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빈
(재)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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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86세대 정치인들의 ‘뻔한 사표쇼’ 장면 1#: 1990년대 초 미국 중심의 국제정치학계는 큰 충격을 받았다. 소련 및 공산권의 몰락이라는 대사건을 예측도 분석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의 세계질서가 어떻게 될지, 또 어떠한 질서를 지향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전혀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국제정치학 무용론이 나왔고, 특히 국제정치이론이라는 것이 쓸모가 있는지 심지어 그런 게 있기는 한 건지라는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목소리를 쏟아놓은 이들이 모두 국제정치학자들이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1990년대 내내 “국제정치이론은 존재하는가? 쓸모가 있는가?”라는 물음을 새로운 레퍼토리로 삼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유수의 학술지들은 모두 이러한 주제로 특집 논문을 싣기 시작하였고, 또 이 주제로 큰 학술대회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실로 진풍경이었다. 하지만 부조리극은 아니었다. 그 덕에 이 학자들과 학회들은 이 새로운 주제를 내걸고서 또 많은 연구 프로젝트를 제출하여 또 많은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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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조국 사태와 진보의 윤리 나는 개인 차원의 윤리 도덕에 대해서 입을 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해왔다. 좋아하는 주제도 아니거니와, 나라는 사람이 직업상으로나 인품으로나 도저히 그런 이야기를 입에 올릴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한 번만 예외로 용서해 주시길 빈다.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는 식자들에게 걸려들면 시장에 대한 맹신, 국가의 후퇴, 지구화 등등의 온갖 현란한 사회과학 용어로 범벅이 된 추상적 개념으로 변해 버린다. 틀렸다. 신자유주의는 그렇게 유령 같은 존재가 아니다. 누구나 매일매일 일상에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확고한 개인의 행동 윤리이며, 그 내용도 너무나 명쾌하여 토악질이 날 정도이다. ‘법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이웃과 윤리와 공동체에 대한 모든 고려를 제쳐두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너의 잇속을 챙겨라.’ 이러한 개인들이 늘어나면, 과학적으로나 사회 정의의 차원에서나 황당하기 그지없는 신자유주의의 여러 제도와 정책들도 얼마든지 현실에서 용납되고 지속될 근거를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제도와 정책이 정착되면 또 그러한 개인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순환 고리가 형성된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을 내면화한 주체의 형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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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플랫폼 기업의 대안 ‘커먼즈’ 대표적인 플랫폼 기업으로 큰 기대를 모았던 우버와 위워크가 최근 들어 실적에서도, 자본시장의 평가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비관론자들은 아예 장래가 없다고 단언하기까지 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여러 원인이 있겠으나 플랫폼이라는 것이 과연 사적 소유에 기초한 영리 사업체라는 형태와 양립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도사리고 있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과 그 ‘초연결성’이라는 것으로 인해 경제적 자원으로 연결되는 것의 폭이 폭발적으로 넓어졌고, 이에 플랫폼이라는 것이 경제 활동을 조직하는 핵심적인 장치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전까지 사용되지 않았던 사람과 유형·무형의 ‘유휴 자원’을 연결하여 엄청난 가치를 창출하는 일종의 노다지로서 플랫폼이라는 것이 나타났고, 이것이 ‘공유경제’라는 상당히 그릇된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플랫폼이 투자자들의 사적 소유물로 되어 있으며, 따라서 이를 통과하는 모든 ‘유휴 자원’들이 이윤을 내는 상품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는 데에 있다. ‘유휴 자원’들이 쓰이지 않고 있는 데에는 모두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를 플랫폼에 단순히 등록한다고 해서 바로 자원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유휴 자원’들이 쓸모를 가질 수 있도록 새로운 관계를 창출하고, 기존의 관계를 다듬는 적극적인 활동이 필요하다. 하지만 단순히 플랫폼을 쥐고 앉아 이윤만 기다리는 기업 형태로는 이런 일이 가능하지 않다. 