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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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권력의 속성과 내부 분열의 시간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 개전 초 전황은 참혹했다. 음력 4월13일 부산포에 모습을 드러낸 왜군은 불과 두 달 뒤인 6월13일, 조선 국왕을 영변까지 도망치게 했다. 왜군을 피해 백성을 버리고 도망치는 국왕의 모습을 보며 백성들은 국가의 존재 의미를 잃어버렸고, 궁궐은 백성들에 의해 불탔다. 영변까지 도망친 선조는 자기 안위와 국가 회복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렇게 해서 선택된 방법이 분조(分朝)였다. 왕의 제1조정은 여차하면 중국으로 망명할 수 있도록 의주까지 도망칠 때, 세자(광해군)는 제2조정을 구성해서 조정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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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자기 정당성의 역사 1635년 음력 5월, 당사자들은 심각하지만 보는 이들에게는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싸움이 조선 최고 학부 성균관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서인이 성혼과 이이를 문묘에 종사(從祀)하려 하자 남인이 이를 반대하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서인은 문묘 종사에 반대하는 남인을 명륜당에서 쫓아냈고, 남인은 동쪽에 있는 작은 협실에 자리를 틀었다. 그러자 서인은 자신들이 이미 그 방에 상소청을 설치했으므로 나가달라 했고, 남인은 자신들도 그곳에 상소청을 설치했다며 유치한 설전이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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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이념 정치의 현실적 덕목 공식 선거운동 기간뿐 아니라, 준비 기간까지 포함하면 근 1년 이상 달려온 지방선거 출마자들의 오랜 여정이 끝났다. 지역민들의 선택을 받은 이들과 그러지 못한 이들의 희비가 교차하는 시간이지만, 지역민들 입장에서는 자기 선택에 대한 결과를 4년 동안 받게 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투표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그 결과는 4년에 걸쳐 돌아오기 때문이다. 1427년 12월, 세종이 용안 현감 구서와 장단 현령 최득하, 옥과 현감 진자번, 청양 현감 고신민 등을 임지로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당부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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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강한 군대의 조건 1584년 음력 3월20일, 선조는 친히 군의 준비 태세를 점검하고, 무관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행사를 진행했다. 길주목(현재 서울 구로구 일대) 후원인 반송(盤松)에서 군사들 진법 훈련을 주관하고, 친히 포를 쏘는 모습도 연출했다. 나아가 신임 무관 선발을 위한 무과시험까지 시행함으로써, 국방에 대한 왕의 강력한 의지를 천명했다. 선조가 이렇게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해 2월 북쪽 국경에서는 번호(藩胡)들이 난을 일으켜 경원부를 함락하는 일이 있었다. 번호는 조공을 바치고 조선과 무역을 하는 국경 지역 이민족들로, 조선과의 관계를 터전 삼아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조선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며, 평소 이들은 조선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국경지대에 위치한 그들의 지리적 이점을 살려, 외적 침입을 미리 알려주는 등 국가 방위의 중요한 정보 자산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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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전쟁과 호미 한 자루 임진왜란 3년차에 접어든 1594년 음력 2월14일, 오희문은 슬픔을 억누른 채 길을 나서야 했다.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져 잠시 다른 피란처에 있던 어머니를 뵐 수 있었지만, 여전히 떨어져야 하는 현실 때문이었다. 전쟁은 그렇게 가족을 생이별하게 만들었지만, 그나마 양반이어서 가족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달랐다. 어머니를 뵙고 돌아오다 금구 땅(지금의 전북 김제 지역)에 이르렀을 때, 오희문은 길가에 거적으로 덮여 있는 시신을 보았다. 전쟁통에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내지 못해 길거리에 시신이 나뒹구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옆에서 울고 있는 두 아이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거적에 덮여 있는 시신은 두 아이의 어머니로, 굶주림과 병으로 전날 죽었다고 했다. 전쟁보다 더 잔혹한 겨울은 겨우 넘겼지만, 따뜻한 바람 속에 숨어 온 보릿고개의 초입을 견디지 못해 생명줄을 놓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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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역모를 대하는 그들의 방식 1616년 새해 벽두부터 과거 시험을 위해 상경했던 김광계는 서울에서 황중윤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1615년 10월 황중윤이 경상도 현풍에서 금부도사에 의해 한양으로 압송된 지 넉 달 만이었다. 