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승
한문학자
최신기사
-
역사와 현실 의심스러운 계획은 성공 못한다 새해가 시작된 지 며칠이 지났다. 새해를 맞아 다짐한 계획이 해이해질 때다. 계획을 세우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작심삼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필자가 확인하기로 작심삼일의 가장 빠른 용례는 1681년 우암 송시열이 손자 송은석에게 보낸 편지에 보인다. “네가 책을 열심히 읽는다니 참 기쁘다. 그렇지만 작심삼일이 되지 않도록 해라.” 한자 쓴다고 경기 일으킬 것 없다. 작심삼일은 한자어지만 중국에서는 쓰지 않는 말이다. 이런 말이 한둘이 아니다. ‘홍익인간’ ‘함흥차사’는 우리 역사에서 유래한 고사성어다. ‘오비이락’ ‘적반하장’은 우리말 속담을 한자로 바꾸었을 뿐이다. 모두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고사성어다. 이러한 우리 고유의 고사성어는 모두 한국어의 일부다.
-
역사와 현실 노인의 열 가지 좌절 송나라 주필대가 <이로당시화>라는 책에서 소개한 ‘노인의 열 가지 좌절’이 있다. 첫째, 최근 일은 기억하지 못하고 먼 옛날 일은 기억한다. 둘째, 가까운 곳은 보이지 않고 먼 곳은 잘 보인다. 셋째, 울 때는 눈물이 나오지 않고 웃을 때 눈물이 나온다. 넷째, 밤에는 잠을 못 자는데 낮에는 잠이 온다. 다섯째, 가만히 있지 못하고 자꾸 움직인다. 여섯째, 부드러운 음식을 마다하고 딱딱한 음식만 찾는다. 일곱째, 자식은 아끼지 않고 손주만 아낀다. 여덟째, 큰일은 묻지도 않고 사소한 일에 잔소리한다. 아홉째, 술은 적게 마시고 차는 많이 마신다. 열째, 따뜻할 때는 나가지 않다가 추우면 나간다.
-
역사와 현실 무한책임은 ‘책임 없음’과 같다 1126년, 금나라 대군이 송나라 수도 개봉을 향해 진격해왔다. 기다리는 구원병은 소식이 없고, 도성을 지키는 군사는 1000여명에 불과했다. 이대로라면 수도의 도성이 함락당하는 사태는 피할 수 없었다. 당시 도성 교외의 창고에는 대포가 500문이나 보관되어 있었다. 만약 도성으로 가지고 온다면 수비에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가지러 가지 않았다. 관련 부서들이 서로 책임을 떠넘겼기 때문이다. 국방부에 해당하는 ‘병부’는 사령부 역할을 맡은 ‘추밀원’이 가져와야 한다고 떠넘기고, 추밀원은 무기를 관리하는 ‘군기감’이 가져와야 한다고 떠넘겼다. 군기감은 대포가 수레에 실려 있으니 수레를 관리하는 ‘가부’가 가져와야 한다고 떠넘기고, 가부는 대포가 창고에 있으니 창고를 관리하는 ‘고부’가 가져와야 한다고 떠넘겼다. 이렇게 서로 떠넘기는 사이, 대포 500문은 교외까지 진격한 금나라 군대의 수중에 고스란히 들어갔다. 수도 개봉은 그 대포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고 말았다. 군사들은 몰살당하고, 황제는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 <선화유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
역사와 현실 관상은 과학인가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 관상가로 유명한 승려 혜징이 말했다. “내가 관상을 많이 보았지만 이성계 같은 사람은 없었다.” 태종 이방원의 관상도 독특했던 모양이다. 하륜이 이방원의 장인 민제에게 말했다. “내가 관상을 많이 보았지만 당신 사위만 한 사람은 없었다.” 효종은 왕자 시절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그를 지켜본 중국 관상쟁이가 말했다. “참으로 왕이 될 사람이다.” 고종의 관상도 범상치 않았나보다. 관상쟁이가 어린 고종의 관상을 보더니 마당으로 내려가 엎드려 말했다. “훗날 나라의 주인이 되실 것입니다.”
