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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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을사년, 을사년, 그리고 을사년 2025년 새해가 밝았다. 음력으로 1월1일인 이달 29일 설에 을사년이 시작된다. 60갑자로 해를 세는 우리네 전통 때문에, 2025라는 숫자보다 ‘을사년’에 눈길이 더 간다. 12지(支) 가운데 유일한 상상의 동물 용이 유연함과 장수를 상징하는 뱀에게 한 해의 바통을 넘겼다. 그러나 상상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유난히 많았던 청룡의 해였던지라, 을사년은 뱀의 유연함에 기댄 문제 풀이의 해가 될 듯하다. 게다가 2025년 을사년에는 근현대 을사년들이 남긴 문제들도 남아 있다. 역사 상식이 조금만 있다면, 을사라는 말 뒤에 으레 ‘늑약(勒約)’이니 ‘오적(五賊)’이니 하는 말들을 붙이게 된다. 1905년 일본 제국의 조선 침략을 위한 강제 협약, 즉 ‘늑약’이 있었고, 그에 따라 조선은 주권의 상징인 외교권이 박탈당했고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일본의 조선 강점은 1910년부터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실제 강점은 1905년 을사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런 점에서 1905년 을사년은 나라를 잃은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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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성현 말씀보다 더 가까운 몽둥이 봄가을이 되면 지역 향교는 좋은 날을 골라 춘추 대제를 거행했다. 공자를 비롯한 유교 대표 성현들을 대상으로 그 지역 수령 등 양반과 유생들이 참여하는 큰 행사였다. 지역 수령이 국가 권력을 대표하여 제사를 주재했고, 지역 권력(향권)을 대표하는 양반과 유생들이 이를 주관했다. 당연히 춘추 대제에서 제관을 맡거나 주관하는 일은 향권을 상징하는 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다 보니 향권의 향배가 명확하지 않은 지역에서는 제사 주관을 두고 다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1824년 가을, 안동향교가 그랬다. 당파의 측면에서 안동은 영남 남인의 메카였지만, 중앙 정계에서 퇴출된 지 100년이 넘는 시간은 영남 선비들의 당색도 바꾸었다. 유일한 자기 성취가 관직 진출이었던 조선 사회에서, 당색으로 관직이 막혀 있었으니 그들의 전향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니었다. 게다가 안동은 기호 노론에서 수령이 파견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수령들은 전향한 기호 노론들에게 향교의 향권을 맡겨 향전(鄕戰)을 부추기기도 했다. 이처럼 지역판 당파 싸움은 주로 향교를 둘러싸고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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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자연재해마저도 수령의 책임 유난히 오락가락하는 가을 날씨가 농민들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한다. 한창 붉게 물들어가야 할 사과가 며칠 비로 인해 푸르게 변했다는 소리가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 조금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작년에 비해 배추값은 여전히 고공행진이고, 쪽파김치라도 담그려 집어든 쪽파 한 단 가격이 작년 이맘때의 두 배도 더 되는 듯하다. 농업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조선에 비해 매우 낮은 시대지만, 시골에 사는 나는 추수기 날씨마저 불안불안하다. 나라경제 대부분을 농업에 의지했던 1581년 음력 9월, 예안 고을(현 경북 안동시 예안면 일대) 상황은 더 엄혹했다. 당시 예안 고을 대표적인 양반 가운데 한 명인 금난수의 기록에 따르면, 고을 사정은 이만저만 심각한 게 아니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기 때문에, 조선시대 백성들 입장에서는 가을이 그나마 가장 사정이 좋을 때였다. 그러나 1581년은 유난히 자연재해가 많아, 가을에도 곡식 한 자락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마치 3~4월 보릿고개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 집이 한둘이 아니었고, 기근으로 인해 굶어 죽는 사람까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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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심기 보호의 결말 가을이 깊어지면서, 왕의 일정도 덩달아 바빠졌다. 왕이 직접 선대 왕의 능을 찾아 제사 지내는 행차 때문인데, 조선의 22번째 왕인 정조에게는 제사 지내야 할 능도 많았다. 정조는 능행차를 통해 자기 왕통의 정당성과 권위를 백성들에게 드러내고 싶어 했다. 빠듯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왕의 권위가 드러날 정도의 대가(大駕) 행렬을 만들려 했던 정조로 인해, 왕을 시위해야 하는 문무 관료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1785년 음력 9월4일은 가까운 창릉과 명릉, 서칠릉, 경릉, 홍릉을 하루 만에 돌아야 하는 일정이었다. 