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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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기본소득과 고용보험의 우선순위 기본소득이냐 전 국민 고용보험이냐는 논쟁이 일각에서 뜨겁게 일어나고 있다. 워낙 복잡하고 큰 주제들이라 거두절미하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논지만 짤막하게 전달하고자 한다. 이 두 정책은 서로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므로, 양자택일의 문제로 논의해서는 안 된다. 나아가 현재의 코로나19 사태라는 상황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선후를 정하자면 전 국민 고용보험이 먼저가 되어야 한다. 이 제도가 전면적으로 채택된다면 향후 기본소득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에 결정적인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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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실로 간특한 바이러스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정말 밉다. 독성과 흉측한 모습만이 아니다. 우리 산업 문명의 운영 원리와 가치관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깔깔거리며 지켜보고 있는 그 간특함 때문이다. 코로나19가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선언되고 주요 산업국가들을 위시하여 수많은 나라들이 폐쇄 상태로 들어간 지 불과 몇 달 되지 않았지만, 벌써 대부분의 나라들이 폐쇄를 지속할 것이냐 완화할 것이냐의 갈등 상황으로 몰리고 있으며, 그중 후자 쪽으로 기울어 가는 나라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확진자 증가율도 사망률도 줄어들고 있지 않지만 어쨌든 폐쇄를 완화하는 조치를 취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경제를 살린다고 이렇게 섣불리 폐쇄를 완화했다가 두 번째 물결이 시작될 경우 훨씬 더 큰 비용을 치를 것이라는 각국 보건 당국자들의 경고도 계속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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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사회적 방역’에서의 ‘곡선 평탄화’ 많은 의료인들과 시민들과 공무원들의 헌신에 힘입어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코로나19 사태에 대처하는 나라의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질병의 방역에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지금, 우리가 시급히 착수해야 하는 것은 ‘사회적 방역’이다. ‘사회체(social body)’라는 어휘에 잘 드러나 있듯이, 사회도 엄연히 몸뚱어리를 가진 생물학적 실체이다. 하지만 이를 지키기 위한 ‘사회적 방역’의 전선은 바이러스와의 전선보다 훨씬 더 길고 꼬불꼬불하다. 바이러스가 파괴하는 것은 사람의 허파와 신체이지만, 그로 인해 연쇄적으로 터지는 일련의 사태는 사회 전체를 망가뜨리게 되어 있다. 해저의 지진과 화산은 지층과 마그마의 문제이지만, 거기서 생겨나는 쓰나미와 그로 인해 파괴당한 원자력 발전소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들을 낳는다. 의료인들과 공무원들이 바이러스를 막는 1차 전선을 성공적으로 구축했다면, 우리는 이제 그로 말미암아 터져 나오는 다양한 사회적 재난과 위험들을 막을 ‘사회적 방역’의 2차 전선을 구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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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위성정당 ‘역병’ 창궐…총선 연기를 지금 창궐하고 있는 것은 코로나바이러스만이 아니다. 거대 양당이 만들어 낸 기상천외의 ‘위성정당’들과 거기에 몰려든 개인과 집단들이 역병처럼 창궐하고 있다. 전자가 우리의 허파와 신체를 좀먹고 파괴한다면, 후자는 우리의 헌법 질서를 능멸하고 파괴하고 있다. 박근혜 집단이 사익을 취하기 위해 국정을 농단했다면, 이들은 사익을 취하기 위해 헌정을 농단하고 있다. 헌법은 국가 권력이 어떻게 구성되고 운영되는가를 정해놓은 원칙이다. 국가가 신이나 혈통과 같은 신비적인 권위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이들로부터 복종을 얻어낼 수 있는 권위를 가지려면, 스스로가 주권자인 국민들의 ‘일반의지’를 표상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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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21대 국회를 어찌할 것인가 아직 구성되지도 않은 21대 국회를 걱정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까지 각 정당의 추세를 선거일까지의 기간에 투사해 볼 때, 21대 국회는 벌써 대단히 퇴행적인 국회가 될 것이 거의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의 향후 4년은 그러한 국회를 업고 가기에는 몹시 지쳐있고 또 매우 시급한 과제들을 너무나 많이 안고 있다. 그래서 심각한 질문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하잘것없는 권력 싸움에 골몰할 저 300명을 어떻게 안고 가야 할 것인가?” 