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최신기사
-
역사와 현실 언론과 미디어 언론기관의 역사를 말한다면 서양보다 한국이나 중국이 훨씬 앞선다. 서양에서는 17, 18세기 신흥 시민계급과 함께 언론기관이 등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반면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도 이미 고려 시대에 정부 조직 안에 언론기관이 존재했다. 특히 조선왕조는 고려 시대보다 더욱 체계적으로 언론 기능을 발전시켰다. 국가를 정상적으로 운영하려면 민간에서든 정부 안에서든 권력과 국정을 감시하는 언론이 필요했다. 오늘날 언론사 기자의 일을 맡은 조선 시대 정부 기관으로 사헌부와 사간원, 춘추관과 예문관을 들 수 있다. 사헌부와 사간원 관원을 언관(言官)이라 했는데, 국왕과 관리들을 말로 비판하는 일을 했다. 예문관과 춘추관은 임금과 관리들의 말과 행동을 기록했고, 그 기록을 모아 정리했다. 그 결과물이 <조선왕조실록>이다.
-
역사와 현실 1565년 유생 상소와 야당 공천투표 1565년 4월, 20년간 최고권력을 행사했던 문정왕후가 사망했다. 그 직후 시작되어 그해 10월까지 이어진 지방 유생들의 전국적 상소는 조선의 정치 및 언론 지형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그 양상은 작금의 한국 정치 및 언론 상황에 기시감을 준다. 조선은 고려 말 토지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건국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의 정치는 처음부터 공적 이념성을 강하게 띠었다. 이것은 현실 권력 못지않게 ‘공론(公論)’을 중시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조정에서 공론을 담당하는 사헌부와 사간원 관원을 통칭하는 언관(言官)이 존중되었다. 그런데 언관이 처음부터 실제로 강력한 발언권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이것은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로 시작했어도 처음부터 민주주의가 실제로 구현되지는 않았던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조선의 공론 중시 지향은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성종대(1457~1494)에 언관이 공론을 담당하는 주체로 확립되었고 조정에서 강력한 발언권을 행사했다. 조선이 건국되고 대략 세 번째 세대가 등장할 무렵이다.
-
역사와 현실 이원익 ‘메타인지’ 경기 광명시 광명역 옆 소하동에 오리 이원익 기념관이 있다. 이원익(1547~1634)의 집이었고, 그가 생을 마감한 곳이다. 오리(梧里)는 이원익의 호인데, 마을 이름이다. 오동나무가 많은 마을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조선시대 선조, 광해군, 인조 대에 정승을 지낸 인물이다. 이원익은 선조 2년(1569) 문과 합격 후 관직 생활을 시작해서 재상급에 있었던 기간만 40년에 가까웠다. 이원익이 재상이 된 선조 중반 무렵은 우리가 이름을 아는 천재급 인물들이 군집해 있던 시기이다. 이이, 류성룡, 정철, 이산해, 이항복, 이순신 같은 사람들이다. 이 시기에 탁월한 인물들이 많아서 이미 조선시대에 ‘목릉성세’라는 말이 있었다.
-
역사와 현실 회색 코뿔소 큰 위험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지만 오랫동안 방치하여 위험에 대응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회색 코뿔소’라고 한다. 2013년 미셸 부커가 다보스포럼에서 처음 말한 개념이다. 한국에도 몇 마리의 회색 코뿔소가 배회한다. 그중 하나가 사회의 양극화이다. 회색 코뿔소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존재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그 나라 지배층 구성의 핵심적 원리에 내재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이래 우리나라는 지역적 양극화 경향을 내포하는 중앙집권제를 유지해왔다. 양극화를 초래하는 직접적 요인은 과거와 다르나, 그 결과는 비슷한 데가 많다.
-
역사와 현실 하청과 방납 한 유튜브 방송에서 여러 해 전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산업재해로 사망한 김용균씨와 ‘구의역 김군’에 대한 영상을 보게 되었다. 구의역은 서울 광진구에 있는 지하철 2호선 역이다. 구의역 김군 사망 사건이 2016년 5월28일에 일어났고, 김용균씨 사망 사건이 2018년 12월11일에 일어났으니 벌써 7년과 5년 전 일이다. 내 일상 밖 일이기에 그동안 잊고 지냈던 것 같다. 하지만 유튜브로 환기된 기억에 무심하기는 어려웠다. 생각하면 기가 막힌 일이다. 불과 19세, 24세 나이에 하청업체 노동자로 위험한 일을 혼자 하다가 목숨을 잃은 사고라니. 더구나 그것이 완전히 합법적으로 진행된 일이었다는 것이, 내가 속한 공동체의 현실이 어떤 것인지 다시금 일깨워준다.
