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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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조선왕조의 수정실록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의 첫 임금 태조 이성계부터 철종까지 25명 임금의 재위 472년의 역사를 시간에 따라 정리한 방대한 규모의 기록이다. 조선왕조 조정은 동일한 목표와 일관된 편찬방식으로 500년 가까운 시간 동안의 사실을 담아냈다. 대한민국이 1948년에 건국하여 올해까지 불과 80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성과이다. 국보로 지정되고,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이유일 것이다. ‘실록(實錄)’이라는 말은 본래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이다. 진실한 기록, 믿을 수 있는 기록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한 왕의 재위 기간에 대한 기록에 ‘실록’이라는 명칭이 붙으려면 조건이 필요했다. 주요한 기록 대상인 임금이 정상적으로 국정 운영을 마쳐야 한다는 것이다. 대개 왕의 죽음으로 임기가 다 했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다. 태종은 살아 있으면서 세종에게 임금 자리를 넘겨주었다. 조선시대에는 두 번의 반정(反正)이 있었는데, 반정으로 권력을 잃은 임금의 재위 기간에 대한 기록은 실록이 아닌 ‘일기(日記)’가 되었다. <연산군일기>와 <광해군일기>이다. 두 일기는 다른 실록과 조금도 다르지 않지만, 정당하지 못한 권력에 실록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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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중종반정과 인조반정 우리가 알고 있는 동서양 국가들 역사의 대부분은 왕정(王政)의 역사다. 현재 세계 대다수 나라가 민주주의를 정체(政體)로 표방하지만, 개인들 내면에는 적어도 2000년 이상 이어진 왕정시대에 침전된 습관이나 감정이 여전히 존재한다. 민주주의는 길게 보아도 100년 혹은 200년 정도 지속된 그리 오래되지 않은 정치체제다. 여전히 실험하고 수정하여 개선해야 할 것이 많은 제도다. 2024년 12월3일 대통령의 일방적인 계엄 선포와 즉시 뒤따른 국회에 의한 신속한 해제 이래 지속되고 있는 정치적 긴장 상황도 그런 내용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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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1563년 사화 미수 사건 1563년 8월17일에서 8월20일 사이에 조선 역사의 한 자락을 바꿨을지 모르는 사건이 조정에서 일어났다. 왕의 신임을 등에 업은 이조 판서 이량이 촉망받는 젊은 관료 6명을 유배 보내려다 되레 자신이 유배를 간 사건이다. 그는 이들을 귀양 보낸 후 사림의 광범한 지지를 받는 주요 인물 40여명도 제거하려는 ‘살생부’를 작성했다. 여기에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이 첫머리에 적혀 있었다. 당시는 무오사화(1498년)로 시작된 사화가 이어지던 시기였다. 양심적 관리와 선비들이 죽임을 당했고 귀양을 갔다. 1545년 12세의 명종이 즉위한 후에도 사화는 이어졌고 모친 문정왕후가 권력을 전횡했다. 시간이 흘렀고 명종도 성인이 되자 자기 힘을 갖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등용한 사람이 이량이라는 인물이다. 구악이 신악으로 바뀌었을 뿐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량에 대해 사림의 반발과 저항이 거셌다. 이량도 그것을 잘 알아서 이들을 제압해야겠다 작정하고 일으킨 것이 1563년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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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시국선언과 만인소 지난 10월 말 인천대 김철홍 교수가 ‘퇴직 교원 정부 포상 미신청자 확인서’를 냈다는 뉴스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정년 퇴임을 앞두고 정부가 주는 근정훈장을 받지 않겠다는 취지였다. “무릇 훈장이나 포상을 함에는 받는 사람도 자격이 있어야 하지만, 그 상을 수여하는 사람도 충분한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이즈음 가천대를 시작으로 대학의 교수와 연구자들의 시국선언이 이어졌다. 지역 단위의 선언도 이어졌다. 