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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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나아감과 물러섬의 도리 “나는 일찍이 우리나라 선비들 가운데 약간이라도 도의를 사모했던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세속적 우환에 걸리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소이다. (중략) 그들이 미진했던 점은 다름이 아니라 학문이 지극하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너무 높여 처신한 데 있고, 시의(時宜)도 헤아리지 못하면서 세상을 경륜(經綸)하는 데 용감했기 때문이오.”(<퇴계선생문집>, 권16, ‘기명언에게 답함’) 1559년, 이황이 나아감과 물러남의 도리를 묻는 33세의 젊은 기대승에게 답한 편지의 일부이다. 기대승은 한 해 전 이미 대과에 합격했지만, 스스로 관직에 나아감과 물러섬의 도리에 어둡다고 생각하여 이황에게 그 처신을 물어왔던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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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당파와 도덕적 책임의 범위 1796년 음력 2월13일, 정조의 최측근인 좌의정 채제공이 파직되었다. 세손 시절부터 함께 동고동락한 채제공이었지만, 정조의 결단은 추상같았다. 발단은 영릉(英陵·세종대왕의 능) 별검 이주석에 대한 어사의 보고였다. 이 보고에 따르면 이주석과 그의 동료 이주명의 죄는 심각했다. 특히 두드러진 죄는 우금령(牛禁令·소 도축 금지령)을 어긴 일이었다. 조선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소 도축을 법으로 금했는데, 그에 더해 한 해 전인 1795년에는 이를 강조한 왕명이 별도로 내려져 있었다. 그런데도 이주석은 능졸들이 영릉 내에서 소를 사적으로 도축하는 것을 허락했으니, 문제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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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하늘의 변화가 말하는 것 지구온난화 때문일까? 올해 겨울은 지난 겨울들에 비해 유난히 따뜻했다. 입춘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남쪽 지방은 겨울 동안 개울과 연못에 얼음 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지난주 며칠 동안 남부 지방에 내린 비는 여름 장마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서울과 수도권 지역의 폭설이 ‘그래도 아직은 겨울이야’라고 말하는 듯하지만, 올겨울 하늘이 예년과 많이 달랐던 것은 사실이다. 1737년, 울산 부사 권상일이 본 새해 정초의 하늘 역시 어지럽기는 마찬가지다. 경상도 인근 지역에서 올라온 보고뿐 아니라, 병영의 조보까지 참고해서 하늘의 변화를 살핀 결과였다. 새해 첫날, 경상도 북부 지역인 영주와 풍기에서는 무지개가 사방에서 일어나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무지개의 발생 원리를 알고 있는 현재도 겨울 무지개는 흔치 않으니, 조선시대에 이 무지개가 어떻게 읽혔을지 상상 가능하다. 당시 무지개는 음양의 조화가 무너졌음을 상징하는 증표였으니, 정월 초하루 무지개를 본 백성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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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병곡역 난투 사건 1644년 음력 12월21일, 경상도 병곡역(현 경북 영덕군 병곡면)에 근무하는 역인(驛人)들의 얼굴에 짜증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이제 갓 무과에 합격한 선달들이 변방 부임지에 가는 길에 단체로 병곡역을 찾았기 때문이다. 물론 역원은 관료들의 공무 여행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설치되었으므로, 이들의 이용이 문제 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겨우 무과나 합격한 선달들이 꼴에 양반이라고 종까지 대동하고 떼로 들이닥쳤으니, 평소 높은 관료들에게 시달려온 역인들의 얼굴빛이 좋을 리 없었다. 역인들의 짜증은 선달들을 대하는 태도로 드러났고, 이러한 태도는 무관으로 첫걸음을 내딛는 선달들에게 푸대접으로 읽혔다. 특히 울산에서 출발했던 선달 박취문과 박이명, 그리고 이확은 이미 지나온 역에서도 같은 대접을 받았다. 역원의 기강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명분을 만들어, 강력하게 경고할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역로를 따라 소문이 퍼져 다른 역의 대접이 좀 더 나아질 수도 있을 터였다. 박이명과 이확은 젊은 종들에게 자리를 비운 역장을 잡아 오게 했다. 술에 취해 잡혀 온 역장을 거꾸로 매단 뒤, 다른 역에서 경각심을 가질 만큼만 매질하기로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역장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은 역장 가족과 친척들 수십 명이 술에 취해 소리를 지르며 병곡역으로 쳐들어왔던 것이다. 이들은 역장이 거꾸로 매달린 것을 보고 참았던 분노가 폭발했다. 