-
역사와 현실 늙어가는 대한민국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 연령은 44세이고, 대한민국 사람들을 나이 순서로 세워 정중앙에 있는 사람의 연령을 의미하는 중위 연령은 이보다 한 살 많은 45세이다. 그런데 2002년 한국인의 중위 연령은 31.8세였다. 20년 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의 중위 연령이 13년 정도 높아진 것이다. 아마도 출산율은 낮아지고 평균수명은 증가했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 전체 수준에서 나타난 변화라는 면에서 대단히 급격하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대체로 주변의 환경변화를 수용하는 정도가 떨어진다. 사람들은 10대, 20대에 얻은 경험, 가치관, 문화 속에서 이후 생애를 살아간다. 30세 이후에 생활방식이나 가치관을 새롭게 정립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일본이 한국보다 사회의 디지털화 수용 정도가 전반적으로 늦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그 이유를 일본이 한국보다 사회 고령화 상황을 일찍 맞은 것에서 찾는 견해가 있다. 일리가 있다.
-
역사와 현실 이념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조선왕조는 태조 이성계부터 마지막 순종까지 27대 518년 동안 이어졌다. 세계적으로 봐도 드물게 오래 지속된 왕조이다. 하지만 그 국왕 권력이 순조롭게만 이어지지는 않았다. 두 번의 반정(反正)이 있었다.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1506)과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1623)이 그것이다. 중종은 연산군의 이복동생이었고, 인조는 광해군의 조카였다. 조선 왕실의 연속성은 이어졌지만, 지금 관점에서 보면 두 반정이 정치 쿠데타인 것은 분명하다. 16세기 초반에 일어난 중종반정과 임진왜란 뒤 17세기 전반에 일어난 인조반정은 반정이라는 이름은 같아도 그 성격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는 100여년 동안 진행된 조선왕조 내부의 정치적, 사상적, 사회적 변화를 반영하기에 자연스러운 일이다. 중종반정은 그 앞뒤로 나타난 양상이 매우 이념적이었던 반면에, 인조반정은 그렇지 않았다. 정치세력 간 갈등은 있었지만 그것이 이념적 차원으로 심하게 돌출되지는 않았다.
-
역사와 현실 번아웃과 수신 취업 포털 잡코리아에 따르면 2016년에 직장인의 79.4%가 번아웃 증후군을 겪은 경험이 있다(경향신문 2016년 4월14일 보도). 취업 포털 사람인도 같은 해 조사 결과 직장인의 88.6%가 번아웃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2019년에 이루어진 잡코리아의 조사에서는 그 비율이 95.1%까지 높아졌다. 우리나라 직장인 대부분이 번아웃을 경험했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이 개인적으로 경험한 일은 개인적이지 않다. 그것은 사회적 현상이고, 따라서 상응하는 사회적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사회적 원인은 길든 짧든 역사적 원인을 갖는다.