의회 민주주의가 그 몇백년의 시련 속에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과 같은 위기의 시절마다 그러한 기능을 하는 의회가 나타나 주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초 영국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급변한 국제 정세와 정신없이 진행되는 국내의 산업혁명 그리고 여기서 비롯된 격심한 사회 갈등의 위기에 처한 바 있다. 1832년의 의회 개혁으로 나타난 ‘개혁 의회’는 이러한 시대적 도전에 맞서 구빈법 철폐를 위시한 실로 과감한 입법 조치를 통하여 영국을 산업혁명과 세계화에 최적화된 나라로 바꾸어 내게 된다. 2차 대전을 전후해 새롭게 나타난 주요 산업국가들의 의회 또한 자본과 노동이라는 두 세력의 존재를 인정한 위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걸친 과감한 개혁을 통하여 전후 산업민주주의를 건설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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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아마존의 몰락? 얼마 전 ‘포브스’지에 실린 한 투자 분석가의 글은 지난 20년간 미국, 나아가 전 세계를 정복하다시피 했던 대기업 아마존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추세를 지적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온라인 서점으로 출발했던 아마존은 2000년대 들어 지상의 거의 모든 물건을 다 매매하는 대규모 구매 플랫폼으로 성장하였다. 넓디넓은 미국 땅에서 당일 배송이라는 거의 기적 같은 일을 가능케 했으며, 손쉬운 환불 및 반송, 현금이 없는 이들을 위한 신용 제공 등 환상적인 서비스들을 계속 장착하면서 이른바 혁신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시어스와 같은 굴지의 백화점까지 이 파상적인 아마존 플랫폼의 팽창에 밀려 폐허가 되거나 문을 닫았고, 이제 모든 소매업자들은 아마존에 무릎을 꿇고 그 플랫폼에 자신들의 상품을 공손히 등록해 놓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마존은 모든 소매업자들의 플랫폼으로 성격이 변해갔다. 2007년만 해도 23%에 불과했던 제3자 거래는 이제 53%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아마존이 직접 재고를 관리하며 물건을 파는 비중은 낮아지고, 플랫폼으로서만 기능하면서 소비자와 판매자를 매개하는 비중이 절반 이상으로 높아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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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기후위기 고민 없는 ‘2045 비전’ 지난 12일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위원장 정해구)는 ‘혁신적 포용 국가 미래 비전 2045’를 발표하였다. 광복 100주년이 되는 시점에서 어떤 대한민국을 만들어 놓을 것인가에 대한 장기 비전으로서 경제·정치·사회에 걸친 포괄적인 전망을 제시하는 내용이었다. 이를 보고 내가 적잖이 충격을 받았던 것은, 기후위기에 대한 문제의식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이른바 ‘녹색체제 전환’에 대한 계획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2년 남짓 남은 정권 후반기의 정책 비전도 아니다. 자그마치 사반세기에 해당하는 25년의 긴 시간 지평에서 사회의 앞날을 이야기하면서 지금 지구 생태계 전체의 근간을 뒤흔들어 놓는 이 문제를 이렇게 다룬다는 것은 실로 믿기 힘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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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86세대 정치인들의 ‘뻔한 사표쇼’ 장면 1#: 1990년대 초 미국 중심의 국제정치학계는 큰 충격을 받았다. 소련 및 공산권의 몰락이라는 대사건을 예측도 분석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의 세계질서가 어떻게 될지, 또 어떠한 질서를 지향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전혀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국제정치학 무용론이 나왔고, 특히 국제정치이론이라는 것이 쓸모가 있는지 심지어 그런 게 있기는 한 건지라는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목소리를 쏟아놓은 이들이 모두 국제정치학자들이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1990년대 내내 “국제정치이론은 존재하는가? 쓸모가 있는가?”라는 물음을 새로운 레퍼토리로 삼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유수의 학술지들은 모두 이러한 주제로 특집 논문을 싣기 시작하였고, 또 이 주제로 큰 학술대회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실로 진풍경이었다. 하지만 부조리극은 아니었다. 그 덕에 이 학자들과 학회들은 이 새로운 주제를 내걸고서 또 많은 연구 프로젝트를 제출하여 또 많은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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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조국 사태와 진보의 윤리 나는 개인 차원의 윤리 도덕에 대해서 입을 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해왔다. 좋아하는 주제도 아니거니와, 나라는 사람이 직업상으로나 인품으로나 도저히 그런 이야기를 입에 올릴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한 번만 예외로 용서해 주시길 빈다.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는 식자들에게 걸려들면 시장에 대한 맹신, 국가의 후퇴, 지구화 등등의 온갖 현란한 사회과학 용어로 범벅이 된 추상적 개념으로 변해 버린다. 틀렸다. 신자유주의는 그렇게 유령 같은 존재가 아니다. 