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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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고백을 쑥스러워할 수 있기를 한 해를 돌이켜보며, 그간 새겨둔 데이터들을 꺼내어 보았다. 1년 동안 쓴 글, SNS 포스팅, OTT 시청 기록, 찍어둔 책 사진들, 일정 수첩에 박힌 지난 약속들을 나열하고 보니 2024년도 열심히 살았구나 싶었다. 연초에 호기롭게 세웠던 목표 가운데엔, 우선순위에서 밀려 은근슬쩍 소멸된 것들도 있었다. 인공지능 기술이 개인을 아주 뾰족하게 파헤쳐서 기어이 그 사람의 목표를 다 달성하도록 돕고 심지어 조종까지 하는 세상이 온다 하더라도, 나는 일본어 가타카나 철자를 끝끝내 못 외울 것 같다. 데이터에는 기억과 감정이 새겨져 있다. 지난해 1월, 명함 애플리케이션에 수십장 우르르 박힌 이름들에는, 1년간 이렇게까지나 깊어질 줄 꿈에도 몰랐던 사람들과의 첫 만남이 배어 있다. 업계에서 자주 보게 될 벤처캐피털 교육 과정 동기들이 묶인 날이었다. 3월18일에는 무척 만나보고 싶던, 눈이 정말로 반짝반짝 빛나는 창업자를 마주했었다. 분당의 한 건물 1층에서 만나 서로 동공을 살짝 떨며 얘기했던 순간이 엊그제 일인 것만 같다. 6월 초에 갔던 학회와 11월 마지막 날 갔던 학회는, 연구하는 사람들끼리 통하는 은은한 감동 같은 것을 잔뜩 머금게 해줬다. 개인적으론 연구자로서의 아이덴티티를 되새기게 해준 시간 조각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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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덜 하기보다는 잘하고 싶어서 전 세계 개발자와 창업가들이 시제품 정도의 애플리케이션을 올려 사용자의 반응을 확인하는 플랫폼이 있다. 생성형 AI 기술이 빠르게 확산된 지난 2년 동안 이 사이트를 문지방 닳듯 들여다보며 제품 타깃의 변화를 봤다. 데이터로 분석해보면 재밌는 게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 지난해 4월부터 올해 11월까지의 데이터 6만여건을 모아 분석해봤다. 이 가운데 ‘오늘의 제품’으로 꼽히는 최소 요건인 1000건을 득표한 제품들을 뽑아보니 딱 300개가 나왔다. 시계열로 어떤 기능의 제품들이 더 관심받고 덜 출시됐는지 알고 싶었고, 맥락적으로 분류 참 잘하는 챗GPT와 함께 거칠게 데이터를 군집별로 쪼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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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뾰족한 성공 사례가 없어서 몇주 뒤면 챗GPT가 세상에 나온 지 정확히 2주년이 된다. 2년 새 기술적 변화는 많았다. 대규모 언어모델(LLM)의 크기는 파라미터 수를 기준으로 3배 넘게 커졌고 연산량도 덩달아 늘었다. 패러다임 전환도 그새 있었다. 기존에는 학습을 통해 맥락에 맞는 결과물을 산출해내는 탐색적인 용도로서의 언어모델이 중점적으로 개발됐다. 그러나 9월에 출시된 챗GPT o1 모델은, 기존에 학습한 데이터에만 머무르지 않고 생각을 해서 답을 해내는 추론 능력이 크게 향상됐다. 하지만 AI가 우리 일상의 어느 부분을 바꾸어 놓았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여전히 얼리 어답터들의 생활만 바뀐 것 같다”고 말할 수 있겠다. 빠르게 적응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매달 2만~3만원씩 기꺼이 내며 AI 서비스들을 활용한다. 문서 작성부터 영상 편집, 발표 슬라이드 작성과 유튜브 요약까지 어느 한 구석 AI 기술을 안 넣는 곳이 없을 정도다. 빠른 생산성은 더 많은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이로써 더 빠른 속도로 수익 창출을 해낸다. 그러나 다른 분야들은 어떠한가. 충분히 AI 기술을 쓰고 있을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전 세계적으로 수백조원대의 돈이 AI 모델 개발에 들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몸집 대비 효용은 낮다는 식의 거품론이 제기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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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마음을 들키는 순간 “만일 내일 지구가 사라진다면, 마지막으로 나는 무엇을 할까?”라는 이야기를 하게 된 건, 레이디 가가와 브루노 마스의 신곡 ‘Die with the smile’을 막 듣고 난 뒤였다. 