빠듯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속도감 있는 행차가 이루어져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시위부대뿐 아니라 수행하는 신료들과 각 관서의 하급 관료들까지 어느 하나 어긋남이 없어야 했다. 그런데 이 바쁜 일정이 출발부터 삐걱거렸다. 왕의 행차가 궁을 나와 모화관에 이르렀을 때 형조 소속 하급 관리들이 떼지어 왕의 대가 행렬을 침범했다. 대가 뒤쪽의 계속되는 소란에 정조는 결국 진노했다. 시쳇말로 ‘각 잡힌 대가 행렬’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상황이 한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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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1796년, 효경교 붕괴 사건 1796년 음력 7월 말, 20대 나이에 종2품 전라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된 신홍주(申鴻周)는 사은숙배를 위해 청계천을 건너야 했다. 효경교(孝經橋) 초입에 들어설 때까지, 그의 머릿속은 조금 뒤 행할 의례 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왕에게 올리는 부임 전 인사지만, 궁의 예는 혈기왕성한 젊은 무관에게는 영 익숙지 않았다. 효경교 중간에서 그를 태운 말이 그를 떨어뜨리지 않았으면, 궁에 들어갈 때까지 그 생각은 멈추지 않았을 터였다. 다리를 건너던 중 갑자기 맞은편 말이 놀라 날뛰는 통에 신홍주의 말 역시 덩달아 날뛰면서, 그는 땅바닥에 내팽개쳐졌다. 효경교는 며칠 전 큰비로 난간 일부가 유실되었는데, 하필 그곳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신홍주는 다시 다리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수모를 겪었다.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젊은 무관이 말에서 떨어진 것도 모자라 다리 아래로 굴렀으니, 부끄러움을 감추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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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1751년, 흥해군수의 ‘고발 사주’ 1751년 음력 7월, 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권력형 범죄가 발생했다. 이 사건을 조사했던 경상감사 조재호는 직권으로 흥해군수 이우평을 파직하고, 그의 죄상을 조정에 보고했다. 그의 범죄행위를 감안할 때, 잠시라도 그를 공적 지위에 머물게 할 수 없었다. 이 사건 발단은 전해인 1750년 음력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음력 10월은 한 해 결실을 거두는 시기이다. 당연히 보릿고개를 넘기 위해 봄에 빌렸던 곡식을 갚아야 하는 시기, 즉 환곡의 계절이기도 했다. 물론 곡식을 갚을 수 있을 정도로 수확이 좋으면야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늘 상황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다. 1750년 역시 예약된 흉년이었고, 백성들 입장에서는 그 어느 해보다 환곡의 부담이 컸다. 관아에서는 주어진 권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곡식을 받아내야 했고, 결국 미납자들은 속속 관아에 잡혀 올 수밖에 없었다. 서원석의 아내 잉질낭도 미납 책임을 지고 흥해군 관아에 잡혀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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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사심으로 사심을 공격한다 예나 지금이나 최고 권력자의 핵심 권한은 인사권이다. 그러나 원론적으로 인사(人事)란 권력자-또는 권력을 이양받은 사람-가 업무의 효율적 수행을 위해 자기 권한을 일정 범위 내에서 타인에게 부여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업무의 효율적 수행이라는 목적에 부합되는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 특정 권한을 부여할 때, 이를 ‘합리적 인사’라고 말한다. 특히 ‘업무의 효율적 수행’이라는 인사의 목표가 국가 차원이 되면, 공적 차원에서 능력 유무를 판단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조선은 꽤 촘촘하고 체계적인 인사 시스템을 가졌다. 그리고 왕의 인사권도 가능하면 이 시스템 내에서 행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모든 인사가 그렇게 이상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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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국방의 의무에 대한 국가의 책임 1781년 5월11일 새벽, 창경궁을 순찰하던 위장들과 부장들은 대로변 소나무에 매달려 흔들리는 시신을 보고 혼비백산했다. 여명이 트는 이른 새벽, 흐릿한 형체만 보고 마음의 준비 없이 시신을 맞닥뜨렸던 터라, 이를 본 모든 이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새벽 댓바람부터 창경궁에 비상이 걸렸다. 궁궐 바로 앞에서 일어난 흉사였던지라, 이 일은 정조에게 바로 보고되었다. 조사가 진행되었다. 사망자는 전날 창경궁 수비를 위해 입직했던 병사. 그는 함께 입직했던 동료 병사와 다투다 스스로 목을 맨 것이라 보고되었다. 큰일이 아니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싶었던 병조의 보고 내용이 그랬다. 