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
최신기사
-
인생+ 후회의 문법 한 해의 끝자락에 설 때마다 시간의 오묘함을 새삼 느낀다.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가는데 한 해는 어김없이 다시 시작된다. 그 불가역성과 순환성의 교차점에서 우리는 삶의 한 매듭을 지을 수 있다. 이 무렵 마음의 풍경은 어떤 모양과 색채로 그려지는가. 뿌듯함보다는 아쉬움이, 감사보다는 원망이 짙게 배어난다면 왜 그런가.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쇼핑을 권유하는 상투어 가운데 하나다. 그 말을 믿고 카드를 긁었는데 곧 충동 구매였음이 드러나기 일쑤다. 상품의 선택이라면 비교적 간단하게 털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주식이나 가상통화 투자, 주택 구매, 학과나 직장 선택 등의 경우에는 탄식이 깊다. 미련과 집착에 시달리고 이불킥으로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 손실을 만회하거나 진로를 바꾸는 데 시간과 품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
인생+ 교학상장 지난여름에 방영이 시작된 예능 프로그램 <최강 야구>를 가끔 본다. 프로팀에서 활약하다가 은퇴한 선수들로 구성된 ‘몬스터즈’ 팀이 고등학생, 대학생, 18세 이하 국가대표팀 등과 시합을 벌이고 있다. 후배들과의 부담 없는 친선 경기가 아닐까 싶지만, 매번 필승의 각오로 치열하게 대결한다. 7할 승률을 목표로 기획되었는데, 결코 만만한 승부가 아니다. 어린 선수들이 ‘대선배’들과 접전을 벌이는 장면은 여느 프로 경기 못지않게 박진감 넘친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후배들의 탁월한 플레이에 경탄하면서 한 수 배우는 태도다. 모든 스포츠 경기 자체가 자연스럽게 학습을 수반하지만, 나이와 경험에서 한참 아래인 팀에 패하면서 자기의 약점을 확인하는 모습은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진수를 보여주는 듯하다.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함께 성장하는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연령의 차이가 수직적 서열을 자동 생성하는 문화에서는 관계의 각도를 약간만 바꿔도 새로운 기운이 순환한다. 그러한 에너지의 변환은 어느 분야에서든 가능하다.
-
인생+ 비스듬한 관계 “어린아이를 혼내기 위해 경찰서에 데려 오시면 아이 마음에 상처만 남습니다. 아이의 입장에서 묻고, 듣고, 답해주는 인내의 시간보다 더 나은 훈육은 없습니다.” 최근 어느 경찰서가 내걸어 화제가 된 현수막의 문구다. 자녀 또는 손주가 말썽을 피우는데 혼내도 말을 듣지 않으면 경찰서에 아이를 데려오는 부모나 조부모들이 종종 있어서 난감하다고 한다. 훈육의 어려움이 적지 않음을 짐작하게 한다. 자녀의 수가 줄어들었는데 부모 노릇은 왜 이렇게 버거워졌을까?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아이들은 부모 이외에 여러 어른과 관계를 맺으며 자라났다. 이모나 삼촌 등의 친척이 함께 살거나 자주 집을 찾아왔고, 동네에서는 이웃의 아저씨와 아주머니를 늘 마주쳤다. 그들은 아이를 함께 보살피면서 잘못하면 꾸지람도 해주었고,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존재만으로 자연스러운 규율이 이뤄졌다. 말하자면, 부모나 교사와 아이들 사이의 수직적 관계와 아이들 사이의 수평적 관계에 더해 ‘비스듬한’ 관계가 다방면으로 열려 있었다.
-
인생+ 상처에게 말 걸기 강연장에서 퀴즈를 내어 청중의 주의를 환기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이런 문제다. 많으면 많을수록 잘 안 보이는 것은?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 나오는 질문인데, 정답은 어둠이다. 여기에서 어둠은 시각적 대상이 아니라 시야의 장애물이다. 이런 논리라면 안개도 답이 될 수 있겠다. 그런데 예전에 노숙인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이 문제를 냈을 때, 의외의 답이 나왔다. “눈물입니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는 말을 떠오르게 하는 한마디였다. 나지막한 목소리에 인생의 애절함이 배어나는 듯했다. 누구나 살면서 이따금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누군가의 가슴에서는 평생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런 인물 가운데 한 분이 김창열 화백이라는 것을 지난주 개봉한 다큐멘터리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를 보면서 알게 되었다. 그가 반세기 동안 천착해온 수십만 개 물방울의 정체는 눈물이었다. 공산주의 체제의 탄압을 피해 홀로 38선을 넘었고, 한국전쟁에서 온갖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며 그 자신도 여러 번 죽을 뻔했던 경험이 거기에 깔려 있다. 비명과 기도를 넘나드는 절박함이 눈물에 담겨 있다.