역모에 연루돼 목숨을 건지는 것만도 다행이라 여겼는데, 건강해 보이기까지 하니 다행도 이런 다행이 없었다. 황중윤이 연루된 ‘신경희 옥사’ 역시 대부분의 옥사가 그렇듯 복잡한 정치 상황과 관계돼 있었지만, 그 시작은 의외로 허술했다. 김광계의 기록에 따르면, 이 옥사는 행실이 불량하기로 소문난 소명국의 무고 때문이었다. 소명국은 평소 가까웠던 신경희가 자신을 간통죄로 고발한 것에 반발해 “장령 윤길, 정언 양시진이 신경희와 함께 몰래 반역을 모의하고 능창군을 추대하려 합니다”라고 고변했던 것이다. 자신의 위기를 역모 고변으로 벗어나보려 한 건데, 이게 예상할 수 없는 상황으로 번졌다(김광계, <매원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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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얼자(孼子)의 아버지로 산다는 것 영천(경상북도 영주의 옛 지명) 사람 이수에게는 아버지로서 아픈 손가락이 있었다. 젊은 시절 천인(賤人) 신분의 여성을 첩으로 들여 낳은 얼자(孼子) 때문이었다. 조선 역시 일부일처제가 원칙이었지만, 양반들의 경우 정상적으로 혼인한 아내 외에 따로 첩을 두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첩은 대체로 양반가 여성이 아니었기 때문에, 첩의 자녀 신분은 양반인 아버지 신분을 따를 수 없었다. 조선시대 신분은 어머니 신분에 따라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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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승육(昇六)의 기쁨 9급에서 1급까지인 행정 공무원 직급에서 모든 승진이 기쁘지 않을 이유가 없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의미가 큰 승진은 5급이 아닐까 싶다. 이른바 ‘사무관’으로의 승진은 실무자에서 관리자로 진입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직급명에도 ‘관’이 붙고, 기초지자체의 경우에는 과장으로 보임될 수 있다. 중앙이나 광역지자체에서도 팀장급이니 권한과 책임이 큰 중견공무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5급에 바로 임용되는 시험은 ‘고시’라 불릴 정도로 어렵고, 9급부터 시작하는 공무원의 경우 평생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직급이 5급인 이들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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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환곡, 구휼이라는 이름의 폭정 1629년 음력 10월26일, 안동부(현 경북 안동시 일대) 백성들은 마치 “뱀 구덩이에 떨어져 허둥대는 형국”(김령, <계암일록>)에 놓여 있었다. 매년 이 시기, 백성들을 힘들게 만드는 환곡 때문이었다. 기근이 들거나 보릿고개를 넘기 힘든 백성들에게 구휼 목적으로 빌려 주었다가 추수기에 이자를 더해 돌려받는 게 환곡(還穀)이지만, 구휼이라는 목적이 사라지면 남는 것은 채권과 채무라는 앙상한 관계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조선 백성들에게 매년 가을은 국가에 대한 채무 이행의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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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의도적 외면만이 할 수 있는 일 1778년 음력 9월의 기록에 따르면, 선산 지역의 작황은 말이 아니었다. 봄에 빌린 환곡은 고사하고, 전세(田稅) 납부만으로도 겨울 나는 게 불가능할 정도였다. 절망은 수확에 대한 기대에 반비례하는 법이니, 민심은 흉흉해졌고 백성들은 겨울 초입부터 허리끈을 졸라매야 했다. 다행히 이 와중에 새로 부임하는 경상도 관찰사가 선산을 지나 성주로 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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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감찰권의 이상한 능력 1631년 음력 8월 마지막 날, 예안현(현 안동시 예안면)에 사는 김령은 멀리 담양에서 온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해 초 예안현감으로 재직한 나무송이 보낸 편지였다. 그는 갑자기 파직을 당해 고향 담양으로 돌아간 후, 현감 시절 친분이 깊었던 김령에게 자신이 당한 억울함을 전했다. 김령도 지역 송사를 잘 처리했던 나무송의 파직이 의아한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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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코드 인사와 승진의 논리 1796년 음력 7월21일자 <노상추 일기>는 불쾌함으로 가득 차 있다. 노상추가 거쳤던 삭주부사 자리에 음관(蔭官)인 온양군수 변위진이 제수되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작은 군현이나 변방에선 과거 합격 없이 조상 음덕으로 관직을 받는 음관이 배치되는 사례가 간혹 있지만, 당상관인 부사 자리에 음관을 발탁한 일은 이례적이었다. 게다가 노상추의 불쾌함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변위진은 병마절도사 백동준의 후실 처남으로, 무과 합격 없이 병마절도사 후광에 힘입어 ‘선전관에 천거’(이를 줄여 ‘선천’이라고 불렀다)된 이른바 남항천(南行薦) 출신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