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빈
(재)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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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한국은 ‘신분제 산업 사회’인가 분명히 산업의 합리성과 효율성의 논리는 아니다. 한국 자본주의 사회를 조직하는 원리는 사람을 여러 등급으로 나눈 뒤 힘들고 위험하고 하기 싫은 일들은 ‘아래’에 있는 이들에게 몰아서 시키면서 박한 처우와 신분의 불안정으로 내모는 전통 사회의 신분제와 심하게 닮아 있다. 200년 전 프랑스의 생-시몽은 이제 전통적 미신과 권력의 논리로 조직되는 옛날의 사회는 사라지고 오로지 과학과 산업의 합리성과 효율성의 논리로 조직되는 ‘산업 사회’가 찾아올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하지만 최근의 사건들은 한국이 과연 이러한 의미에서의 ‘산업 사회’인지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숨져간 비정규직 노동자의 참혹한 죽음을 계기로 ‘위험의 외주화’라는 문제에 대해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위험하고 힘들어서 산업 재해의 위험이 크게 따르는 업무들은 하청업체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떠밀어 놓는 구조가 안착되었다는 지적이다. 혹자는 이에 대해 정규직 노동자들도 산업 재해에 노출되어 있기는 마찬가지라고 주장하면서 한국 사회 전반에 팽배한 안전 불감증이 문제라고 반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문제의 서부발전주식회사가 지난 몇 년간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4명이나 산업 재해로 목숨을 잃는 와중에서 ‘무재해 사업장’으로 표창을 받고 정직원들에게 상여금까지 지급했다는 점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관행이 다른 시설 관리 업계에도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다는 언론 보도는 그릇된 것인가? 그렇다면 물어야 한다. 이러한 관행에 도대체 어떤 ‘산업의 합리성과 효율성’이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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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87년이냐 91년이냐 권경원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1991년, 봄>이 영화관에 걸렸다. 민주주의와 민중해방을 외치며 10명이 넘는 분들이 세상을 떠나고 이른바 유서대필이라는 황당무계한 이유로 강기훈이라는 청년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1991년 5월과 그 후의 이야기들을 담은 영화이다. 당시를 몸소 겪고 기억한 분들은 도저히 이 영화를 보러갈 용기와 엄두가 나지 않으실 수도 있겠다. 나도 힘겹게 망각 속으로 밀어 넣었던 그날들의 기억이 스크린에 펼쳐지는 것이 너무 두려워 한참을 주저한 끝에 가방 속에 소주 두병을 숨겨서 겨우 들어갔으니까. 하지만 걱정하지 말고 가서 보시라. 영화는 우리를 고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때 그 시절을 겪으며 아물지 못한 상처를 마음에 지고 살게 된 이들은 극장을 나올 때 후련하면서도 정제된 마음으로 영혼의 ‘대속’을 경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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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시어스의 파산과 도시의 변화 미국 백화점 체인의 대명사인 시어스가 파산 위기에 처했다. 이미 1990년대부터 값싼 중국제 물건들을 앞세운 월마트 등 할인업체의 도전에 부딪혀왔다. 최근 10년간에는 파상적으로 확장하는 아마존에 거의 속수무책으로 고객을 빼앗기다가 드디어 이런 지경에 처한 것이다. 시어스는 19세기 말 상품의 목록을 우편으로 보내서 우편 주문과 배송으로 물건을 판매하는 업체로 시작하여 ‘19세기의 아마존’이라고 불렸다. 그랬던 시어스가 현실 세계의 백화점 공룡으로 변하여 어찌 보면 자신의 후예라고 할 아마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실로 아이러니라고 할 만하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미 많은 이야기와 분석이 안팎으로 넘쳐나고 있으니 여기에서는 한발 물러나서 좀 동떨어져 보이는 큰 역사적 변화의 그림 속에서 한번 생각해 보자. 21세기의 ‘새로운 도시 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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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출산율과 ‘여성 기본소득’ 대한민국의 출산율이 떨어지고 있다는 염려는 해묵은 이야기이며, 이것이 극복되어야 할 문제라는 것 또한 보수와 진보가 한목소리를 내어온 문제이다. 