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승
한문학자
최신기사
-
역사와 현실 갑을 위한 예의만 존재하는 나라 전국시대 위(魏)나라 귀공자가 수레를 타고 가다가 이름난 현자 전자방(田子方)을 만났다. 이름난 현자라지만 가진 것도 없고 지위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귀공자는 수레에서 내려 공손한 인사로 존경을 표했다. 하지만 전자방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괘씸하게 여긴 귀공자가 따졌다. “부귀한 사람이 무례합니까, 미천한 사람이 무례합니까?” 귀하신 이 몸이 먼저 인사를 했는데, 미천한 네가 이럴 수 있냐는 말이었다. 하지만 전자방의 대답은 반대였다. “부귀한 사람이 어찌 감히 무례할 수 있겠습니까? 군주가 무례하면 나라를 잃고, 제후가 무례하면 영지를 잃습니다. 하지만 미천한 사람은 잃을 것이 없습니다.”
-
역사와 현실 조선시대 펜스룰 ‘남녀칠세부동석’은 전통적인 남녀 규범을 대표하는 용어로, <예기(禮記)> ‘내칙(內則)’ 편에 나온다. <예기>에 나오는 남녀 규범은 이뿐만이 아니다. 밥을 함께 먹어도 안되고(不共食), 물건을 직접 주고받아도 안되고(不親授), 물건을 빌려줘도 안된다(不通乞假). 그릇을 함께 쓰지 않고(不同器), 우물을 함께 쓰지 않고(不共井), 욕실을 함께 쓰지 않으며(不共 ), 침구를 함께 쓰지 않는다(不通寢席). 옷을 함께 입지 않고(不通衣裳), 옷걸이도 함께 쓰지 않으며(不同枷), 수건과 빗조차 함께 쓰지 않는다(不同巾櫛). 이 밖에도 남녀가 같은 수레를 타면 남성이 몸을 살짝 돌려서 마치 등지고 앉은 듯한 포즈를 취한다는 따위의 세세한 규정이 셀 수 없을 정도다. 한마디로 직접 접촉은 물론 간접 접촉까지 원천봉쇄하는 것이 전통적인 남녀 규범이다.
-
역사와 현실 자서제질사돈방(子壻弟姪査頓榜) 1610년 광해군 2년 10월22일, 과거 시험이 열렸다. 선조 임금의 신주를 종묘에 모신 일과 왕세자가 관례를 치르고 성균관에 입학한 일을 기념하여 열린 특별 시험이었다. 그런데 이 경사스러운 자리에 뒷말이 무성했다. 20명의 합격자 가운데 상당수가 시험관의 친인척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광해군은 진상 조사를 명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합격자 박자흥은 시험관 박승종의 아들이자 시험관 이이첨의 사위였다. 합격자 이창후는 이이첨의 사돈이었고, 합격자 정준은 이이첨의 옆집 사람이었다. 합격자 조길은 시험관 조탁의 동생, 합격자 허보와 박홍도는 시험관 허균의 조카와 조카사위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 과거 시험의 합격자 명단을 ‘자서제질사돈방(子壻弟姪査頓榜)’이라고 조롱했다. 아들, 사위, 동생, 조카, 사돈의 명단이라는 말이다.
-
역사와 현실 조선은 기록의 나라인가 조선을 기록의 나라라고 한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방대한 기록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수백 권이 넘는 많은 기록들이 줄줄이 등재를 기다리고 있다. 기록 생산량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기록 관리의 실태를 살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1123년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송나라 사람 서긍(徐兢)에 따르면, 고려의 문서 행정은 몹시 간략했다. 결재를 받으면 문서는 곧 파기하며, 아예 문서를 보관하는 창고조차 없었다. 보관하는 것은 국가의 역사와 외교 문서뿐이었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외국인의 기록이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정책 결정의 세부 과정은 문서로 남기지 않았던 모양이다.
-
역사와 현실 해맞이의 유래 올해도 정동진을 비롯한 해맞이 명소에는 어김없이 인파가 가득했다. 극심한 교통정체와 바가지요금도 새해 첫날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야 말겠다는 사람들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새해 첫날의 해맞이는 이미 우리나라의 세시풍속이나 다름없다. 새해 첫날의 해맞이 풍속은 원래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다. 혹자는 연오랑세오녀 전설에서 유래했다고 하지만 다소 억지스러운 주장이다. 우리 고유의 풍속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해돋이 자체는 예로부터 인기 있는 구경거리였다. 예컨대 양양 낙산사에서 바라보는 해돋이는 금강산 유람객의 필수 관광 코스였다. 하지만 꼭 새해 첫날이라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기야 매일 뜨고 지는 해가 새해 첫날이라고 특별히 다른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