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미리
고려대 연구소·정치학 박사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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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당의정의 달콤함’보다 중요한 것 국회 정문 바로 옆에는 형제복지원 생존자 모임의 농성천막이 있다. 일찍이 같은 장소에 비슷한 것이 설치된 일은 없었다. “국가는 우리에게 법을 지키라고 할 자격이 없다.” 2년여 전 천막이 처음 설치됐을 때 철거하려는 공무원들에게 생존자 대표가 한 말이다. 이후 철거 계고장이 몇 차례 날아들었지만 시민들의 호소와 관할구청의 유보적 태도 속에 천막은 두 해를 넘길 수 있었다. 그사이 국회 담벼락 아래엔 다른 농성천막들도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지난 연말 생존자 한 명이 과거사법의 통과를 요구하며 고공 단식농성을 전개했다. 언론에 크게 보도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농성장을 찾았지만 이전에도 그곳에는 ‘무언가’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사학비리를 내부제보하고 학계에서 퇴출당한 연구자, 인사과장에게 성폭행당하고 살해된 여성의 부모, 한부모가정 자녀라는 이유로 관심사병으로 분류된 뒤 강제 전역된 남성의 엄마, 학교폭력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이의 엄마, 군 입대 후 의문의 사고로 두 다리를 절단하게 된 청년의 형, 청년시절 간첩으로 조작돼 구속되고 고문당했던 의사…. 국가와 사회로부터 배제된 여러 사람들이 농성천막을 제집처럼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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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산재와 계급 대물림 2019년 11월21일 경향신문이 산재사고로 사망한 노동자 1200명의 명단을 1면에 게재했다. 1면을 꽉 채운 명단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구구절절한 어떤 말보다도 강력했다. 사람들은 궁금해했다. 1200명의 명단이 가리키는 이정표는 무엇일까? 신문은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실업이 문제고 최저임금이 중요한데 왜 산재일까? 사실 산재는 노동운동이나 노동연구에서도 주변부에 속한다. 고용이나 임금 문제에 비해 당사자 수가 적은 데다 전문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논문도 사회학자보다 의료인이 쓴 게 많다. 산재추방운동은 현재 노동안전보건운동으로 불리는데 당사자운동에서 대책위 구성 같은 지원활동을 거쳐 노조활동의 일부가 됐다가 최근에는 건강권운동의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1987년 김성애의 투신자살을 계기로 전개된 인천지역 산재노동자들의 경인국도 가두시위가 당사자운동에 해당한다면 1988년 문송면 수은중독 사망사건과 원진레이온 산재피해의 진상조사에는 외부 전문가가 대거 결합했다. 또 전노협과 민주노총의 출범 이후 노동운동 차원에서 전개됐다가 최근에는 산재 당사자와 활동가가 결합한 ‘반올림’ 같은 단체의 활동이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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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민주노총은 정부에 경고해야 한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일요일은 쉬게 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 “삼반세력 타도하자!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사회가 돼야 한다.” “아이들에게 힐리스인지 뭔지를 사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지키지 못해서 미안하다.” 1970년 11월13일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 1986년 3월17일 구로공단 노동자 박영진, 2003년 한진중공업 노동자 김주익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전태일이 “나에게 대학생 친구 한 명만 있었다면” 하고 일기에 썼다면 박영진은 그런 대학생 친구를 가진 노동자였다. 1980년대 중반 변혁운동의 싹을 틔우던 대학가는 1984년부터 전태일추모제를 개최하며 전태일을 열사의 기원으로 소환했다. 구로지역의 노동야학에서 대학생 친구를 만나 그들의 언어를 배운 박영진은 사망 직전 “전태일 선배가 못다 한 일을 내가 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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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대통령이 책임져라 2014년 세월호가 침몰하고 보름 뒤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를 했다. 손팻말에는 “박근혜, 네가 책임져라”라고 적었다. 세월호 집회 때 “박근혜 퇴진” 구호가 나오면 시비가 붙곤 했다. 대통령에게 최종적 책임이 있다는 사람들과 슬픔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사람들 사이의 다툼이었다. 하지만 2016년 촛불광장은 세월호 침몰이 그 누구도 아닌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 박근혜의 책임이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지금 나라가 갈가리 찢겨 싸우고 있는 것도 바로 대통령에게 그 책임이 있다. 이런 적은 없었다. 해방 정국 찬탁과 반탁, 좌익과 우익 시위가 경쟁적으로 개최됐지만 정부가 수립되기 전의 일이다. 그 뒤로 대규모 시위는 정권을 향한 저항의 표현이었다. 정치권력은 공권력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성난 군중과 대결케 했지만 스스로가 대규모 군중을 조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권력이 버젓이 살아있는데도 살아있는 권력을 대신한 군중들이 그에 반대하는 군중들과 맞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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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더 많은 정치가 필요하다 “국가여, 이들을 돌보소서!” 15년 전 어느 인터넷 기사에 달렸던 댓글이다. 남편과 아이는 장애로 일상생활이 어렵고 생계를 책임진 아내이자 엄마인 40대 여성도 당뇨와 합병증으로 고통받고 있는 가족의 얘기였다.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댓글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국가’를 호명했기 때문이다. 사회복지단체에서 모금을 위해 올린 기사였지만 댓글 작성자는 가족을 돌봐야 할 책임이 국가에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지난주 노모와 장애인 형을 살해하고 동생도 죽음을 선택했다는 기사가 보도됐다.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 2018년 증평 모녀 사건, 그리고 지난달 발생한 관악구 탈북 모자 아사 사건의 연장선상에 있다. 댓글을 살펴봤다. 공통적인 정서는 슬픔에 대한 공감이었다. 친족 살해를 비난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가족이 겪었을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고 불가피한 선택으로써 살해와 자살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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