노랫말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옆에서 웃으며 잠들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단 좀 더 역동적으로, 마지막까지 체력과 정신력을 불태울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라면 인류 멸망을 목전에 두고 거리에 피아노를 끌고 나와 마지막까지 화려한 연주를 이어가지 않을까, 바둑 고수들은 자신의 라이벌과 마지막 대결을 하겠지, 우리 검도관 사범님이라면 끝까지 대련을 하실 거야, 같은 지레짐작을 늘어놓다가 문득, 나는 딱히 잘하는 것도 없고 엄청나게 몰두한 것도 없으니 집에 좋은 술이나 쟁여 두었다가 꺼내 먹어야겠다고 마무리를 지었다. 그 하고많은 것 가운데 술이라니! 술을 좋아하는 속내를 들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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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싫어하는 것을 겪지 않을 권리 명절이 다가온다. 메타인지를 총동원할 시기가 온다. 닷새 연휴 중 며칠을 가족과 함께하고 며칠은 나만의 휴가로 쓸 것인지, 무더운 날씨에 추석 선물은 무얼 준비해 어떻게 나를 것인지, 어떤 말은 덜 하고 덜 들을 수 있을지 등등 생각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역시 운전이다. 뉴스 채널들이 이전 데이터를 토대로 교통 정체 예측을 보도해주기는 하지만, 그때부턴 어쩐지 눈치싸움이 시작되는 것만 같다. “오후 4~5시 사이 귀경길이 가장 막힐 거라고 예측했으니 모두 이 시간에는 안 움직이겠지?”라는 생각에 길을 나섰다가 역시나 차량정체를 겪기도 하고, “밤 10시 이후 이동이 낫다”는 말을 금쪽같이 믿었다가 비슷한 뉴스를 본 인파와 함께 오랜 시간을 도로에서 보내기도 한다. 도로 위에서 하염없이 보내는 시간을 싫어하지만,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시절이 왔다고 해도 이 싫은 것을 피할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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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대화를 늘릴 방책 여름 휴가철을 틈타 도무지 글자를 제대로 읽을 수 없는 나라에 왔다. 오지랖 넓은 성격 덕에 이 나라에도 현지인 친구를 몇명 두고 있는데, 기왕 여기까지 온 김에 메신저로 그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구실을 열심히 찾아봤다. 그러나 챗GPT를 비롯한 거대 언어모델 기반 서비스들 때문에 모든 핑곗거리를 놓치고 있다. AI 서비스가 나오기 전이었다면 친구들에게 이런 질문들을 했을 것이다. 현지 뉴스 사진을 찍어서 “이런 화면이 나오는데 무슨 뜻이야?”라고 물을 수도 있고, “내 이름을 너희 언어로 써 줄래?”라고 부탁할 수도 있다. 좀 더 나아가서 “이런 말을 들었는데 어떤 뉘앙스야?”라고 되물을 수도 있고, “왜 이 투어에서는 외국인을 우대해 준 것일까?” “근처에 온천이 많은데 어디가 나에게 제일 어울릴 것 같아?” 같은 물음을 속사포처럼 뱉을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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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정확도에 민감해질 때 출근하던 아침, 스마트워치의 진동이 울렸다. “깨끗이 씻었어요”라는 메시지가 떴다. 팬데믹 시기에 추가된 기능인데, 20여초 손을 씻으면 이런 메시지가 뜨곤 한다. 그런데 서울 성수동 한복판에서 이런 메시지라니. 분명 매미 울음과 손의 흔들림을 ‘씻는 행위’로 판단한 기계의 실수임이 틀림없었다. 이런 기계적 혼동쯤은 웃으며 넘어갈 수 있다. 도리어 ‘여름철 곤충 소리가 물소리로도 들릴 수 있겠구나’라는 인식의 전환을 경험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런 기계의 오류를 활용해 소박하게 우리의 이득을 챙겨온 적도 있다. 휴대전화를 마구 흔들어 ‘1만보’를 걸은 것처럼 가장하기도 했고, 마우스를 툭툭 쳐서 잠들기 직전의 원격 근무 툴을 깨우기도 했으며, 이상한 광고를 눌러 보더라도 황급히 다른 콘텐츠들을 꾹꾹 눌러 ‘검색 세탁’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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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나의 데이터가 너를 부를 때 애플이 AI를 ‘애플 인텔리전스’로 재정의했다. 하반기 나올 아이폰에 오픈AI를 비롯한 다양한 AI 모델을 녹여 넣어, 기존의 인공지능을 넘어선 애플 기기와 사용자를 완벽하게 연결하는 새로운 서비스를 내보이겠다고 선언했다. 시장은 벌써부터 열광적으로 반응하고 있다. 주가에 곧장 반영됐다. 스마트폰은 우리 일상의 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우리의 데이터를 차곡차곡 쌓아 담고 있는 걸 모두가 이젠 받아들이고 있다. 스마트폰이 보유한 개인 데이터의 가치는 AI와 맞물리며 더욱 높아질 것이다. 