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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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역모를 대하는 그들의 방식 1616년 새해 벽두부터 과거 시험을 위해 상경했던 김광계는 서울에서 황중윤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1615년 10월 황중윤이 경상도 현풍에서 금부도사에 의해 한양으로 압송된 지 넉 달 만이었다. 역모에 연루돼 목숨을 건지는 것만도 다행이라 여겼는데, 건강해 보이기까지 하니 다행도 이런 다행이 없었다. 황중윤이 연루된 ‘신경희 옥사’ 역시 대부분의 옥사가 그렇듯 복잡한 정치 상황과 관계돼 있었지만, 그 시작은 의외로 허술했다. 김광계의 기록에 따르면, 이 옥사는 행실이 불량하기로 소문난 소명국의 무고 때문이었다. 소명국은 평소 가까웠던 신경희가 자신을 간통죄로 고발한 것에 반발해 “장령 윤길, 정언 양시진이 신경희와 함께 몰래 반역을 모의하고 능창군을 추대하려 합니다”라고 고변했던 것이다. 자신의 위기를 역모 고변으로 벗어나보려 한 건데, 이게 예상할 수 없는 상황으로 번졌다(김광계, <매원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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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얼자(孼子)의 아버지로 산다는 것 영천(경상북도 영주의 옛 지명) 사람 이수에게는 아버지로서 아픈 손가락이 있었다. 젊은 시절 천인(賤人) 신분의 여성을 첩으로 들여 낳은 얼자(孼子) 때문이었다. 조선 역시 일부일처제가 원칙이었지만, 양반들의 경우 정상적으로 혼인한 아내 외에 따로 첩을 두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첩은 대체로 양반가 여성이 아니었기 때문에, 첩의 자녀 신분은 양반인 아버지 신분을 따를 수 없었다. 조선시대 신분은 어머니 신분에 따라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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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승육(昇六)의 기쁨 9급에서 1급까지인 행정 공무원 직급에서 모든 승진이 기쁘지 않을 이유가 없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의미가 큰 승진은 5급이 아닐까 싶다. 이른바 ‘사무관’으로의 승진은 실무자에서 관리자로 진입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직급명에도 ‘관’이 붙고, 기초지자체의 경우에는 과장으로 보임될 수 있다. 중앙이나 광역지자체에서도 팀장급이니 권한과 책임이 큰 중견공무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5급에 바로 임용되는 시험은 ‘고시’라 불릴 정도로 어렵고, 9급부터 시작하는 공무원의 경우 평생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직급이 5급인 이들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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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환곡, 구휼이라는 이름의 폭정 1629년 음력 10월26일, 안동부(현 경북 안동시 일대) 백성들은 마치 “뱀 구덩이에 떨어져 허둥대는 형국”(김령, <계암일록>)에 놓여 있었다. 매년 이 시기, 백성들을 힘들게 만드는 환곡 때문이었다. 기근이 들거나 보릿고개를 넘기 힘든 백성들에게 구휼 목적으로 빌려 주었다가 추수기에 이자를 더해 돌려받는 게 환곡(還穀)이지만, 구휼이라는 목적이 사라지면 남는 것은 채권과 채무라는 앙상한 관계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조선 백성들에게 매년 가을은 국가에 대한 채무 이행의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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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의도적 외면만이 할 수 있는 일 1778년 음력 9월의 기록에 따르면, 선산 지역의 작황은 말이 아니었다. 봄에 빌린 환곡은 고사하고, 전세(田稅) 납부만으로도 겨울 나는 게 불가능할 정도였다. 절망은 수확에 대한 기대에 반비례하는 법이니, 민심은 흉흉해졌고 백성들은 겨울 초입부터 허리끈을 졸라매야 했다. 다행히 이 와중에 새로 부임하는 경상도 관찰사가 선산을 지나 성주로 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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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감찰권의 이상한 능력 1631년 음력 8월 마지막 날, 예안현(현 안동시 예안면)에 사는 김령은 멀리 담양에서 온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해 초 예안현감으로 재직한 나무송이 보낸 편지였다. 그는 갑자기 파직을 당해 고향 담양으로 돌아간 후, 현감 시절 친분이 깊었던 김령에게 자신이 당한 억울함을 전했다. 김령도 지역 송사를 잘 처리했던 나무송의 파직이 의아한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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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코드 인사와 승진의 논리 1796년 음력 7월21일자 <노상추 일기>는 불쾌함으로 가득 차 있다. 노상추가 거쳤던 삭주부사 자리에 음관(蔭官)인 온양군수 변위진이 제수되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작은 군현이나 변방에선 과거 합격 없이 조상 음덕으로 관직을 받는 음관이 배치되는 사례가 간혹 있지만, 당상관인 부사 자리에 음관을 발탁한 일은 이례적이었다. 