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한
미술평론가·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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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예술산책-깊이 보다 윤범모 관장의 1년, 초라한 성과 지난해 이맘때, 미술계는 꽤나 소란스러웠다. 국립현대미술관장 공모에서 역량 평가 낙제점을 받아 탈락한 후보가 재시험 기회를 얻어 최종 선발되면서 ‘코드 인사’ 논란이 거셌다. 당시 관장 후보는 민중미술계열의 근대미술사학자인 윤범모씨였고, 인사권자인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 고위직을 역임한 도종환씨였다. 내 편 네 편 진영에 따라 달리하는 양심을 지닌 일부 기회주의자들을 제외하곤 미술계 구성원 대부분은 불공정한 관장 공모 심사 과정에 분노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던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를 액면 그대로 믿었기에 배신감도 작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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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예술산책-깊이 보다 전업비평가로 산다는 것 20대 후반부터 이어온 미술전문지 편집장 생활을 접은 이후 올해처럼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한 해를 보낸 적이 없다. 잠시였으나 비엔날레 총감독을 맡았던 작년까지만 해도 조직의 일부였다. 이 때문에 2019년은 온전히 ‘전업비평가’로 산 첫 해라고 할 수 있다. 불완전한 익명성의 층위를 가시화하고, 예술과 사회에 새로운 모더니티를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면 그 직업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것이 조화를 이뤄 생활고까지 해결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직업은 없다. 난 전업비평가야말로 부합하는 직업이라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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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예술산책-깊이 보다 헐거우나 볼만한 국립현대미술관 ‘광장’전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50주년 기념전 ‘광장:미술과 사회 1900-2019’가 서울관, 덕수궁관, 과천관에서 동시에 개최되고 있다. 19세기 말부터 동시대까지 격동의 근·현대사 100년을 미술의 언어로 풀어낸 300여 작가의 작품 450여점을 만날 수 있다. 이 전시는 근·현대사를 골격으로 예술가와 작품이 사회와 어떤 관계를 그려왔고,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또한 불확실한 미래를 재생적, 창조적으로 상상하고자 하는 기획 의도 아래 광장을 둘러싼 다양한 이슈들을 우린 어떻게 해석하고 반응해야 하는지에 초점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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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예술산책-깊이 보다 비엔날레의 ‘규모강박증’과 연고주의 우연히 일본의 트리엔날레 ‘오카야마 아트 서밋’(Okayama Art Summit, 9·27~11·24)에 대한 보도를 접했다. 기자의 관점이 그러했듯 나 또한 국내 사례를 대입하면 너무도 확연해지는 여러 문제점을 이 기사로 인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었다. 우선 올해로 2회를 맞이한 이 전시는 국제행사치곤 참여 작가의 수가 17명에 불과해 양으로 승부하는 한국의 비엔날레에 비해 상당히 적었다. 2018년 광주비엔날레 참여 작가는 160여명이었고, 같은 해 열린 부산비엔날레는 줄이고 줄였음에도 66명에 달했다. 심지어 얼마 전 막을 내린 청주공예비엔날레는 작가 수가 무려 1200명을 웃돌아 기사에서 표현된 ‘규모강박증’을 여실히 증명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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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예술산책-깊이 보다 장애·비장애 경계 허문 예술가들 내가 사는 마을은 공기 맑고 조용한 데다 교통이 편리하여 쉼과 치료를 목적으로 한 이들이 많이 찾는다. 요양원을 비롯한 요양병원, 노인복지시설이 여럿 터를 잡고 있고, 장애인복지관 및 발달장애인 직업재활기관 역시 다수 둥지를 틀고 있다. 좁은 동네 특성상 난 그곳에 거주하는 장애인들과 마주치는 일이 잦다. 하지만 조금의 불편함도 느낀 적이 없다. 간혹 방죽을 걷다 어정쩡한 인사를 나눈 경우는 있어도 대개는 숱하게 스치는 타인과 나처럼 각자의 삶을 이어가는 존재이거나 이웃으로 여길 뿐이다. 그러나 같은 지역에 살더라도 생각마저 같은 건 아닌 듯싶다. 방어적인 태도를 넘어 그들이 마을 분위기를 망친다며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을 왕왕 보기 때문이다. 최근엔 시의 지원을 받아 장애인 특수학교가 세워진다는 소문에 설립 반대 시위까지 벌일 태세이다. 집값이 떨어지고 유배지처럼 인식된다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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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예술산책-깊이 보다 청주공예비엔날레의 실패한 ‘몽유도원’ 서양의 미술이 보는 즉시 읽혀지는 것이라면 우리의 옛 그림은 해석에 방점을 두었다. 자연을 그려도 ‘그것’을 모사(模寫)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연관된 ‘마음’을 담았다. 유럽의 미술이 종교와 신화에 치중했다면 우리 미술은 자연주의 사상 아래 인간 내면의 본질을 강조했다. 이처럼 대상의 외형에 치중했던 서양과는 달리 우리의 옛 그림은 뜻과 정신을 옮기는 사의(寫意)를 중시했다.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역시 상징적 서술에 무게를 둔 작품이다. 실제로 본 것은 아니나 인간의 욕망과 바람을 의미적으로 표현한 이 그림은 안평대군이 1447년 4월20일 밤 꿈에 본 풍경을 들은 안견이 3일 만에 그렸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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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예술산책-깊이 보다 욕먹어도 싼 ‘지역 상징 조형물’ 청계천 복원 1주년 기념 조형물 ‘스프링(Spring)’은 높이 20m에 달하는 거대한 위용에 약 35억원이라는 몸값을 자랑한다. 