플랫폼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또 스스로를 바꾸어 나가는 능동적 주체가 될 때에만 이러한 혁신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플랫폼 기업들이 초기의 열광과 거품 속에서 이야기된 만큼 밝은 미래가 보장되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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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조국 사태와 기후 위기 1960년대 초 환경 문제를 가장 먼저 제기했으며 사회생태주의의 아버지가 된 머레이 북친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가 곧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의 원인이라고 보았으며, 생태 위기에서 벗어나는 근본적인 방법은 인간 사회를 우애가 넘치는 더욱 평등한 사회로 만드는 것뿐이라고 갈파하였다. 언뜻 들으면 급진적 이상주의자가 내뱉은 몽롱한 말일 뿐, 지금 10년 앞으로 숨가쁘게 닥쳐오는 기후 위기를 막을 구체적인 해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지난 1주간 펼쳐진 진풍경은 내게는 그게 아니구나라고 생각하는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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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일본 헌법 ‘9조 개헌’ 괜찮은가 지난 한 달 동안 한국 사회를 들끓게 했던 한·일 관계에 대한 논쟁을 보면서 나는 두 가지 점에 놀랐다. 첫째는 숨은 일본 전문가가 이렇게나 많았다는 점이며, 둘째는 소수를 제외하면 그들 대다수의 주장과 견해라는 것이 그렇게나 천편일률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일본 전문가가 아니며, 이 소중한 지면에 이미 나왔던 말을 또 얹고 싶은 생각도 없다. 단지 평범한 시민으로서 정말로 의아스럽게 여겨지는 질문 하나를 던지고 싶다. 왜 아무도 ‘9조 개헌’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이가 없는가? 이 ‘9조 개헌’이야말로 일본 보수 지배층의 해묵은 숙원이며, 아베 정권의 거의 모든 행보의 근저에 도사린 동기이며, 이번 한·일 갈등에서도 어쩌면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근원적인 요인이기도 하다. 현행 일본 헌법의 9조는 일본이 스스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평화국가’라고 못 박은 조항이다. 이는 2차 대전 직후 일본을 점령한 미국이 세계 평화에 도발을 일으켰던 파시즘 국가들의 전쟁 능력을 해체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마련한 것이었고, 이후 동아시아 군사 질서 및 세력 균형의 중요한 전제가 되었다. 이 헌법은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일본은 지금도 공식적으로는 영구적으로 전쟁을 포기한 ‘평화국가’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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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ISD, 전문가란 무엇인가 최근 민변과 참여연대가 함께 ISD(투자자-국가 분쟁) 제도의 개선 및 폐지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ISD라는 제도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추진되던 시작부터 끝없는 논란을 불러왔던 제도였다. 민간의 투자자들이 협정 상대국 국가의 정책과 조치가 자신들에게 불이익을 초래한다고 판단할 경우 국제 중재를 걸어 배상금을 받아낼 수 있도록 보장하는 제도로서, 국가의 경제 주권을 무너뜨리고 국제 투자자들과 법률 집단의 잇속만 채우는 것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나도 여기에 얽힌 기억이 있다. 논쟁이 촉발되었던 2006년 ISD 제도의 문제점을 경고하는 책을 낸 적이 있었다. 나는 관료, 학자, 법률가들에 의해 공석과 사석에서 조리돌림을 당하였다. ‘전문가도 아니면서 어처구니없는 괴담을 퍼뜨려 불안을 조성하는’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제도는 완벽하게 안전할 뿐만 아니라 한국 경제의 이익을 위해서 꼭 필요한 제도이며, 이 제도를 비판하는 것은 국제법도 국제 경제도 모르는 문외한들의 무지의 소치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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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혁신 성장엔 ‘재정 확장’ 필수 정부의 재정 정책은 사실상 긴축 기조를 유지해왔다. 이러한 기조에서는 정부가 내건 소득주도성장은 물론 혁신 경제라는 목표 또한 달성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거대한 기술 패러다임의 변화 그리고 이와 함께 벌어지는 사회적 변동을 지혜롭게 아우르고 조화시켜 새로운 산업사회를 건설해야 할 변혁기에 있다. 국가의 재정 구조를 (세수에서나 지출에서나) 더욱 적극적인 방향으로 확대해야 하는 시기는 바로 지금이다. 여기가 바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였던 슘페터와 케인스가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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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동물 국회, 메아리 방, 의회 정치 오늘은 불편한 진실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내가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 오마이뉴스가 리얼미터에 의뢰해 지난 4월30일 행한 여론조사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국회의 패스트트랙 처리를 긍정적으로 보는 여론은 51.9%, 부정적으로 보는 여론은 37.2%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후자가 무려 37.2%나 된다는 점이다. 이른바 ‘동물 국회’의 저 끔찍하고 참담한 모습을 보면서도 우리 국민들은 한마음 한뜻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또한 이후의 처리 과정에 대해서도 엄격한 법적인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의견은 45.9%에 그친 반면 고소·고발을 취하하고 정치적으로 원만하게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은 오히려 47.2%로 오차범위 안에서나마 더 높게 나타났다. 