-
역사와 현실 명절 갈등 해소하는 방법 추석 직전, 언뜻 봐도 일흔이 넘은 기사가 운전하는 택시를 탔다. 자연히 추석이 화제에 올랐다. 할아버지 기사님은 어린 시절 추석이 가장 좋았단다. 갖가지 음식을 배불리 먹는 날은 일년 중 추석이 유일했단다. 새 옷을 얻어 입는 날도 추석과 설날 두 번뿐이었단다. 일자리를 찾아 상경한 뒤로도 추석과 설날만 기다렸단다. 고향이 외딴 시골이라 명절 연휴가 아니면 갈 수가 없어서다. 이제 기사님은 추석이 아니라도 배불리 먹고 따뜻이 입고, 연휴가 아니라도 언제든 고향에 갈 수 있다. 하지만 수십년간 반복해 온 추석의 경험은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노년층에 추석이 각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
역사와 현실 혼인 거절하려 만든 ‘궁합’ 남녀의 사주를 따져 배우자로서 적격인지 알아보는 방법을 궁합이라고 한다. 궁합의 기원은 기원전 1세기 한나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나라의 골칫거리는 흉노족이었다. 한나라는 수시로 국경을 침범하는 흉노를 어르고 달래며 우호적 관계를 맺고자 애썼다. 한나라가 저자세로 나오자 기고만장해진 흉노의 우두머리는 공주와의 혼인을 요구했다. 귀한 공주님을 오랑캐에게 시집보내다니 될 말인가. 그렇다고 대놓고 거절하면 후환이 두렵다. 점잖은 핑계가 필요하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궁합이다. 궁합은 당나라에 와서 체계화된다. 당나라는 세계제국이었다. 수많은 외국인 유학생과 상인들이 당나라 수도 장안의 문을 두드렸다. 신라인, 일본인, 인도인, 아랍인, 심지어 아프리카인까지 몰려들었다. 일부는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황실과 귀족 가문에 청혼하기까지 했다. 아무리 다문화 사회라지만 외국인을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 법. 당 태종은 여재라는 사람을 시켜 ‘궁도합혼법’을 만들어 외국인의 청혼을 거절할 명분으로 삼았다. 요컨대 궁합은 애당초 혼인을 거절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
역사와 현실 서울의 열 가지 풍경 지난달 국립한국문학관이 공개한 <한도십영>은 1479년 금속활자 초주갑인자로 인쇄한 보물급 문화재다. 조선 초기 서울의 열 가지 풍경을 노래한 시 90편을 엮은 책이다. <동문선> 책임 편집자로 20년간 문단 권력을 장악한 서거정을 비롯해 강희맹, 이승소, 성현, 월산대군 등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제작에 참여했다. 이들이 지은 시는 여러 문헌에 흩어져 전하고 있는데, 한데 묶은 단행본의 발견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책에 실린 서울의 열 가지 풍경을 소개한다. 첫째는 장의사에서 승려 만나기다. 장의사는 북한산 남쪽, 현 세검정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사찰이다. 당시는 공무원 연수원 겸 휴양소였다. 그 앞을 흐르는 홍제천은 도성 밖 최고의 유원지로 손꼽혔다. 둘째는 제천정에서 달 구경하기다. 제천정은 한남역 서쪽에 있던 정자로 한강 최고의 조망을 자랑했다.
-
역사와 현실 여행갈 때 뭘 가져가나 조선시대 사람들은 여행갈 때 뭘 가지고 갔을까. 어디에 가서 뭘 봤다는 기록은 많아도 뭘 가지고 갔다는 기록은 드물다. 최대 분량의 개인일기인 황윤석의 <이재난고>에 단서가 있다. 1766년 황윤석이 고향 흥덕(전북 고창)에서 한양으로 올라갈 때 갖고 간 물건 목록이다. 도포 두 벌, 적삼 세 벌, 버선 세 벌, 바지와 속옷 여러 벌, 한여름인데 겨울옷까지 가져갔다. 비를 대비해 삿갓과 비옷도 챙겼다. 짐 한쪽을 차지한 세면도구와 구급약은 지금도 여행자의 필수품이다. 선비 아니랄까봐 안경, 종이, 붓, 먹, 벼루에 책도 여러 권 넣었다. 심지어 베개와 이불, 요강까지 가져갔다. 조선시대 주막은 침구를 제공하지 않았으니까. 이쯤 되면 혼자 힘으로는 무리다. 나귀에 싣고 갔거나 노비를 시켜 운반했을 것이다.