하지만 서울시 최악의 환경조형물이라는 오명도 안고 있다. 세계적인 작가인 클래스 올덴버그가 만들었음에도 도시 정체성과 청계천이라는 장소성 및 역사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약 4억원의 예산을 투입한 강남구 싸이 ‘말춤’ 조각도 곧잘 도시 흉물 상위에 오른다. 싹둑 잘린 손목 형상의 이 황금색 ‘엽기조각’은 강남구의 기대와는 달리 랜드마크로서의 역할은커녕 심미성조차 심어주지 못한다. 정책 관계자들의 단순한 발상과 미숙한 창의성이 낳은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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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예술산책-깊이 보다 썩은 사회에 대한 냉소 다소 당황스럽고 예측하기 어려운 행동으로 화제를 몰고 다녀 미술계의 악동이라 불리는 이탈리아 작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예술성과 아무 상관 없는 석·박사 종이쪼가리는커녕 제대로 된 정규교육조차 받은 적이 없다. 가구디자이너, 간호사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자신에게 ‘좀 더 나은 대우’를 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예술계로 입문했다. 애초 거룩한 미술사적 계보를 잇겠다는 생각 따윈 내다 버린 카텔란은 1980년대 데뷔 당시부터 정치, 사회, 종교, 미술계를 조롱했다. 운석에 짓눌린 교황을 묘사한 90년대 작품 ‘아홉 번째 계시’를 통해 종교의 역할에 대해 되물었고, 고상한 샹들리에가 달린 공간에 살아 있는 당나귀를 넣는 작업으로 미술계의 폐쇄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샹들리에 공간은 허례허식과 쓸데없는 권위를 내세우는 미술관 및 갤러리이고 오도 가도 못한 채 울부짖는 당나귀는 작가 자신을 포함한 작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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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예술산책-깊이 보다 ‘개미’에 담긴 암울한 시대상 연필은 누구에게나 친숙한 필기도구이다. 돌잡이에 놓이는 것들 중 하나도 연필이니, 어쩌면 연필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손에 쥐는 몇 안되는 사물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예술가들에게도 연필은 유용한 창작수단이자 소재이다. 그러다보니 연필을 이용해 독창적인 작품을 남긴 이들도 많다. 다수의 연필화를 후대에 물려준 박수근을 비롯해 이중섭, 천경자, 변시지 등의 작가들이 대표적이다. 이 가운데 이중섭이 그린 ‘소와 새와 게’ ‘세 사람’ 등의 작품은 연필로 그린 소품임에도 유화나 ‘은지화’ 못지않은 예술성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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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예술산책-깊이 보다 베니스비엔날레 단상 여기, 베니스의 기온은 차다. 반팔을 입고 다니기엔 아직 이른 감이 있다. 그러나 베니스비엔날레의 열기는 계절의 스산함을 밀어내기에 충분하다. 세계 각지에서 몰려드는 인파만 놓고 보자면 베니스는 벌써 한여름인 셈이다. 58회를 맞은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의 주제는 ‘흥미로운 시대를 살아가기를’이다. 흥미롭다는 형용사로 인해 왠지 긍정적 의미로 읽히지만, 실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안녕과 평화가 얼마나 위험하고 불안정한 것인지 되묻는다는 게 핵심이다. 살아가기 버거운 세상을 역설적으로 꼬집는 주제 때문인지 79명의 작가들이 내놓은 작품 역시 환경, 난민, 전쟁, 여성, 인종, 소수자 등 당대 인류가 처한 시대 징후에 집중되어 있다. 하나같이 우리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이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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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예술산책-깊이 보다 예술지원에 왜 내 세금을 쓸까? 지난달 4일 발표된 ‘2018 예술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예술인들의 약 70%는 예술 활동을 통해 얻는 수입이 월 100만원도 채 되지 않는다. 수입이 아예 없다는 예술인도 30%에 달한다. 그나마 미술인들의 수입은 월 수십만원에 불과하다. 통계만 보면 예술가들은 예술로 먹고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이 때문에 이런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이들은 미술인을 포함한 예술인들의 처우개선에 목소리를 높인다. 안전판을 만들어줘야 한다거나 강화된 창작지원 및 예술인복지 제도를 통해 보호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국민 입장에선 정부나 지자체가 어째서 예술과 예술가들을 세금으로 지원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에 만족스러워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관련 기사나 글에는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인데 왜 내가 낸 세금으로 지원하느냐”는 불만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일종의 ‘특혜’라는 시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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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한의 예술산책-깊이 보다 병약한 지성의 보루, 노쇠한 비평가들 권력은 동종세력의 비호를 받으며 철저한 공생관계를 통해 끊임없이 생명력을 이어간다. 특히 정치권력은 세간의 시선이나 상식 따윈 아랑곳없이 인맥을 투하하고, 비호세력들은 ‘내 편’이라는 선 긋기를 통해 그릇된 절차상의 하자(瑕疵) 앞에서조차 입을 다문다. 세속의 관점에서 ‘내 편’은 타인에겐 한없이 가혹할지언정 ‘내 편’이기에 용서되는 아이러니한 개념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내 편’과 ‘네 편’을 구분하는 기준인데, 그건 바로 자기 이익과 맞닿는 득실의 무게이다. 공생의 가늠도 여기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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