역장을 매단 새끼줄을 자른 다음 역인과 역장 친척들은 선달들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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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무명이 신분인 사회 근래 개인적으로 무명 가수들의 오디션 프로그램인 <싱어게인 3>를 즐겨 본다. 다른 프로그램과 달리, 음반을 낸 경험 있는 무명 가수들이 참여하는 경연이다 보니 참가자들의 실력은 담보되어 있다. 거기에 참가자들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개인의 사연까지 더해지면서, 자연스럽게 그들 노래에 주목하게 만든다. 그런데 가끔 그들의 음악보다 나의 귀를 더 사로잡은 것은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가수 임재범이 내뱉는 “에휴…” 하는 낮은 탄식이다. 가수 임재범의 이 탄식은 주로 실력이 뛰어남에도 오랫동안 무명 생활을 해 온 참가자의 노래를 들을 때 터져 나온다. 이 탄식은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살아온 임재범 자신의 삶에 대한 반추이자,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명으로 버텨 온 동료·후배 가수들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으로 읽힌다. 또한 더 이상 무명으로 버틸 수 없어, 마지막 한 번만 더 유명 가수에 도전하는 아픈 현실에 대한 탄식으로도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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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진상의 역설 비교적 오래된 이야기지만, 청어는 한때 우리네 겨울 밥상을 풍성하게 만든 대표 생선이었다. 오죽 흔했으면 청어로 과메기를 만들 정도였을까 싶지만, 기후변화로 인해 이제는 꽁치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날이 쌀쌀해지면 살에 기름기가 올라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보니, 겨울이 되면 조선시대 왕의 밥상에도 생청어가 빠지지 않았던 듯하다. 이 시기 동해와 남해 일부를 관할했던 경상감사 진상품 가운데 하나가 청어였던 이유이다. 272년 전인 1751년 음력 10월18일, 경상감사 조재호는 시름에 빠져 있었다. 매월 음력 보름(15일)이면 끝냈어야 할 진상이 3일이 지나도록 아직 이루어지지 못한 탓이었다. 다른 물품들은 품질과 수량 점검을 거쳐 진상 준비를 모두 마쳤지만, 아직 생청어가 봉입되지 않고 있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음력 10월 초부터 가능한 모든 장비와 인력을 동원하여 청어잡이에 나서도록 독려했지만, 그해 유난히 따뜻했던 바닷물로 인해 청어가 잡히지 않은 탓이었다. 송구함으로 몸 둘 바를 모르는 마음을 담아 진상이 늦은 사유를 왕에게 보고하는 한편, 바다를 끼고 있는 지방관들에게는 강한 질책성 공문을 발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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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잡고 싶은 정치인 되기 서울 강서구청장 선거 이후, 정국은 총선을 향한 빠른 레이스가 시작된 모양새다. 쏟아지는 여론조사 결과와 난무하는 정치공학적 담론들로 머리가 어지러운 것을 보면, 총선을 향한 여당과 야당의 고민 역시 그 어느 때보다 깊은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많은 오가는 담론들 속에 정작 정치의 본래 목적과 그것이 지향해야 할 원론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 듯하다. 너무 당연해서, 그래서 논의할 필요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새겨볼 필요조차 없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1637년 음력 9월9일, 예안현(현 경북 안동시 예안면 지역)은 현감 이경항의 갑작스러운 사직 통보로 술렁였다. 3개월 전 불명예스럽게 파직된 전임 현감 김경후의 뒤를 이어, 그가 부임한 지 불과 2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경항은 전임 현감들이 현의 크고 작은 일들을 아전들에게 일임한 후 그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현 행정이 파탄나는 사례들을 많이 보았다. 현의 사무를 엄격히 관리하고, 현에 속한 아전들과 관속들을 강하게 단속했던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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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장시경 모반사건 1800년 음력 6월, 정조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은 영남을 좌절에 빠뜨렸다. 1792년 윤4월 영남은 만명 이상이 연명한 사도세자 신원 상소를 올렸고, 그 이후 6년여 만에 영남은 중앙 정계에서 일정 정도 자신들의 입지를 만들고 있었다. 근 100여년 만에 영남을 향한 왕의 따뜻한 시선을 체감하고 있었지만, 다시 노론 벽파가 자기 정권을 강화하는 과정을 눈 뜨고 지켜봐야 하는 시기가 닥쳐오고 있었다. 슬픔을 빌미로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지만, 불안한 상황이기는 했다. 그러던 음력 8월24일, 영남을 절망에 빠뜨린 소문이 퍼졌다. 인동부(지금의 경북 선산군 인동면 일대)에서 모반이 일어났다는 소문이었다. 주모자는 장시경으로, 17세기 영남 유림을 대표했던 장현광의 후손이었다. 