-
역사와 현실 왕의 DNA와 세조의 훈계 얼마 전 교육부 5급 사무관이 자신의 초등학교 아이의 교사에게 보낸 편지가 논란이 되었다. 편지에서 그는 자기 아이가 ‘왕의 DNA’를 가졌다며 9개 요구사항을 나열했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조선시대 세조 역시 어린 세자에게 10개 항목의 가르침을 남겼다. ‘<훈사> 10장’이 그것이다. ‘훈사’란 훈계의 말이다. 세조 사후에 즉위한 예종이 그 세자이고 당시 8세였다. 말 그대로 ‘왕의 DNA’를 가진 아이였다. <세조실록>에 훈사의 내용이 요약돼 나온다. 서문에 이어서 각 장마다 제목을 붙여 그에 대한 해설이 뒤따른다. 서문은 이렇다. “부모가 너를 위해 교육시킬 것을 생각한 것이 한 가지가 아니다. 네가 외로운 몸으로 장차 종묘사직을 맡으면 사람과 하늘이 애처롭고 가엾게 여길 것이다. 나의 뜻을 본받도록 해라. 나는 어려움을 당했지만 너는 태평한 때를 만나야 한다. 일이란 세상에 따라 변한다. 만일 네가 나의 선례에 구애된다면 네모난 나무를 둥근 구멍에 집어넣으려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훈사를 간략하게 지었으니 너는 평생토록 절대 잊지 말아라.” 세조가 부인 정희 왕후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린 아들에게 당부하는 말을 남기게 된 사연을 말하고 있다. 세조는 즉위하는 과정에서 잔인하고 무리한 일을 자행했지만, 어린 아들은 좋은 임금이 되어 순탄하게 왕노릇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각 장의 제목과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역사와 현실 여행 휴가철이다. 코로나19 때문에 여행하기 힘들었던 지난 수년간에 비해서 올해는 많은 사람들이 국내외 여행을 하고 있다. 우리 삶과 일상을 구성하는 많은 요소들은 대부분 한 개인의 생애보다 훨씬 더 긴 역사를 갖는다. 그것들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고, 우리가 사망한 후에도 계속된다. ‘여행’도 그중 하나이다. 우리는 전통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여행과 무관한 삶을 살았으리라 지레짐작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들 역시 처한 형편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여행했다. 조선시대에 쓰였고 지금까지 전해지는 많은 여행일기가 그 증거이다. 대부분 한자로 기록된 것에서 알 수 있듯 여행기 필자 대다수는 양반이다. 하지만 양반이라 해도 대개는 자기 동네에서나 알아주는 한가한 시골양반들이 대부분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바쁘면 여행하기 어렵다.
-
역사와 현실 세종이 문필가를 키운 까닭은 서울에서도 고가 아파트들이 몰려 있는 서울 ‘압구정’동은 본래 조선 시대 유명한 인물인 한명회가 지은 정자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이 정자 이름을 지은 이는 한명회 자신도 아니고 당대 조선 사람도 아닌 명나라의 예겸(倪謙)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명나라에서도 문필로 이름 높았던 인물이다. 세종이 사망한 해인 1450년에 명나라 한림원 시강 벼슬에 있던 예겸이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 처음에 예겸은 자신의 시 짓는 솜씨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조선에 와서 처음 지은 시를 본 후 조선 관리들은 한편으로 안도했고, 다른 한편으로 무시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 같다. 그것은 오판이었다.
-
역사와 현실 정암 조광조 행장 좌절된 이상을 되돌아보는 일은 늘 비감하다. 64세의 퇴계 이황이 38세에 죽은 정암 조광조를 위해 쓴 행장도 그렇다. 행장은 망자의 생애를 정리하고 평가한 조선시대 글쓰기 형식이다. 이황은 많은 고관과 지인들에게 비석과 행장 글을 요구받았지만 대부분 거절했다. 평생 7개의 행장만을 썼는데, 그중 개인적 인연 없이 쓴 행장은 2개뿐이다. 그 하나가 조광조의 행장인데, 그가 젊은 이황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보여준다. 조광조는 이황보다 18세 연상이고, 사화로 조광조가 죽은 해에 이황은 19세였다. “선생(조광조)이 활동했던 시기에는 선한 무리로 함께 선발되어 임금의 우대를 받은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이 서로 협력해서 사업을 일으키니, 사람들은 바람에 움직이듯 휩쓸렸다. 그런데 너무 조급히 효과를 보려 했고, 하는 일에 날카로움이 너무 드러났는가 하면 장황하고 과격했다. 또한 젊고 일 만들기 좋아해서, 유리한 기회를 노려 시세에 영합하는 분란을 부추긴 자들이 그 사이에 많이 있었고, 높은 자리의 나이 많은 신하들은 이로 인해 공격을 받자 원한이 골수에 사무쳤다. 선생이 일찍부터 이미 그렇게 될 조짐을 보고 일이 성공하기 어려울 것을 알아서 오래전부터 물러나려 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는 사화를 촉발시킬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일을 신중히 했어야 했다. 그런데도 저 과격하고 경솔한 무리는 도리어 선생이 원칙을 벗어나 임시방편으로 일을 처리해 그 행동이 간사한 무리와 같다며 여러 번 배척하고 탄핵했다. 전날 원망하던 모든 사람들이 곁에서 이를 갈고 입술을 깨물며 날마다 틈을 노리는 것을 알지 못하여, 큰 화가 갑자기 사화로 나타났으니 슬프다, 어찌 이루 다 말하겠는가, 어찌 이루 다 말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