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재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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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외로움 없는 연말연시 미국 도착 100일차. 11월부터 12월까지 이어지는 기념일 앞에 한숨이 나왔다. 핼러윈이 끝난 지 언제라고 연이어 등장한 추수감사절부터 성탄절까지. 크고 작은 기념일은 기쁨 이전에 고독으로 닥쳤다. 밝아지는 마을 내 장식과 거리의 불빛은 어두운 내 마음과 무관했다. 나는 이 낯선 땅에서 환희를 나눌 가족도 연인도 없는 이방인이다. 우두커니 책상 의자에 앉아 과제 기한과 생필품 목록을 끄적였다. 미국의 축제 속에 내 몫의 어울림과 즐거움은 없기에, 나를 비껴가는 행사에 무감해지려 시선을 돌리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 축제 시간은 그들의 시간이지, 내 시간이 아니다. 무감해지자.’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어떤 즐거움도 듣지 않고자 되뇌었다. 이 큰 나라에 내 존재에 할당된 여유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마음이 무너질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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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나쁜 기분과 살아가기 누구도 원치 않지만, 누구나 나쁜 기분과 함께 살아간다. 나의 나쁜 기분은 매일 다른 이유로 나를 덮친다. 인간관계, 경제 조건, 학업 성취, 병적 통증, 남과 비교, 심지어 직전의 좋은 기분에서 비롯하기도 한다. 나쁜 기분과의 동거는 예외가 아닌 일상에 가깝다. 우리 삶에서 만성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나쁜 기분은 언제나 제거 대상으로 여겨진다. 나쁜 기분의 가장 효율적인 제거 방식으로 언제나 소비할 것을 주문받는다. 나쁜 기분을 스스로 감당하지 말고, 시장에서 신상품을 사며 나쁜 기분을 제거하라는 취지에서다. 그 결과, 오직 필요 이상의 소비만이 당장의 나쁜 기분을 정리할 수 있는 대안처럼 여겨진다. 나쁜 기분에 관한 성찰과 공존은 한가로운 소리로 취급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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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바이러스 아닌 동료로서 약 보름 전, 미국 조지아주 배터리 공장에서 300여명의 한국인 기술자가 체포됐다는 소식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당시 기술자들은 현지 공장 가동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에 입국했으나, 이민당국은 이들이 ‘불법’적 업무를 했다 여겨 무더기로 체포했다. 체포 상황을 기록한 영상은 어떤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기술자들을 벽면에 거칠게 몰아세우고, 수갑을 채우고 족쇄를 끼우는 등. 당사자의 존엄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후 구금된 이들 가운데에는 임신부도 있었고, 강제 접종을 당하고 혼절한 사람도 있었다. 수감 시설로 향한 기자는 접근 금지를 명하는 경찰로부터 귀갓길 주변 ‘악어’를 조심하라는 속뜻을 알기 힘든 비아냥에 가까운 언사를 듣기도 했다. 구금의 적법성을 따지는 것은 고사하고, 당시 상황은 합법과 불법 논의가 무색하게 인간에 대한 경멸적 조치부터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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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일과 나를 사랑하는 마음 미국으로 출국하는 길. 인천국제공항 한 항공사 카운터에서 수화물을 모두 부치며 휠체어 서비스를 신청했다.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은 휠체어 서비스를 통해 공항 직원이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 비행기 게이트 앞까지 긴 동선을 이동하곤 한다. 그날 나의 휠체어 서비스에 배정된 직원은 아빠뻘로 나이가 지긋하신 한 중년 남성이었다. 언뜻 영화 <인턴>의 로버트 드니로 분위기를 가진 그는 다른 직원들과 달리 휠체어를 밀기 전 잠깐 멈춰 서 기내 수화물 개수, 휠체어 배터리의 종류와 전력 용량 등을 먼저 확인했고, 나는 그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했다. 그는 연이은 배터리 사고로 인해 항공기 내 배터리 소지가 예민한 상황에서 총 용량을 계산했을 때, 기내 배터리 소지가 가능하다고 결론 내리고는, 기내 휠체어 배터리 탑재 방식을 잘 몰라 망설이던 항공사 직원에게도 마찬가지로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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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평평한 땅을 섬기는 정책 파주 이사 3일차. 파주로 거처를 옮기며 가장 감탄한 건 끝없는 평지 사이 설 때 느껴지는 안정감이었다. 보조기기를 통해 움직이는 나에게 땅은 곧 경사와 같았다. 나는 늘 무의식적으로 땅이 얼마나 평탄한지 살펴보곤 한다. 혹시 동네에서 휠체어로 오르막길을 오르다 뒤로 넘어가지 않을지, 가파른 길을 오르내리며 목발이 미끄러지거나 넘어지지 않을지 하는 고민은 땅 밟는 내내 지속된다. 경사 없는 땅의 생활이 곧 무리 없이 이동 가능한 삶의 질을 보장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는 나에게 파주란 매력적인 땅을 지닌 도시였다. 파주에서 만난 친구는 눈앞의 이 평평한 땅이 일산까지 이어진다고 귀띔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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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장애인 탈시설을 아십니까 활동 20주년을 맞은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의 전시는 한 물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장애인 탈시설을 아십니까. 