-
역사와 현실 정치는 밥그릇 싸움 성호 이익이 집에서 닭을 키웠다. 한두 마리가 아니고 여러 마리였다. 닭들은 온 집을 돌아다니며 먹이를 찾다가 안방까지 침범했다. 방이 더러워지는 것은 둘째치고 세간살이가 남아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성호는 손을 휘저어 안방을 점령한 닭들을 쫓아내려 했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없었다. 결국 지팡이를 들고 한 마리씩 때려서 겨우 쫓아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팡이를 맞고 쫓겨난 닭들은 다시 슬금슬금 안방으로 들어왔다. 성호가 보기에 닭이 하는 짓은 당쟁과 똑같았다. 관리들은 벼슬과 녹봉을 탐내어 당쟁을 벌인다. 그러다 감옥에 갇히거나 귀양 가는 신세가 되기도 하고 심하면 목숨을 잃기도 한다. 그런데도 똑같은 짓을 반복하니, 지팡이로 얻어맞을 줄 알면서도 기어이 안방으로 들어오는 닭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먹이를 다투느라 서로 물어뜯고 발로 차는 것도 비슷하다. 그나마 다른 점이 있다면 닭은 먹이를 다 먹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이좋게 지내지만, 당쟁은 도무지 그치는 날이 없고 반드시 상대를 죽여 없애 끝을 보고야 만다는 것이다. <성호사설>에 나오는 이야기다.
-
역사와 현실 장애인 시위에서 놓친 것들 장애인단체의 지하철 시위가 소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예전 같으면 장애인단체의 요구는 불법 시위로 불편을 겪는 시민의 성난 목소리에 묻혀버렸을 텐데, 언론의 반응은 예전과 사뭇 다르다. 시민의 불편을 언급했다가 뭇매를 맞고 장애인 혐오로 낙인찍힌 야당 대표를 보라. 달라진 분위기를 실감할 만하다. 상반된 의견이 대립할 때 한쪽을 편들기는 쉽다. 시민의 불편을 부각시켜 시위 방식을 비판하는 것도 쉬운 일이고, 장애인의 불편에 공감하며 시위의 불가피성을 옹호하는 것도 쉬운 일이다. 이 상황에서 언론의 할 일은 한쪽을 편들어 발길질에 가담하는 것이 아니라 편가르기의 와중에 놓친 부분은 없는지 살피는 것이다. 구부러진 것을 펴려다가 반대쪽으로 구부러뜨리는 ‘교왕과직’을 저지르지 않았는지도 보아야 한다.
-
역사와 현실 수상한 ‘만인산 성명’ 때는 구한말. 소격동 한 주사는 이 판서에게 줄을 대어 밀양군수에 임명된다. 무능력자가 관직에 오르면 결과는 뻔하다. 재정은 파탄지경, 군민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 임기가 끝나가자 한 주사는 유임을 위해 여론을 조작한다. 신문을 이용해 자신을 청백리로 포장하고 시정잡배를 동원해 ‘만인산’을 만들게 한다. 만인산은 1만 명의 이름을 적어넣은 양산이다. 선정을 베푼 지방관에게 백성이 자발적으로 만들어주는 일종의 기념품이다. 한 주사는 싫다는 백성을 협박해 만든 만인산을 이 판서에게 보여준다. 이 판서는 유능한 인재를 알아본 자신의 안목을 자화자찬하며 한 주사의 유임을 위해 전력을 다한다. 이해조의 소설 <만인산>(1909)의 전반부 줄거리다.
-
역사와 현실 ‘국뽕’의 시대 “김치의 원조는 파오차이, 한복의 기원은 중국 전통 의상.” 반중정서에 기름을 부은 발언이다. 그런다고 세계인이 김치와 한복을 중국 것으로 착각하지는 않을 거라고 본다. 중국이 주장하는 ‘만물 중국 기원설’은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다만 남을 탓하려면 먼저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는 것이 순서다. 역사를 왜곡하는 그들 앞에 우리는 과연 얼마나 떳떳한가? 역사왜곡은 제국의 식민지배 정당화를 위한 수단이다. 하지만 식민지 지식인의 저항 수단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는 우리 손으로 우리 역사를 왜곡했다. <환단고기> <규원사화> 따위의 위서가 이때 나왔다. 고대 한민족이 대륙의 지배자였다는 내용이다. 명백한 역사왜곡이지만 일제강점기라는 상황을 고려하면 참작의 여지가 있다. 민족 자존심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