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익 ‘메타인지’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경기 광명시 광명역 옆 소하동에 오리 이원익 기념관이 있다. 이원익(1547~1634)의 집이었고, 그가 생을 마감한 곳이다. 오리(梧里)는 이원익의 호인데, 마을 이름이다. 오동나무가 많은 마을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조선시대 선조, 광해군, 인조 대에 정승을 지낸 인물이다.

이원익은 선조 2년(1569) 문과 합격 후 관직 생활을 시작해서 재상급에 있었던 기간만 40년에 가까웠다. 이원익이 재상이 된 선조 중반 무렵은 우리가 이름을 아는 천재급 인물들이 군집해 있던 시기이다. 이이, 류성룡, 정철, 이산해, 이항복, 이순신 같은 사람들이다. 이 시기에 탁월한 인물들이 많아서 이미 조선시대에 ‘목릉성세’라는 말이 있었다.

이원익은 영의정을 세 번이나 역임했다. 선조 때인 임진왜란 중에 처음 영의정이 되었고, 광해군의 첫 번째 영의정이었고, 인조의 첫 번째 영의정이었다. 광해군의 첫 번째 영의정이었는데, 광해군을 축출하고 집권한 인조의 첫 번째 영의정이 되었다는 것은 흥미롭다. 그가 처세에 유달리 뛰어났기 때문은 아니다. 그는 당대의 탁월한 인물들에게 널리 인정받았다. 이원익의 무엇이 그런 평가를 가능하게 했을까?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광해군 대의 정치적 파행에 책임을 물어 정인홍이 처형되었다. 반정 다음달인 4월 초에 89세 나이로 참형(斬刑)에 처해졌다. 정인홍은 광해군 대에 있었던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죽음, 그리고 인목대비의 경운궁 유폐에 모두 관련되었다. 광해군 재위 기간에 그와 이원익의 관계도 좋지 않았다. 위 세 사람의 처벌 문제를 두고, 두 사람은 대립했다. 이원익은 너그럽게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정인홍은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인목대비 문제로 이원익이 강원도 홍천에 귀양 가 있을 때, 정인홍은 그 처벌이 너무 가벼우니 벌을 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라는 책에 나오는 이원익의 정인홍에 대한 언급은 이원익이 가졌던 인간 이해의 한 자락을 보여준다. 정인홍이 죽은 후 이원익은 가까운 후배 재상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도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서 소인(小人)으로 변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소인’이란 말은 세상 물정에 대한 이해력이 떨어지고 바른 도리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뜻했다. 그러자 그 재상은 “제가 비록 옛 성현들만은 못해도 어찌 소인까지야 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원익은 “정인홍은 젊어서부터 원칙을 지키는 사람으로 유명했소. 그 사람이 폐모론에 관여하리라 누가 예상했겠소?”라고 반문했다. ‘폐모론’은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조선시대에 어떤 이유로도 허용될 수 없는 주장이었다. 이원익이 이어서 말했다. “나이 늙고 뜻이 쇠해지고 친구들이 밖에서 권하고 자손이 안에서 충동질하여, 마침내 폐모를 청하는 상소를 올려서 90세 나이에 처형되었소. 나는 그 일 이후 나 자신을 더욱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지냅니다.”

역사의 시공간에서 주어는 자주 바뀌어도 술어는 별로 바뀌지 않는다. ‘폐모론’이 역사의 시공간에서 주어라면, “나이 늙고 뜻이 쇠해지고 친구들이 밖에서 권하고 자손이 안에서 충동질”하는 것은 술어에 해당한다. 주어는 그때그때 바뀌는 문제와 쟁점이고, 술어는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처리 방식이다. 지금은 왕조시대가 아니니 ‘폐모론’ 같은 것이 문제 될 수 없다. 하지만 지금도 “나이 늙고 뜻이 쇠해지고 친구들이 밖에서 권하고 자손이 안에서 충동질”하는 상황은 나타날 수 있다.

이원익은 사람은 누구나 잘못된 방향으로 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그가 남에게 너그러우면서도 스스로에 대해서는 엄격히 절제할 수 있게 해주었을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그는 인간에 대한 메타인지가 뛰어났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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