장애인의 집단 시설 수용 대신 지역 사회 함께 살기 활동을 계속한 이들에게 장애인 탈시설이란 자연스러운 가치였지만, 나머지 시민에게 ‘장애인’과 ‘탈시설’ 모두 어렵고 낯선 말로 느껴질지 모르겠다며 탈시설이란 무엇인지를 활동 20년을 맞아 다시 묻고 답하고 있었다. 이들의 짐작처럼 우리 사회는 여야의 대립을 이루는 예민한 당정 갈등이라거나 국내 증시 지수를 위협하는 복잡한 외교 문제는 곧잘 이해하지만, 장애인 비장애인 함께 살자는 장애인 탈시설에 관한 문제는 쉬이 받아들이거나 대답하기 어려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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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차별과 혐오가 중차대한 문제다 사라진 정책, 떠오른 혐오. 제21대 대통령 선거의 양상을 미래세대에게 전달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제대로 된 정책 토론이 실종됐다며 대통령 선거를 한탄하는 비평이 비단 어제오늘 이야기만은 아니지만, 이번 선거는 정말이지 심각하다. 가난한 사람들, 장애인, 청년, 노인, 여성과 성평등에 관한 정책이 실종됐다는 보도만 가끔 나부낄 뿐이다. 국가 비전 없는 공약집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대통령 후보들이 핏대 올리며 대통령으로 뽑아달라고 외치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불행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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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비인간적 수용, 돈으로 환산된 삶 지난달 18일 서울 종로구 혜화동성당 종탑에 오른 세 명의 장애인 탈시설 활동가는 2주간 고공농성을 지속했다. 이들은 전국 175개 장애인 집단 거주 시설을 운영하는 한국 천주교가 장애인의 지역사회 자립을 위한 탈시설 권리를 부정하며 장애인자립지원법 제정을 막고 있음을 규탄했다. 종탑에 오른 활동가들은 장애인자립지원법과 탈시설의 필요성을 외치며 최근 울산 최대 규모의 장애인 거주 시설인 태연재활원 등에서 발생한 폭행 문제를 함께 언급했다. 20여명의 직원들이 한 달 890여건의 폭행을 일으켰고, 시설 거주 장애인을 질질 끌고 가거나 뺨을 때리고 발로 차는 등 가혹한 학대를 자행한 일을 가리켰다. 지난 5년간 16명의 장애인이 사망했음에도 세상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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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시간을 되찾은 지금 지난달 어머니 장례를 위해 귀국길에 올랐을 때, 유럽과 한국 사이 시차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언제 어디서나 일정하고 규칙적으로 변하는 줄 알았던 시간은 내가 있는 장소와 환경에 따라 몇시간씩 앞지르거나 되돌아가고 말았다. 변화하는 시간 앞에서 멀미가 났다. 내 몸이 아무리 곧 잠들 시간이라며 수면을 준비한들, 창밖의 해가 그대로 떠 있는 이상 시차는 내 몸을 괴롭혔고 머잖아 두통으로 이어졌다. 개인과 사회의 시간이 해소될 수 없는 이격을 둔 채로 흘러갈 때 나의 시간은 사회의 시간과 불화하며 정상 작동을 포기했다. 시차 속 나는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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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시끌벅적한 도서관 덴마크 여행길 3일 차. 덴마크 제2 도시 오르후스에 도착 후 먼저 향한 곳은 시립도서관이었다. 오르후스 도서관은 미국 타임지가 2016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 1위로 선정한 바 있다. 독창적인 도서관 디자인과 바다 전망과 자연광이 투명하게 들어오는 건물 설계뿐만 아니라, 도서관의 지평을 넓히는 혁신성이 주된 선정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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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동짓날 동지가 되어 크리스마스 연휴 중 여행지에 도착해 휴대폰을 켠 순간 시작 전에 여행이 끝나버렸다. 여행지에 송출된 유튜브 추천 영상엔 맥없이 멈춘 트랙터의 모습이 비쳤다. 숙소 입실 시간을 가리키는 늦은 오후 무렵, 8시간의 시차를 둔 한국은 한창 칠흑 같은 밤을 가리키고 있었다. 1년 중 가장 긴 어두움과 냉혹한 추위를 가득 품은 동짓날이었다. 동영상은 윤석열 정부의 농정 실패에 항의하는 전봉준 투쟁단이 내란범 윤석열 체포와 구속에 앞장서겠다며 나섰던 상경 투쟁이 사흘 새 서울 진입을 앞에 두고 남태령의 경찰병력에 가로막힌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시커멓게 캄캄한 밤, 뼛속까지 아리게 하는 강추위가 깜깜한 어두움으로 대신 전달되고 있었다. 가혹한 한파가 대치 상황을 종료시키겠거니 하는 마음에 시청을 시작했으나, 대치가 밤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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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내란 진행 중인 국가 12월3일 유럽 시각 오후 6시경. 벨기에 대학 강의실에서 나오는 길. 기숙사에 사는 유럽인 룸메이트 친구로부터 급박한 메시지를 받았다. “재원아. 괜찮아? 너희 가족은? 너희 친구는?” 메시지 영문을 알지 못한 채, 뭘 묻는지 되물었다. 친구는 나에게 한국의 쿠데타 소식을 알렸다. 나는 그 순간까지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마치 북한 정권이 붕괴하나 생각하며, 북한에 소란이 있냐고 다시 물었지만 그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South’, 남쪽이라는 단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