게다가 노상추의 불쾌함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변위진은 병마절도사 백동준의 후실 처남으로, 무과 합격 없이 병마절도사 후광에 힘입어 ‘선전관에 천거’(이를 줄여 ‘선천’이라고 불렀다)된 이른바 남항천(南行薦)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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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기록 앞에 설 부역자들 1634년 음력 5월, <광해군일기> 편수가 끝났다. 1633년 12월 <광해군일기> 중초본이 완성됐고, 이를 기반으로 이듬해 5월 정초본이 마무리됐다. 반정으로 폐위된 왕이기 때문에 ‘실록’이 아닌 ‘일기’로 명명됐지만, ‘실록’이든 ‘일기’든 사초(史草)로만 존재했던 조각의 기억들이 체계적인 기록이 됐다. 기억이 기록이 되면, 기록 대상이 된 인물들은 역사의 판단 앞에 서기 마련이다. 그 17년 전인 1617년 겨울, 이영구 등 당시 70여명의 과거 합격자 행적도 역사의 판단 앞에 섰다. 조선시대 과거 합격은 개인 노력의 성과이기도 하지만, 거꾸로 보면 국왕이 내린 가장 큰 은혜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합격자 발표가 이뤄지면, 합격자들은 국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를 담은 사은례(謝恩禮)를 행했다. 사은례의 핵심은 왕과 왕비, 그리고 왕실 큰어른인 대비를 향한 배례였다. 감사와 충성의 의미를 담는 행사였기에 국왕만큼이나 왕실의 큰어른에 대한 배례 역시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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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가좌책의 역설 신임 대구 판관 이성진은 관아에 항명했다는 이유로, 대구부 면임(面任)들과 백성 대표 300여명을 매질했다. 한 번에 모두를 처벌할 수 없어서, 1761년 음력 6월 말부터 3번에 걸쳐 이를 시행했다.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대구 판관이 대구부 전체 백성들을 매질한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는데, 그 이유는 가좌책 때문이었다. 가좌책은 지역 내 모든 백성의 집과 사람, 재산들을 속속들이 기록한 일종의 호적이다. 호구와 개인 소득까지 국가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현대 관점에서 보면, 군현 지방관이 별도로 이러한 자료를 만드는 게 이상할 수 있다. 조선 역시 세금과 역(役)을 부과하기 위한 기초자료 확보를 위해 3년 단위로 호적을 작성했다. 지방관들은 이 일의 실무자들이었으니, 제대로 호적을 작성했다면 별도의 가좌책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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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병자호란, 여성들의 또 다른 전쟁 1637년 음력 5월26일, 반가운 얼굴이 새벽 댓바람부터 김광계를 찾았다. 한양을 다녀온다기에 한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던 김시익이었다. 병자호란이 끝난 지 채 4개월이 지나지 않은 터라, 한양 상황이 궁금했던 김광계로서는 그의 방문이 유난히 반가웠다. 그러나 김시익이 전하는 한양 상황은 전쟁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던 영남 사람들로선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참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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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인조의 창경궁 수리 1633년 음력 5월2일, 김령이 예안현감으로부터 받아 든 조보에는 사헌부 헌납에 임명된 이상질의 상소가 실렸다. 인조가 추진하던 창경궁 수리 공사에 대해 “요역과 부세가 너무 많고 무거워 백성들이 괴로워하고 있으니, 궁궐을 짓기에 적당한 때가 아니”라면서 반대했다. 창경궁 수리에 대한 왕의 의지를 비판한 신하가 거의 없는 상황이라, ‘곧은 언관’ 모습을 보여준 일이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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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이념 사회와 선명성의 정치 1808년 여름, 송흠선이 전주 들판에서 참수됐고 그 목은 저자에 걸렸다. 굳이 송시열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사대부에게는 과한 처벌이었다. 서원에 배향된 송시열 위패를 훼손했다는 게 이유였다. 집권 세력인 노론의 관점에서 볼 때, 송시열 성인화에 매진해도 못마땅할 후손이 위패까지 훼손했으니 용서가 되지 않았던 듯했다. 이듬해인 1809년 음력 4월1일, 조정에서는 다시 송시열의 후손 송능상의 이름이 거론됐다. 송능상은 송시열의 증손자로, 지역에서 학덕을 인정받아 ‘유일’(遺逸·관직에 나가지 않는 은거한 선비)로 불렸던 인물이다. 이미 고인이 된 지 50년도 더 되었지만, 윤우대를 비롯한 사부학당 유생들은 선현을 깎아내리고 모욕했다는 이유로 송능상을 탄핵했다. 그의 문집 <운평집>에 주자 정론과 다른 입장이 들어 있다는 게 이유였다. 정확한 내용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예(禮)에 대한 해석이 문제가 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