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효정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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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목소리의 목소리가 되자 내가 신문에 글을 쓴다는 것을 알고 나서 어머니는 그런 당부를 하셨다. 미움받게 쓰지 말고 좋은 말만 쓰라고. 왜 그런 말씀을 하셔요? 어련히 알아서 잘 쓰겠냐마는 세상이 하도 야박하니 안 그러냐. 하지만 엄마, 글 쓰는 사람이 그런 마음을 먹으면 글도 망하고 세상도 망해요. 나는 대답했다. 황반변성으로 시력을 거의 잃은 어머니는 이제 글을 읽지도 못하는데, 마음이라도 편하시도록 네, 엄마, 그렇게 할게요, 그러고 말 걸 후회도 했지만, 어쩌면 저 대답은 나 자신에게 하는 다짐의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4년 가까이 이 지면에서 4주에 한 번 칼럼을 썼고, 오늘 마지막 칼럼을 쓴다. 나에게 이 지면의 의미가 무엇이었고 어떻게 써왔는지, 돌아보는 글로 최종 마감을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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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진짜 대학의 위기는 무엇인가 대학 나와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기란 하늘의 별 따기이고, 대학졸업장이 예전 가치를 잃은 지 오래인데도, 여전히 많은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한다. 올해 수능 응시자 수는 50만4588명, 이 중에서 재수생은 31.7%에 달한다. 입시는 수능으로 끝나지 않는다. ‘서울대보다 높은 대’라는 의대 진학을 위해 서울대 입학생들이 빠져나가고 나면 그 자리부터 서열대로 줄줄이 추가합격과 편입학, 반수와 재수의 도미노가 시작된다. 이 이동의 경로는 그대로 학벌 차별, 지역 차별의 경로가 된다. ‘더 나은 곳’으로의 이동은 끝나지 않는다. 최근 10년간 비수도권에서 수도권으로 이동한 청년 인구는 60만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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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팔레스타인을 위하여 제정신으로 볼 수 없는 일을 제정신으로 보고 있다는 것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이 아닐까. 누가 계속 그렇게 묻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아직 인간인가, 수없이 되묻는 시간이다. 팔레스타인 전쟁 속보를 부산역 대합실에서 처음 들었다. 함께 모여 뉴스를 응시하던 사람들의 눈빛을 기억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눈동자 속에는 불안감이 차오르고 있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는 길, 일요일 오후 동서울터미널에는 동부전선으로 귀대하는 군인들로 붐빈다. 군복이 어울리지 않는 앳된 얼굴의 군인을 보며 나는 마음이 무거워진다. 여기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땅. 아무리 모른 척하며 살아가도, 전쟁위기가 고조되면 그 진동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크게 도달할 수밖에 없다. 그곳에서 떨어지는 폭탄은 이곳의 하늘 위로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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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위기를 넘는 우리의 힘 어두운 밤, 비가 내리고 물이 차오르는 강 속에 가슴까지 물에 잠긴 사람들이 서 있다. 공주보 수문을 개방하자 4대강 사업으로 죽어가던 금강이 다시 흐르면서 조금씩 살아나고 있던 곳. 공주시는 그런 곳을 다시 수문을 닫고 물을 가두려 한다. 지역 축제인 백제문화제에서 유등과 배를 띄울 만큼의 수위가 필요해서다. 강물 속의 사람들은 고작 며칠간의 여흥을 위해 강의 생명을 죽이지 말라고 항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다. 강을 그대로 두고 문화제를 진행하자는 합의는 일방적으로 파기되었고, 경찰과 공무원들은 농성장 천막을 부쉈다. 사람들이 떠나지 않자 공주시는 그대로 계속 물을 채웠다.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치며 수문을 열라는 이들에게 “우린 시키는 대로 할 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행정집행은 폭력의 특허장이 되었고 ‘사람이 있는데, 설마’라는 상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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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교육운동, ‘교권’을 넘어서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처음 생겼을 때를 기억한다. 전교조가 내세운 ‘참교육’ 이념의 구체적 체감은 ‘돈 받지 않는 교사, 때리지 않는 교사, 차별하지 않는 교사’였다. 정권의 탄압에도 학생과 학부모, 시민들의 지지를 얻으면서 전교조는 교육운동의 상징적 대표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교사들 사이에서 전교조 교사들은 동료를 비방하는 내부고발자로 여겨졌고, 교사의 권위와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비난받기도 했다. 그중 가장 큰 불만은 ‘어떻게 교사가 노동자냐’는 것이었는데, 그 부끄럽게 여기던 교사의 노동자성과 노동권은 1990년대 이후 교사의 임금과 처우를 개선시킨 핵심 조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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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누가 교육을 죽이는가 서울 서초동의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 교사가 극단적 선택을 하는 충격적 사건이 일어났다. 부임 2년차의 1학년 담임교사였다고 한다. 그동안 악성 학부모 민원에 시달려왔다는 보도는 많은 이들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여론이 거세지자 우파 언론과 인사들은 연일 ‘과도한 학생인권이 교권을 실추시킨 탓’이라며 학생인권 때리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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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우리의 자존심 자존심이 상해 못살겠다. 서울국제환경영화제 팸플릿을 보다가 나는 자존심이 상한다. 