사회 일각에서는 자유한국당 정당 해산 청원이 100만을 돌파하여 200만을 향하여 가고 있건만, 사회 전체 여론은 전혀 그렇지 않다. 아랫목은 펄펄 끓어 이불이 탈 지경이지만 윗목은 냉골이라 고드름이 열리는 옛날 한옥집 사랑방의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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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왜 흑자 재정인가 정부의 통합재정수지가 31조원을 넘는 흑자를 기록했다. 실업의 고통이 가중되고 디플레이션 위협이 출몰하는 가운데 정부가 재정 긴축의 고삐를 바짝 잡아당기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한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이에 대해서 관리재정수지는 여전히 10조원 정도의 적자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지만, 관리재정수지도 추세로 볼 때 그 적자 규모가 지난 4년간 거의 4분의 1로 줄어들었다는 점을 보면 정부의 재정 편성 기조가 어떤 방향을 지향하고 있는지는 명백하다. 국가 재정과 관련하여 오늘날까지 경제학자들과 관료들과 정치가들의 의식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오래된 관념이 있으니, ‘균형 재정’의 강박증이다. 이는 서로 다른 몇 가지 생각이 중첩되어 구성되어 있다. 첫째, 나라 살림도 집안 살림과 다르지 않으므로 수입을 넘어서는 지출은 방종이며 결국은 과도한 부채로 인해 파산의 길을 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가정주부로서 살아온 오랜 경험으로 볼 때 부채는 무조건 나쁜 것입니다.” 영국의 대처 총리가 내놓았던 이 무지막지하지만 직관적으로 대단히 호소력 있는 명제는 오늘날까지도 경제학과 경제 정책의 방향까지 결정해 버렸다. 둘째, 국가의 재정 확대 특히 적자 재정은 시장으로부터 자금을 빼앗아가서 그 활력을 죽여 버리는 결과를 낳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잠깐 반짝 경기를 호전시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는 ‘언 발에 오줌 누기’와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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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보편적 복지에 대한 회의 우리나라에 보편적 복지에 대한 논쟁이 대중적으로 벌어진 계기는 무상급식 논쟁이었던 듯하다. 그때까지 복지란 가난하고 힘든 이들을 돕는 것이라 여겨졌지만, 그 논쟁을 계기로 복지는 발전된 산업사회의 모든 성원들이 보편적 삶의 권리로서 주장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는 복지국가 운동에서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우리나라도 복지국가의 건설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중산층 심지어 중상층까지도 고루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보편적 복지가 바람직하다는 인식이 굳건히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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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영화계, 후졌다 지난달 26일 또 한 사람의 영화 노동자가 자신의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경찰 수사에 따르면 고인은 사망 전 일주일 동안 하루 평균 14시간 30분씩 주 73시간 33분을 일했다. 밤샘 작업으로 새벽에 퇴근하고 그날 아침에 또 출근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영화 및 드라마 산업에서의 장시간 노동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며, 그로 인해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는 비극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의 홍태화 사무국장의 글을 보자. 2015년 고용노동부가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OECD 월평균(142.16시간)보다 영화는 169.74시간, 방송은 213.24시간 더 장시간 근로하고 있으며, 한국 월평균(171시간)보다 영화는 140.9시간, 방송은 184.4시간 더 장시간 근로하고 있다. 결국 영화 및 방송 노동자는 OECD 평균보다 장시간 근로를 하는 한국 일반노동자보다도 2배 더 장시간으로 일하고 있는 셈이다.” 이를 바로잡기 위한 영화 노동자들의 외침이 계속 있어왔지만, 업계도 정부도 모르쇠였고 이 살인적인 노동 조건은 지금도 노동자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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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대학, 랭킹에서 나오라 벨기에 플랑드르 지방의 겐트 대학은 세계 대학 순위 50위에 드는 유수한 대학이다. 이 대학의 총장은 올해 초 연설에서 새로운 대학 모델로의 전환을 내걸면서 무의미한 “랭킹” 경쟁에서 빠져나오겠다고 선언하였다. 그 큰 방향은 “대학을 관료들의 손에서 학자들의 손으로”라는 것으로서, 연구자들, 여러 학과, 다른 대학과의 무의미한 순위 경쟁으로 인해 낭비되는 시간과 자원 그리고 진정한 지식 탐구를 방해하는 온갖 관행들을 철폐할 것을 표방하고 있다. 그 구체적인 조치의 하나로 2년 단위로 이루어지는 개인, 학과, 대학에 대한 각종 평가를 5년 단위로 늘리는 개혁을 약속하였다. 이 사례에서 고무된 우리들은 더 나아간 질문을 던지게 된다. 대학의 혁신과 개혁이 현행의 “랭킹”이라는 관행과 과연 양립할 수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