제주 지역 대학교수 70여명, 전북권 교수·연구자 125명, 그리고 29개 대학·2개 연구소·독립연구자 등 652명을 아우르는 부산·울산·경남 지역 교수·연구자들도 시국선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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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영조의 개혁 새 차도 몇 년 타면 고칠 곳이 생긴다. 관리를 잘하면 그 시기를 좀 늦출 수 있지만, 결국 수리할 곳이 늘어난다. 사회를 구성하는 제도들도 다르지 않다. 어떤 제도나 특정한 시점의 사회적 필요와 조건에 의해 만들어진다. 세월이 흘러 필요와 조건이 달라지면 그 제도는 처음처럼 효율적이지 않게 되고 생각지도 못한 문제들을 일으킨다. 자동차처럼 제도도 고쳐가며 쓰든지 폐기해야 한다. 영조는 세금 개혁인 균역법을 실시했지만 그것만 했던 것은 아니다. 재위 17년째인 1741년에 관료제도 개혁 ‘이조낭선이혁절목(吏曹郞選釐革節目)’을 반포했다. 절목(節目)이란 법률, 혹은 규정이다. 이조(吏曹)는 이조, 병조, 형조 등 6조의 이조를 말한다. 낭선(郞選)은 ‘낭관(郎官)의 선발’을 말하고 이혁(釐革)은 개혁한다는 뜻이다. 법령의 명칭을 풀이하면, ‘이조 낭관의 선발 제도를 개혁하는 법령’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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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눈치라도 봐야 한다 최근 국회가 대한축구협회 관계자들을 불러 진행한 현안질의 내용이 알려지자 공분이 일고 있다. 평소 스포츠에 큰 관심은 없었기에 질의와 응답 관련 유튜브를 보고서야,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의와 응답 내용은 비단 축구협회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폐쇄적 엘리트 조직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했다. 축구협회 회장과 국가대표팀 감독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이 근래 고조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번에 특히 문제가 된 것은 국가대표팀 감독의 선출 과정이다. 한마디로 대표팀 감독 선출 과정이 오늘날 한국인들의 상식과 거리가 있었다. 신임 감독 선출 과정을 이끌던 전력강화위원장이 협회장과의 면담 후 개인 사정을 들어 사퇴한 뒤, 축구협회 정관이나 권한 위임 절차 없이 협회 소속 다른 사람이 신임 감독 선임을 주관했다. 규정된 절차에 따른 외국인 감독 지원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규정된 절차를 밟지 않은, 내야 할 서류나 자료도 제출하지 않은 사람이 대표팀 감독에 선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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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선조의 ‘왜란 공신 선정’ 유감 “피로 쓰인 역사를 혀로 덮을 수 없다.” 지난 8월15일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정부 행사와 별도로 79주년 광복절 기념식이 열렸다. 여기서 이종찬 광복회장이 했던 말이다. 기념사에서 그는 최근 진실에 대한 왜곡에 대해 광복회가 이 역사적 퇴행과 훼손을 보고 있을 수 없다며, 한 나라의 역사의식과 정체성이 흔들리면 국가의 기조가 흔들린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피로 쓰인 역사를 혀로 논하는 역사로 덮을 수는 없”고 “자주독립을 위한 선열들의 투쟁과 헌신 그리고 그 자랑스러운 성과를 폄훼하는 일은 국민들이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며 “준엄하게 경고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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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뒷것 김민기 2024년 7월21일 김민기가 사망했다. 향년 73세다. 네이버 인물 소개에 따르면 1951년 3월에 전북 익산에서 태어났고, 공연연출가이자 전 가수이다. 조선시대식이라면 ‘뒷것’은 호처럼 들리지만, 그렇진 않다. 하지만 오늘날 감각이라면 스스로 붙인 ‘자호(自號)’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는 무대에서 관객의 주목을 받으며 연기하고 노래하는 사람을 ‘앞것’, 그들을 키우고 무대 뒤에서 보조하는 사람을 ‘뒷것’이라 했다. 그는 뒷것들의 두목을 자임했다. 김민기가 위중하다고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23년 말부터였다. 그가 과거 드물게 했던 인터뷰가 조금씩 들려왔다. 아무도 그의 죽음을 드러내 말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리라. 그의 사망 이후 유튜브에 그의 과거 인터뷰, 지인들의 회고를 담은 클립이 많이 올라온다. 