠지만, 이상하게도 의사를 원망한 적은 없었다. 장애, 마비, 질병을 감내하는 시간 자체는 나에게 원망으로 기억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