이러다 ‘배달민족’이 소멸로 치닫는 게 아니냐는 초월적·거시적 관점도 있으며, 경제활동 인구의 감소로 인한 잠재 성장률 하락을 걱정하는 실용적 관점도 있지만 결론은 항상 무조건 출산율 제고의 방도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각종 정책과 제도를 마련해야 하며 여기에 예산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데에도 합의가 이루어져 있는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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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붉은 깃발법’의 진정한 교훈 문재인 대통령이 ‘붉은 깃발법’을 언급하였다. 1865년 영국에서 통과된 법으로서, 자동차는 도심에서 시속 3㎞ 이상으로 속도를 낼 수 없으며 그 전방 50m 앞에 붉은 깃발을 든 사람 셋이 걸어가면서 자동차가 온다는 것을 알리도록 해야 한다는 법이다. 문 대통령은 이 예를 들어 우리도 인터넷은행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은산분리라는 ‘낡은 규제’를 바꿀 때가 되었다고 역설하였다. 현대인이라면 누가 보아도 우스꽝스러운 법이다. 하지만 1865년의 도로는 오늘의 도로가 아니었고, 그 ‘자동차’ 또한 오늘의 자동차가 아니었다. 당시의 도로는 포장이라고 해봐야 돌을 깔거나 박아 넣은 정도로 지나가는 말들의 발굽과 마차 바퀴에도 쉬이 망가지는 취약한 도로였다. 그리고 자동차 또한 증기 기관차였기에 크기와 중량도 엄청나서 (폭이 2.7m에 무게가 14t) 길을 막기 일쑤였던 데다, 조금만 속도를 올리면 무시무시한 소음과 증기를 내뿜었다. 그리고 당시 도로의 주된 통행자들은 말과 마차였다. 따라서 이러한 도로에서 그 ‘자동차’가 막 달릴 경우 도로 파손의 위험이 없지 않았고 말들이 놀라 날뛰게 만들어 큰 사고를 낼 위험도 높았다. 즉 당시의 기술 수준과 사회 관행을 생각해 보면 당연히 정당화될 만한 법이다. 이후 기술 진보를 통해 내연 기관이 확산되고 자동차 산업이 성장하게 되자 1890년대에 들어서 없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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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혁신 경제를 위해 공정위가 할 일 한 달도 더 된 일이지만,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혁신성장을 위해 규제개혁을 가속화하겠다”는 일성을 발하였다. 공정거래위원회가 규제개혁 나아가 경제 성장을 주된 임무로 삼는 조직인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제는 공정위 출신 인사 재취업 특혜 관련 의혹으로 전직 공정위원장과 부위원장 3인에게 구속 영장이 신청되었다. 그리고 현직 부위원장도 조만간 소환될 예정이라는 소식이다. 그래서 더욱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공정위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시급히 해야 할 일이 규제 개혁인가 아니면 공정위를 필두로 한 특권 체제 해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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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여당은 뭐하나 경제 정책에 대해 가장 흔한 오해 하나는, 그것이 경제 관료와 경제학자 등 이른바 ‘경제 전문가’의 소관이라는 것이다. 천만의 말씀이다. 예측과 분석을 넘어서서 정책 문제로 가게 되면 모든 경제 문제는 사실상 ‘정치’경제 문제이다. 모든 경제 정책과 제도 변화는 이해관계의 갈등과 의견 대립을 불러오게 돼 있다. 따라서 이 영역을 책임져야 할 중요한 책임자는 사실 정치가이다. 학자도 관료도 아닌, 여러 대립되는 이해와 견해를 조정하고 공동체 전체에 미래 전망을 제시하면서 큰 차원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합의를 이끌어내는 이들이라는 아주 고전적 의미에서의 정치가이며, 그 정치가들의 집결체인 정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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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일자리는 지역에서 지방자치체 선거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적폐청산이나 남북관계나 경제활성화 등은 모두 중요한 의제이지만 지자체 선거의 으뜸가는 의제는 말할 것도 없이 ‘지역의 살림을 어떻게 풍요롭게 할 것인가’이다. 그리고 산업기술이나 사회구조나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 지금, 지자체가 해야 할 역할과 위상에 대해서도 새로운 방향이 제시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자체는 스스로가 일자리를 적극적으로 창출해야 하는 주체라는 정체성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치안과 행정 등의 기본적 기능에 더하여, 지자체가 지역의 풍요로운 살림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개발 및 기업과 투자 유치라고 여겨졌다. 