그러나 스스로 목을 맬 정도의 다툼이 ‘대등한 관계’에서, 그것도 ‘우발적’으로 이뤄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기록이 없어 당시 상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사망한 병사는 목숨을 버리고 싶을 만큼의 괴롭힘을 장기간 당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다툼’으로 쓰고 ‘괴롭힘’으로 읽어야 하는 상황이었고, 강한 조사와 그에 따른 처벌도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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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위임된 권력의 남용 1630년 음력 4월14일, 예안현(현 경북 안동시 예안면 일대) 향청에서 지역 향교와 서원을 통해 예안 유림들을 모았다. 현내 여러 문제들을 논의하자는 게 의제였는데, 참으로 뜬금없는 의제였다. 본래 현내 복잡한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닌 데다 그 문제들이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예안현 대다수 유림들은 당시 예안현 내에 돌고 있는 예안현감에 대한 소문이 중요 의제가 아닐까 짐작했다. 그러나 예안 유림들의 추측은 빗나갔다. 예안현감은 당해 연도 전세(田稅)를 어떻게 거둘지, 그리고 이를 위한 양전(토지 측량)은 어떻게 할지 논의한 후, 서둘러 향회를 끝냈다. 지역 유림의 자치 조직인 향회 특성상 당시 문제되고 있었던 예안현감의 소문에 대해 성토할 수도 있었지만, 예안현감 편에 선 향회 우두머리인 좌수가 나서서 이를 막고 의제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감의 당시 소문에 대한 사과나 입장표명을 기대했던 유림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이 당시 예안현 내에서 떠돌고 있는 소문대로라면 예안현감의 권력 남용은 심각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현감이 그렇게 행동했던 이유에 대해 납득할 만한 해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지역 유림들이 나서 조정에 탄핵이라도 해야 할 사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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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나아감과 물러섬의 도리 “나는 일찍이 우리나라 선비들 가운데 약간이라도 도의를 사모했던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세속적 우환에 걸리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소이다. (중략) 그들이 미진했던 점은 다름이 아니라 학문이 지극하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너무 높여 처신한 데 있고, 시의(時宜)도 헤아리지 못하면서 세상을 경륜(經綸)하는 데 용감했기 때문이오.”(<퇴계선생문집>, 권16, ‘기명언에게 답함’) 1559년, 이황이 나아감과 물러남의 도리를 묻는 33세의 젊은 기대승에게 답한 편지의 일부이다. 기대승은 한 해 전 이미 대과에 합격했지만, 스스로 관직에 나아감과 물러섬의 도리에 어둡다고 생각하여 이황에게 그 처신을 물어왔던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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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당파와 도덕적 책임의 범위 1796년 음력 2월13일, 정조의 최측근인 좌의정 채제공이 파직되었다. 세손 시절부터 함께 동고동락한 채제공이었지만, 정조의 결단은 추상같았다. 발단은 영릉(英陵·세종대왕의 능) 별검 이주석에 대한 어사의 보고였다. 이 보고에 따르면 이주석과 그의 동료 이주명의 죄는 심각했다. 특히 두드러진 죄는 우금령(牛禁令·소 도축 금지령)을 어긴 일이었다. 조선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소 도축을 법으로 금했는데, 그에 더해 한 해 전인 1795년에는 이를 강조한 왕명이 별도로 내려져 있었다. 그런데도 이주석은 능졸들이 영릉 내에서 소를 사적으로 도축하는 것을 허락했으니, 문제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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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하늘의 변화가 말하는 것 지구온난화 때문일까? 올해 겨울은 지난 겨울들에 비해 유난히 따뜻했다. 입춘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남쪽 지방은 겨울 동안 개울과 연못에 얼음 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지난주 며칠 동안 남부 지방에 내린 비는 여름 장마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서울과 수도권 지역의 폭설이 ‘그래도 아직은 겨울이야’라고 말하는 듯하지만, 올겨울 하늘이 예년과 많이 달랐던 것은 사실이다. 1737년, 울산 부사 권상일이 본 새해 정초의 하늘 역시 어지럽기는 마찬가지다. 경상도 인근 지역에서 올라온 보고뿐 아니라, 병영의 조보까지 참고해서 하늘의 변화를 살핀 결과였다. 새해 첫날, 경상도 북부 지역인 영주와 풍기에서는 무지개가 사방에서 일어나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무지개의 발생 원리를 알고 있는 현재도 겨울 무지개는 흔치 않으니, 조선시대에 이 무지개가 어떻게 읽혔을지 상상 가능하다. 당시 무지개는 음양의 조화가 무너졌음을 상징하는 증표였으니, 정월 초하루 무지개를 본 백성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