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딩중입니다...
03
현실에 막혔나, 스스로 접었나…
‘포용’으로 시작해 ‘우리끼리’로 끝난 그들의 4년
“포용이란 생각과 입장, 이해관계와 처지, 이념과 체제 등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의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며 ‘대화’를 나누는 데서 시작된다.”
2017년 19대 대통령 선거 직후 출간한 <새로운 대한민국의 구상-포용국가>에서 문재인 후보 캠프의 정책연구그룹 ‘포용국가연구회’는 새 정부에 ‘포용적 리더십’을 제안했다.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 경청”, “편견 없는 견해 고려”, “다양한 집단의 문제에 해결책을 창출”하는 역량이 ‘새로운 대한민국’ 경영에 필요하다는 취지였다.
성경륭 전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 박능후 전 보건복지부 장관, 김현철 전 대통령 비서실 경제보좌관 등이 공저자에 이름을 올렸다. 모두 네트워크에 있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생각(저술 공저)과 출신(학연)을 공유하는 이들의 네트워크에서 보이듯 현 정부의 다양성·포용성은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하고 있다.
정치적 이해가 다른 보수 진영에서뿐 아니라, 정부 출범 초 개혁 정책을 지지했던 진보 진영에서도 경고음이 나온 지 오래다. ‘손발이 맞아야 일을 한다’는 옹호는 현 정부 4년의 폐쇄적 인사를 거치며 ‘끼리끼리 한다’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2018년 7월 ‘문재인 정부의 담대한 사회경제개혁을 촉구하는 지식인 선언’(지식인 선언 네트워크)에서 학자들은 “정부·청와대 핵심 부서에 개혁을 올바로 추진할 마인드와 실력을 가진 인물을 대거 포진시켜야 한다”며 “구태에 젖은 경제 관료들이 개혁을 이루리라 기대하는 것은 착각”이라고 밝혔다.
선언 발기인인 이병천 강원대 명예교수는 2019년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인재풀을 넓혔으면 좋겠다. 지금 정부 모습은 촛불정부라 하기엔 지나치게 ‘끼리끼리’ 한다는 인상을 준다”고 했다. 남은 기간 변화가 있길 바라는 기대 섞인 우려였다.
남은 임기 1년, 우려가 평가로 바뀔 시점이 됐다.
이 교수는 지난달 22일 전화 인터뷰에서 “강성 개혁층을 덜어내며 좁아진 외연이 여지껏 유지됐다”며 “(정부에) 들어간 지식인들은 집단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일부는 관료들과 한 몸이 돼 움직였으며 (자리를) 감당해내기엔 능력이 부족한 이들도 증명됐다”고 말했다.
네트워크상 주요 인물들은 회전문식 인사로 계속 문재인 정부의 주요한 역할을 맡았다.
‘회전문 인사’ 사례
홍장표
황덕순
정해구
이태수
조대엽
사라진 레드팀, 경고는 전달되지 않았다
지식인 사회의 비판적 목소리는 문재인 정부에 참여한 학자들의 네트워크 내부로 전달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어느새 정부 주요 정책 기조에서 사라져버린 소득주도성장, 대란·폭등 꼬리표를 달고 다닌 26차례 부동산 대책 등은 ‘레드팀(조직 내 비판자)’ 부재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대표적 사례다.
소득주도성장론에 대해서는 진보 성향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도 최저임금 인상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중소·영세기업 이윤율 증대 등의 정책이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지만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결국 소득주도성장은 성패에 대한 제대로 된 점검도 없이 흐지부지 ‘실패’ 낙인만 찍혔다.
주요 부동산 정책도 절반 가량이 사실상 ‘거수기’에 불과한 주거정책심의위원회조차 거치지 않고 결정됐다는 비판이 있었다. 임대사업자 정책에 대한 외부 비판도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강수 대구가톨릭대 교수는 “청와대나 정부에 참여한 학자들이 사회, 경제 개혁은 우리가 제일 잘 안다는 생각이 매우 강했던 것 같다”며 “밖에서 지적을 하면 혹시 잘못된 것이 없는지 검토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고, ‘밖에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한다’는 반응이었다”고 말했다.
윤순철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무총장은 “정책과 현실의 불균형을 조정하는 토론을 문재인 정부에서 찾기 어려웠다”며 “외부 의견을 듣고, 논쟁하고, 받아들이고 설득하는 과정 없이 귀를 닫은 탓에 누적되는 비판에 계속 취약해지고 독선적이라는 평가를 받게 됐다”고 했다.
1972년 미국 사회심리학자 어빙 재니스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응집성이 강한)이들이 외부 영향에서 차단될 경우, 비판적 사고 없이 획일적 의사결정을 내리게 되는 것을 ‘집단사고’로 규정했다.
미국의 존 F. 케네디 정부 시절 피그스만 침공 실패가 대표적인 집단사고의 실패 사례다. 문재인 정부는 과연 ‘집단사고’의 위험에서 자유로울까.
서는 데가 바뀌어서 풍경도 달라졌나
이들의 네트워크는 우리 사회를 바꾸는 데 얼마나 기여했을까. 공직에 오기 전 이들이 그렸던 한국 사회의 청사진은 무엇이었고, 지금 현재 한국 사회의 모습은 어디에 와있을까.