누구나 매일매일 일상에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확고한 개인의 행동 윤리이며, 그 내용도 너무나 명쾌하여 토악질이 날 정도이다. ‘법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이웃과 윤리와 공동체에 대한 모든 고려를 제쳐두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너의 잇속을 챙겨라.’ 이러한 개인들이 늘어나면, 과학적으로나 사회 정의의 차원에서나 황당하기 그지없는 신자유주의의 여러 제도와 정책들도 얼마든지 현실에서 용납되고 지속될 근거를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제도와 정책이 정착되면 또 그러한 개인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순환 고리가 형성된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을 내면화한 주체의 형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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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플랫폼 기업의 대안 ‘커먼즈’ 대표적인 플랫폼 기업으로 큰 기대를 모았던 우버와 위워크가 최근 들어 실적에서도, 자본시장의 평가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비관론자들은 아예 장래가 없다고 단언하기까지 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여러 원인이 있겠으나 플랫폼이라는 것이 과연 사적 소유에 기초한 영리 사업체라는 형태와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도사리고 있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과 그 ‘초연결성’이라는 것으로 인해 경제적 자원으로 연결되는 것의 폭이 폭발적으로 넓어졌고, 이에 플랫폼이라는 것이 경제 활동을 조직하는 핵심적인 장치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전까지 사용되지 않았던 사람과 유형·무형의 ‘유휴 자원’을 연결하여 엄청난 가치를 창출하는 일종의 노다지로서 플랫폼이라는 것이 나타났고, 이것이 ‘공유경제’라는 상당히 그릇된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플랫폼이 투자자들의 사적 소유물로 되어 있으며, 따라서 이를 통과하는 모든 ‘유휴 자원’들이 이윤을 내는 상품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는 데에 있다. ‘유휴 자원’들이 쓰이지 않고 있는 데에는 모두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를 플랫폼에 단순히 등록한다고 해서 바로 자원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유휴 자원’들이 쓸모를 가질 수 있도록 새로운 관계를 창출하고, 기존의 관계를 다듬는 적극적인 활동이 필요하다. 하지만 단순히 플랫폼을 쥐고 앉아 이윤만 기다리는 기업 형태로는 이런 일이 가능하지 않다. 플랫폼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또 스스로를 바꾸어 나가는 능동적 주체가 될 때에만 이러한 혁신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플랫폼 기업들이 초기의 열광과 거품 속에서 이야기된 만큼 밝은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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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조국 사태와 기후 위기 1960년대 초 환경 문제를 가장 먼저 제기했으며 사회생태주의의 아버지가 된 머레이 북친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가 곧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의 원인이라고 보았으며, 생태 위기에서 벗어나는 근본적인 방법은 인간 사회를 우애가 넘치는 더욱 평등한 사회로 만드는 것뿐이라고 갈파하였다. 언뜻 들으면 급진적 이상주의자가 내뱉은 몽롱한 말일 뿐, 지금 10년 앞으로 숨가쁘게 닥쳐오는 기후 위기를 막을 구체적인 해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지난 1주간 펼쳐진 진풍경은 내게는 그게 아니구나라고 생각하는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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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일본 헌법 ‘9조 개헌’ 괜찮은가 지난 한 달 동안 한국 사회를 들끓게 했던 한·일 관계에 대한 논쟁을 보면서 나는 두 가지 점에 놀랐다. 첫째는 숨은 일본 전문가가 이렇게나 많았다는 점이며, 둘째는 소수를 제외하면 그들 대다수의 주장과 견해라는 것이 그렇게나 천편일률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일본 전문가가 아니며, 이 소중한 지면에 이미 나왔던 말을 또 얹고 싶은 생각도 없다. 단지 평범한 시민으로서 정말로 의아스럽게 여겨지는 질문 하나를 던지고 싶다. 왜 아무도 ‘9조 개헌’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이가 없는가? 이 ‘9조 개헌’이야말로 일본 보수 지배층의 해묵은 숙원이며, 아베 정권의 거의 모든 행보의 근저에 도사린 동기이며, 이번 한·일 갈등에서도 어쩌면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근원적인 요인이기도 하다. 현행 일본 헌법의 9조는 일본이 스스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평화국가’라고 못 박은 조항이다. 이는 2차 대전 직후 일본을 점령한 미국이 세계 평화에 도발을 일으켰던 파시즘 국가들의 전쟁 능력을 해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마련한 것이었고, 이후 동아시아 군사 질서 및 세력 균형의 중요한 전제가 되었다. 이 헌법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일본은 지금도 공식적으로는 영구적으로 전쟁을 포기한 ‘평화국가’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