환경파괴로 악명 높은 기업들의 이름이 수두룩해서다. 명색이 환경영화제인데, 삼척 화력발전소 건설사인 포스코와 최대 투자자인 농협을 비롯해 현대·삼성·SK 등 대표적 ‘기후 악당’ 기업들이 후원 명단에 대거 포함돼 있다. 한국 환경영화 대상을 수상한 <수라>는 새만금 개발 과정의 국가폭력과 생태학살을 고발하는 영화인데, 영화제 후원기업에는 새만금 개발에 참여한 건설기업들도 있다. 기업들이 이를 ESG경영 지표를 높이고 친환경 이미지로 세탁하는 데 활용한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기업의 생태학살 범죄를 은폐하는 ‘그린 워싱’에 조력하는 행위라는 비판이 제기됐지만 영화제 집행위와 주관 기관인 환경재단은 별도의 공식적인 해명이나 입장 표명 없이 영화제를 진행했다. 영화 속의 수라가 아름다웠기에 영화 밖에서 일어나는 추악한 거래는 우리의 자존심을 더 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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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미친 등록금’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 대학 등록금이 고등학교 학원비보다 싸고, 펫 유치원보다 싸다며 한탄하는 소리를 들었다. 한국사립대총장협의회 사무처장의 말이라고 한다. 중앙일보는 이 말을 인용하면서 등록금 인상 주장에 힘을 보탰다. 보통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학원 수강료가 대학 등록금보다 비싸고, 강아지·고양이 유치원비가 대학 보내는 것보다 더 비싼 현실을 개탄할 것이다. 하지만 대학 운영자들은 거꾸로 분개한다. 그들은 알고 있을까. 저 말은 대학 운영을 학원 운영이나 반려동물 유치원 운영과 다를 바 없는 영리사업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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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우리의 집은 투자상품이 아니다 결혼하고 처음 얻은 전셋집 집주인은 집이 여섯 채라고 자랑했다. “그거 불법 아닌가요.” 집을 보고 나와서 나는 부동산 아저씨에게 불안한 마음으로 물어보았다. 중개업자는 껄껄 웃더니, 법이 바뀐 지 언제인데 그런 소릴 하냐며 집주인 할머니가 은행 다니다 퇴직한 양반이라 ‘이런 쪽으로 똑똑하시다’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세입자에겐 많은 선택지가 없어 결국 그 집으로 들어갔지만 사는 내내 꺼림칙했다. 민간 임대주택 사업의 법적 근거인 임대주택등록법은 1994년에 처음 도입됐다. 그로부터 몇년이 지난 때였지만 여전히 ‘부동산 투자’라는 말보다 ‘땅투기’란 말이 더 익숙하고, 집으로 돈 버는 임대업자는 돈으로 돈 버는 사채업자만큼이나 부정적인 시선을 받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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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4월14일, 세종으로 가자 2000년대 초반 나는 독일 남부의 한 도시에 떨어졌다. 처음에 가장 낯설었던 건 캄캄한 밤이었다. 가게는 너무 일찍 문을 닫았고, 심지어 대학 도서관도 일찍 문을 닫았다. 나중에 ‘강제폐점법’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 때문에 특수업종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업장이 6시 혹은 8시 이후에 영업을 할 수 없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정부가 어떻게 이렇게 ‘영업할 권리’를 통제할 수 있는 건지 의아했다. 심지어 밤 시간을 뺏긴 것처럼 억울하기도 했다. 어느 날, 불만을 토로하는 나에게 독일 친구가 이유를 설명해줬다. “안 그러면 가게들은 서로 문 닫는 시간을 점점 늦추다가 새벽까지 장사를 할 거야. 그럼 어떤 노동자들은 밤에도 일을 해야겠지. 하지만 그 사람도 밤에는 쉬고 싶을 거고, 집에는 함께하고 싶은 가족이 있고, 일을 마치고 만날 수 있는 친구도 있을 거잖아.” 그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도 생각해보라는 말에 부끄러워 얼굴이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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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누구를 위한 전기요금 인상인가 전기요금 인상을 둘러싼 열띤 논쟁이 기후환경운동 진영 안에서 진행 중이다. 에너지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데 이의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요금 인상이 과연 그 목표를 실현하는 수단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나는 회의적이다. 가격을 올리면 수요가 줄어든다는 건 원론적인 가설이지만 현실에선 종종 어긋난다. 가스 전기 유류세 등 에너지 요금 상승은 가장 많이 쓰는 계층엔 큰 압력이 되지 않는 반면 적게 쓰는 계층일수록 고통과 비참을 수반한다. 필수재의 요금이 오르면 한계 소비층은 다른 데서 소비를 줄인다. 이 정책의 목표가 원가 인상을 요금에 반영하라는 시장의 상품화 요구가 아니라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공공성을 지키는 데 있는 것이라면, 일괄 요금 인상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전체 소비량을 줄이는 데는 덜 효과적이면서 에너지 불평등을 심화하는 데는 더 효과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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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그것은 누구의 이야기인가 ‘난방비 폭탄’이 떨어진 가운데, 기후위기 대응책으로 전기요금을 올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조금씩 들려온다. 주로 시장과 기술적 방법에 의존하는 자유주의 기후환경담론이 생산하는 논거들은 이러하다. 한국의 전기요금이 다른 선진국에 비하면 턱없이 싸기 때문에 소비가 줄어들지 않고, 에너지 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전달하는 데도 방해물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이런 이야기들은 일면의 사실을 말하지만 진실을 구성하는 데는 실패한다. 유럽과 미국의 높은 전기요금은 에너지 시장을 자유화한 결과다. 자유화가 에너지 기업들의 경쟁을 촉발하여 저렴한 공급과 질 높은 서비스를 만들어낼 것이라던 신자유주의 미담은 소수 대자본의 에너지 독점과 대규모 에너지 빈곤층의 양산이라는 비극으로 끝났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에너지 소비가 감소하고 탄소배출이 줄어든 가장 큰 이유도 탄소배출산업을 외주화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