소식에 따르면 장시경 형제는 국상을 빌미로 50여명의 병력을 일으켜 수령을 결박한 후, 병마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인동부 수령이 응하지 않자, 그를 관문 밖에 묶어 두고 상주 진영으로 진군했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젊은 선비 류의목은 안 그래도 영남 처지가 바람 앞의 등불 같은데, 이 사태로 인해 영남의 미래를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강한 절망의 표현이었다.(류의목, <하와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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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권력의 횡포 대하는 그들의 방법 종3품 도호부사인 갑산(현 함경남도 갑산군 일대)부사도 상급기관 횡포는 답답했던 모양이다. 1789년 음력 7월23일 갑산부에서 가까운 진동진 만호 노상추가 갑산부사로부터 받은 편지를 보면, 얼마나 심경을 털어놓을 데가 없으면 노상추에게까지 이러한 편지를 보냈을까 싶다. 갑산부는 국경을 접하고 있어, 함경도 병영 영장(營將)의 지휘를 받았다. 당시 갑산부에서 올리는 공물도 병영에서 관할했는데, 이번 갑산부 공물 진상에 문제가 있었던 듯했다. 일과를 마친 후 노상추가 서둘러 갑산부사를 찾은 이유였다.(출전 <노상추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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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40년 만의 광복 1945년 8월15일 광복은 형식적으로 35년 전인 1910년 8월22일 체결된 한일병합조약을 무효화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일병합조약이 가능했던 이유는 1905년 11월 일본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을사늑약은 문장만 보면 ‘대한제국이 부강해질 때까지’ 대한제국을 ‘보호’하기 위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이 갖는다는 조약이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을사늑약 체결 다음해인 1906년 음력 6월26일, 최익현과 그의 제자 임병찬은 서울 명동 일본군 사령부 재판정에 서 있었다. ‘일본에 의해 규정된 죄’에 대한 판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해 연말, 을사늑약 소식을 받아 든 최익현은 분연히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疎)>를 올렸다. 을사조약 체결에 가담한 5명의 역적을 처단하라는 상소였지만, 핵심 내용은 을사늑약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최익현뿐만 아니라, 전국의 뜻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상소를 올렸지만, 더 이상 상소가 통할 시점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익현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길은 무장봉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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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1605년 안동 대홍수 1605년 음력 7월, 예안 고을(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일대)은 열흘 가까이 내린 비로 마을 형태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안동부 관아를 비롯하여 안동 상징인 영호루와 여강서원마저 떠내려갔으니, 약 20킬로미터 정도 상류에 위치한 예안 지역이야 말해 무엇할까 싶다. 당시 이 홍수는 낙동강을 따라 안동과 선산, 경주까지 물바다를 만들었고, <실록> 기록에 따르면 “둥둥 떠다니는 시체가 부지기수”였다. 안동 풍천면 구담 지역 강가에 ‘밀려 나온’ 시신만 40구가 넘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지는 짐작하기도 어렵다.(출전: 김령, <계암일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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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안 하느니만 못한 일 1778년 음력 4월29일, 선산에 사는 노상추는 화가 많이 났다. 문동마을 큰집 종 점발이 헐레벌떡 달려와 “도둑이 들었다”고 알려왔기 때문이다. 큰집 옷들을 모두 훔쳐 갔다고 하니, 적지 않은 피해였다. 근 한 달 동안 조카며느리 초상으로 정신없었던 노상추는 도둑의 행태가 얄밉기 그지없었다. 상복을 입기 위해 벗어 두었던 옷까지 모두 도둑맞았으니 말이다.(출전: 노상추, <노상추일기>) 우선 큰집 상황을 확인한 후, 노상추는 상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둑 잡는 일을 상주진에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지방 수령이 아니라, 군 조직인 진영(鎭營)에 이 일을 맡기는 게 좋겠다는 판단에서였다. 한양의 경우 도둑만 전문으로 잡는 포도청이 있었지만, 지역에는 이러한 기관이 없었다. 이 때문에 지역에서 큰 도둑이 발생하면 토포사를 파견하거나 그 지역 방어를 책임진 진영에서 토벌을 맡았다. 단순 절도야 지방 수령 담당이지만, 조선 시대 도둑은 떼 지어 강도와 약탈을 일삼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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