인쇄매체보다 영상매체가 사람들과 더 많은 접점을 지니고 또, 신속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활자와 책으로 그가 평가되리라는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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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조선은 망할 수밖에 없던 나라? 얼마 전 유시민 작가와 조수진 변호사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알릴레오 북스’를 보았다. 흥미로운 책을 한 권 선정해 그 내용을 소개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채널이다. 이번에는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장의 최근작 <박태균의 이슈 한국사>를 소개했다. 책은 모두 10개 주제로 이루어졌는데 나는 4장 ‘식민지 근대화론: 우리 안의 역사 논쟁’이 흥미로웠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를 겪은 기간에 근대화되고 발전했다는 것이다. 이를 좀 연장하면 오늘날 한국은 식민지 경험 덕에 발전했고, 이 때문에 일본은 침략자지만 동시에 한국 근대화에 기여하기도 했단 결론에 이른다. 저자 박태균 교수는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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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AI, 인문학, 역사학 인공지능(AI)이 촉발한 변화가 여러 방면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AI가 그려주는 그림 때문에 웹툰 그리던 일을 하던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는 말이 들리고, 여러 나라말을 유창하게 통역하는 기능 때문에 일부 대학에서 관련 학과를 폐지했다는 뉴스도 전해진다. 챗GPT가 등장한 지 불과 1년 반이 지났을 뿐이다. 최근에 나온 더 높은 버전의 챗GPT는 미국 변호사 시험(Uniform Bar Exam)을 상위 10%로 통과했고, SAT 수학시험에서 800점 만점에 700점을 얻었단다. 인간의 총체적 지능에 도달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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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10만 양병설’ 한국사를 공부했다는 이유로 가끔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이이 주장대로 조선이 미리 병력을 길렀다면 임진왜란 같은 국가적 재앙을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듯하다. 임진왜란이 조선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고, 한국과 일본 관계가 대체로 우호적이지만은 않은 것이 사람들의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가 간 전쟁이 일어난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벌어진 전쟁도 2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주요 국가 간의 경쟁은 직접적 무력 충돌보다 기술 패권을 둘러싸고 더 치열하다. 기술 패권을 둘러싼 경쟁이야말로 사실상 오늘날 전쟁의 주요 양상이라 할 수 있다. 국가 간 전쟁이 과거에 그랬듯이, 이제는 한 국가의 기술 역량이 그 국가의 세계적 지위를 크고 빠르게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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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언론과 미디어 언론기관의 역사를 말한다면 서양보다 한국이나 중국이 훨씬 앞선다. 서양에서는 17, 18세기 신흥 시민계급과 함께 언론기관이 등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반면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도 이미 고려 시대에 정부 조직 안에 언론기관이 존재했다. 특히 조선왕조는 고려 시대보다 더욱 체계적으로 언론 기능을 발전시켰다. 국가를 정상적으로 운영하려면 민간에서든 정부 안에서든 권력과 국정을 감시하는 언론이 필요했다. 오늘날 언론사 기자의 일을 맡은 조선 시대 정부 기관으로 사헌부와 사간원, 춘추관과 예문관을 들 수 있다. 사헌부와 사간원 관원을 언관(言官)이라 했는데, 국왕과 관리들을 말로 비판하는 일을 했다. 예문관과 춘추관은 임금과 관리들의 말과 행동을 기록했고, 그 기록을 모아 정리했다. 그 결과물이 <조선왕조실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