책임을 ‘묻는’ 위치에서 책임을 ‘지는’ 위치로 옮겨간 이들은 자신들의 공직을 어떻게 평가할까.
대통령 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소득주도성장특별위원회 위원장을 거쳐온 홍장표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은 지난 6월 취임사에서 “실사구시형 정책연구를 수행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홍 원장의 ‘실사구시’는 2013년 그가 공동 저자로 참여한 <실사구시 한국경제>에서 나온다. “현상에 대한 구체적 내용·본질을 이해하고 사고의 틀을 전환”해 “진실에 다가가는 것”이다.
7년 전 그는 “내수 시장을 키워 지나치게 높은 수출 시장 의존도를 낮춰야한다”면서 대기업-중소기업 격차를 완화하자고 강조했다. 또 대기업 갑질의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 적용 범위를 넓히고, 중소기업 공동교섭으로 교섭력을 높이자 했다.
공직으로 가기 전, 그들의 현실 진단은 매서웠다.
집권 4년차에 받아든 현 정부의 성적표
과거의 이들이 제시한 청사진 일부는 현실이 됐다. 문재인 정부 들어 상위 20%와 하위 20%의 임금 격차는 줄었고, 전체 근로시간도 감소했다. 고용보험 대상 범위도 특수고용노동자 등으로 넓어졌다.
그러나 현실이 되지 못한 제안 역시 즐비하다.
대기업 정규직 임금 대비 중소기업 정규직 임금은 57.3%(2020년)다. 비정규직 근로자 비율은 정부 출범 32.9%에서 지난해 36.3%로 높아졌다. 비정규직 고용보험 가입률은 40% 중반대에서 정체 중이다. 산업재해 사망률은 OECD 상위권, 공공사회복지지출 비율(GDP 대비)은 하위권에서 머문다. 코로나19 충격에 더해 수도권 부동산 폭등으로 소득불평등은 물론, 계층별·지역별 자산 불평등도 커졌다.
집권 4년차 정책 방향은 출범 초 개혁과 멀어지고 있다. 정부는 최근 감세 1조5000억원 중 60% 이상을 대기업에 집중시킨 세법개정안을 냈다. 2017년 이후 대기업·고소득자 세부담 감소가 중소기업·서민·중산층보다 큰 것은 처음이다.
진보적 학자들은 1주택자 종합부동산세 부과대상 축소, 대주주 주식 양도소득세 과세 강화 무산, 특혜 논란이 일었던 인터넷 전문은행 특별법, 기업형 벤처캐피털(CVC) 등을 현 정부의 개혁 후퇴로 꼽는다.
류동민 충남대 교수는 컨퍼런스에서 “역대 어느 정부든 경제민주주의 얘기도 하고, 재벌 규제 얘기도 했으나 정부 말기로 가면 보수 언론이나 경영자 단체에서 사유재산권 문제, 시장기능 왜곡 문제를 들고 나오고, 경제 성장도 해야하니 흐지부지 되는 일들이 반복되는 패턴을 보였다”고 말했다.
다시 등장한 고백 “관료에 막혔다”
“정치권력의 개혁의지에 맞서 강고한 실체를 드러낸 ‘고시 관료 권력’의 존재가 주목됐다… 고시 관료 권력은 독점적이고 특권화된 집단으로 항존하고 있다.”
컨퍼런스에서 한인섭 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장은 현 정부 개혁정책의 한계를 재벌·언론과 유착한 ‘관료 권력’에서 찾았다. 한 원장의 발언은 “그냥 앉아서 관료에 포획됐다(노무현 전 대통령, <진보의 미래>)”던 과거 정부의 반성을 떠오르게 한다.
전강수 대구가톨릭대 교수는 기자와 통화하면서 “관료사회 경직성의 영향이 없었다고 할 순 없지만, 정책 실패의 책임을 모두 관료에게 돌리면 무책임 한것”이라며 “외부 비판을 귀담아 듣지 않고 ‘당신들 비판 때문에 문제가 악화됐다’는 식으로 대했던 정책 참모들의 책임이 크다”고 말했다.
‘촛불 정부’를 자처한 문재인 정부에 진보 진영 지식인들도 대거 동참했지만 관료사회와의 관계 설정, 개혁 달성 측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는 어려워 보인다. 현실 정치에 발을 담았던 진보 지식인들의 쓸쓸한 퇴장도 누적됐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9일 전직 대통령 박근혜씨와 최서원씨(개명 전 최순실)에게 회삿돈 86억원을 횡령해 뇌물을 주고 수감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가석방을 결정했다.
‘국가적 경제상황’, ‘글로벌 경제환경’이 이유였다. "재벌의 반칙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묻겠다… 시장에 넘어간 권력을 국민에게 되돌려 드리겠다"던 약속은 물거품이 됐다.
사람 실루엣을 클릭하면 베일이 벗겨집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
장하성 주중한국대사
한인섭 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장
조대엽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장
국책연구기관에 몸 담아온 한 연구자는 “모든 권력이 집중돼 있는 청와대, 그 청와대를 좌지우지 하는 관료 조직이 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가장 큰 힘”이라며 “문재인 정부에 진출한 지식인들이 뭔가 해냈다고 보긴 어렵다. 지식인들은 ‘말’만 주고, 내용은 관료들이 다 채웠다”고 말했다.
그는 “현 정부를 거치며 드러난 진보 진영 지식인들의 초라한 자화상”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