오죽하면 일론 머스크도 직접 스마트폰을 만들 거란 뉘앙스를 흘리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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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너와 나의 팩트체크 오픈AI와 구글이 한 단계 더 진화한 제품들을 잇따라 출시했다. 영화 <그녀(Her)>에서처럼 내가 발 딛고 사는 오프라인 세계와 인공지능(AI) 기술이 자연스럽게 상호작용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전파를 탔다. 손가락이 아닌 내 입으로 말을 해도 기계가 기똥차게 알아들으니, 전보다 더 많은 걸 더 다양하게 묻게 됐다. 결심이 섰다. 나의 주말 계획 중 일부를 AI에 맡겨보고, 그가 주는 정보가 얼마나 맞는지 직접 오프라인에서 확인해보기로 했다. 나의 계획은 토요일 오전 경기도 동두천 투어였다. 내겐 낯선 곳이지만, 예능 프로그램에서 본 장면들이 흥미로워 꼭 가보고 싶던 참이었다. 새로 업데이트된 챗GPT(GPT-4o)에 여러 정보를 이틀에 걸쳐 물었다. TV에 나온 식당의 대표 음식에 대한 평을 묻자, AI는 그 음식엔 사이드 메뉴를 곁들이는 게 좋고, 미국 현지 맛을 잘 구현했다는 호평을 전달하며, 예약이 필수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토요일 오전에 서울 종로구에서 출발할 생각인데 차가 막히지는 않을지도 물었다. 평소엔 1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지만, 외곽순환도로와 3번 도로가 막히는 일이 많아 30분은 더 걸릴 수 있다는 답을 들었다. 지도 데이터를 확보한 건가? 정체 구간은 어떤 데이터를 쓴 거지? 역시, 팩트체크를 위해 직접 경험하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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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응원의 외주화 겨우내 체중이 3㎏ 불었다. 처음엔 운동을 열심히 해서 근육이 붙은 것인 줄 알았는데, 얼굴이 동그래진 것을 보고는 단순히 살이 찐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에게도 절제의 기회는 있었다. 올 초 연속혈당측정기(CGM)를 착용하고 실험해볼 일이 있었다. 음식별로 달리 튀는 혈당 스파이크 데이터를 기반으로 내게 맞는 음식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데이터는 데이터일 뿐이었다. 강력한 변수라 할 수 있는 우리집 냉동실은 맛집 그대로의 풍미를 재현한 떡볶이와 리소토, 해장국으로 차 있었고, 나는 이 재고의 양만큼 부지런히 포동포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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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세상을 담는 방법 봄이 오고 있다. 이맘때면 “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대사로 유명한 영화 <봄날은 간다>의 ‘대나무 숲 소리 수집 신’이 떠오른다. 배우 유지태가 연기한 사운드 엔지니어는, TV와 라디오라는 디지털 매체 속에 꼭 맞는 음성 데이터를 수집하기 위해 오프라인의 소리를 센서로 모아 저장장치에 담는다. 인간 세상을 학습하는 인공지능도 이렇게 오프라인의 세상이 디지털로 전환된 것을 학습한다. 사람들이 찍은 이미지와 영상에 담긴 사물들의 이름을 익히고, 그 이름들의 관계를 학습한다. 눈이 많이 쌓이면 눈사람이 있구나, 숟가락이 있으면 젓가락이 있구나, 횡단보도에 녹색불이 켜지면 사람들이 길을 건너는구나. 세상을 채우는 관계들을 토대로, 인공지능은 인간의 세상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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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각자의 쓰임 150명 정도의 투자자들이 참여하는 연수 과정에 일주일째 참석하고 있다. 인적 자본을 쌓는 네트워킹이 퍽 중요한 행사인데, 그래서 각자가 스스로를 부각하는 포인트도 다채롭다. “저는 좋은 데 많이 투자했어요” “저는 경력이 빵빵하답니다” “최신 트렌드는 다 저에게 물어보세요” “제가 사람들 모아볼게요” 등등 강점도 다양하다. 비즈니스 인맥을 강화하는 자리인 만큼, 필요에 따라 혹은 공통의 관심사에 따라 그룹별로 뭉쳐지기도 한다. 정확히 1년 전, 이 행사 참가자 수만큼의 글로벌 생성형 AI 스타트업들을 분석해 보고서를 냈었다. 나온 지 얼마 안 된 신기술을 가지고 비즈니스 모델을 제시하는 스타트업들이 대체 사용자들의 어떤 필요를 공략하려 들었는지를 촘촘하게 조사해 분류한 내용이었다. 한바탕 매출을 끌어올린 가상 프로필사진 생성 서비스도 있고, 마케팅 문구를 1초 만에 뽑아주는 회사도 있으며, 동영상을 맥락별로 잘라 자막을 자동으로 넣어주는 회사도 있었다. 각자가 포지셔닝하는 니즈는 대부분 더 높은 생산성, 그러니까 개인이나 조직이 생산할 수 있는 가치를 더 저렴한 값에 극대화하는 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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