그런데 이러한 전략이 소수의 ‘내부자들’ 이외에 지역 전체의 살림을 과연 풍요하게 하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 첫째, 개발을 통한 ‘인공 환경’의 조성이라는 전략은 지리적 불균형이라는 자본주의 고유의 운동 법칙을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고, 결국 엄청나게 투입된 공공 재정의 손실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둘째, 기업과 투자자는 밑지는 장사를 하는 존재들이 아니라서 어떤 지역으로 들어올 때 그에 상응하는 인센티브를 요구하게 마련이며, 설령 들어온다고 해도 자원과 이익이 외부로 유출될 뿐 지역 내에서 순환하는 게 아니더라는 경험칙이 쌓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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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보수매체의 ‘핀란드 복지’ 오보 핀란드가 지난 2년간 진행해 온 ‘기본소득 실험’을 중지하기로 했다. 이를 놓고 보수 매체들에서는 “공짜 돈을 나누어주는 복지과잉의 처절한 실패”라는 이념 공세를 펼치고 있다. 이는 두 가지 사실에 대한 오해에 근거하고 있다. 첫째, 핀란드 정부가 ‘기본소득 실험’을 중지하기로 한 것은 그것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다. 실험은 아직도 진행 중이므로, 거기에서 나오는 각종 데이터의 본격적인 수합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고 그 최종적인 평가와 판단도 아직 전혀 나온 바가 없다. 이 실험은 본래 끝나기로 한 시점에서 그냥 더 이상 연장되지 않고(이것이 내년 4월 총선을 앞둔 정치적 부담 때문이라는 진단은 있다) 정상적으로 종료되는 것뿐, ‘실패’ 때문에 중지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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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내 새끼’냐 ‘우리 새끼들’이냐 인간 사회의 경제에 있어서는 기계와 도구를 제작하고 조작하는 물질적 기술만큼이나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동원하고 조직하는 사회적 기술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사회적 기술에 반드시 포함되어 있는 것은, 불평등할 수밖에 없는 역할과 자원의 배분을 사회 성원들이 그럭저럭 납득하고 수긍할 수 있도록 만드는 장치이다. 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그리고 최근에 와서는 거의 절대적으로 그 역할을 수행해 온 장치는 바로 교육이다. 훌륭한 인재를 배출하여 높이 쓴다는 말은 곧 훌륭하지 않은 인재를 갈라내어 배제하고 천대한다는 말과 동전의 양면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짧은 교육과 지적 능력을 탓하면서 그러한 불평등한 역할 배분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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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유럽 중도 좌파의 몰락과 새 경제학 사회민주당이나 노동당 등의 이름이 붙은 유럽의 중도 좌파 정당들이 10년째 내리막을 걷고 있다. 얼마 전 선거에서 독일 사회민주당의 득표율은 20%에도 미치지 못하여 150년 역사에서 최악의 결과를 냈다. 이탈리아의 민주당도 최근 선거에서 19%의 득표율로 군소 정당과 비슷한 처지로 점점 밀려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거의 전 유럽적인 차원일 뿐만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추세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언론에서 주로 ‘좌우 포퓰리즘 세력의 득세’라는 식으로 제목을 뽑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주목을 끌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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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싹쓸이’와 의회개혁 시민혁명 이후의 의회는 단일한 집단이 아니었다. 이념적으로나 물적 이해로나 서로 못 잡아 먹어 안달인 앙숙들이 오월동주하는 장이었다. 그래도 큰 의미가 있었다. 그전까지는 창과 칼을 들고 내란을 일으켜 온 나라를 피바다로 만들기 일쑤이던 이 원수들이 최소한 ‘칼이 닿지 않는 거리’(영국 의회)에서 소리와 침만 주고받으며 싸우게 되었으니까. 그리하여 의회라는 장은 사회에 내재하는 여러 갈등이 서로 적나라하고 격렬하게 드러나고 충돌하는 것을 스스로의 기능으로 삼는 장이 되었다. 싸우다가 결판을 내기 위해서는 ‘총알(bullet)’ 대신 ‘투표(ballot)’를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의회에서 허구한 날 싸움박질이나 벌이는 것이 꼭 나쁜 일이라고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사회 안에 내재한 갈등과 충돌을 통제가능한 방식으로 드러내어 사회의 파괴를 미연에 방지하는 순기능을 수행 중인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