-
인생+ 껍데기를 벗으려면 지난달 초에 개봉된 영화 <비상선언>은 항공 재난이라는 독특한 소재로 눈길을 끌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오픈하여 지금까지 롱런하고 있는 또 다른 ‘비상선언’이 있는데, 국민의힘이 연출하고 주연하는 비상대책위원회가 그것이다. 전방위적 경제난에 폭우까지 쏟아지던 비상사태에는 팔짱을 끼고 있다가, 당내의 힘겨루기에서 궁지에 몰리자 황급히 결성된 조직이다. 그런데 꼼수로 출범시킨 비대위는 거듭 혼선을 빚고 난맥상을 자초하면서 그 자체가 더 커다란 위기의 근원이 되어버렸다. 벗어나려고 몸부림칠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지는 형국이다.
-
인생+ 정정하다는 것 톰 크루즈가 <탑건>의 속편을 내놓는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과연 그 배우답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무리 기량이 출중하다 해도 환갑의 나이는 어쩔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니 ‘세월 앞에는 장사 없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외모가 건장했다. 그의 기세등등한 몸짓은 한 세대 아래의 젊은 배우들을 압도했고, 발랄하면서도 육중한 스태미나가 스크린을 꽉 채우면서 분위기를 장악했다. 동갑내기 남자로서 위화감을 느끼게 하는 카리스마였다. 영화 관람 후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전편에서 톰 크루즈의 라이벌 역할을 맡았던 발 킬머가 깜짝 출연한 장면이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그는 발성이 어려워 타이핑을 쳐서 의사를 전달했고, 잠깐 목소리를 내는 대목도 예전의 음성들을 모아다가 AI로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5년 전에 후두암 진단과 기관절개술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패기 왕성한 동료 배우 앞에서 병약해진 육신이 극명하게 대비되는데도, 그는 기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담담한 표정은 톰 크루즈의 위세보다 더욱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
인생+ 도전받는 즐거움 새로운 책의 출간을 앞두고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다. 3년 동안 집필하고 나름 치밀하게 다듬어온 원고인데도, 편집자의 손에 들어가면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대대적인 수정 작업을 해야 한다. 교정지를 받아볼 때마다, 내가 아직도 습작 단계에 머물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부실한 구성, 비논리적인 전개, 사실관계의 오류, 중언부언, 억측과 편향, 과장된 표현 등을 표시한 메모가 가득하다. 문장 수업은 언제나 준엄하고 혹독하다. 내가 글쓰기를 계속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신을 객관화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교열을 거듭하면서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생각을 치밀하게 다질 수 있다. 부족함을 지적받을 때 자괴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현재 수준을 확인하면서 더 나은 지성으로 거듭나는 통과의례의 괴로움으로 받아들인다. 그 깨달음을 삶에도 적용하려고 애쓴다. 나의 사고방식, 말과 행동, 일상의 습관 등에서 크고 작은 결함들을 정직하게 비춰줄 수 있는 지인들과 수시로 접속하는 것이다.
-
인생+ 자기 해방의 서사 어느 노인복지관의 실무자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시설 이용자 가운데 유난히 심성이 거칠어서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갈등을 일으키고 직원들에게도 종종 언어폭력을 행사하는 어르신이 계셨다. 여럿이 나서서 만류하거나 달래보았지만 막무가내였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그분이 바뀌기 시작했다. 소란을 피우는 빈도가 크게 줄어들었고, 정도도 많이 약해졌다. 웬일인가 하고 살펴보았더니, 어르신은 얼마 전부터 복지관의 연극 동아리에 가입해서 활동하고 있었다고 한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즐거움에 몰입하면서 언행이 부드러워진 것이다.
-
인생+ 손주는 누구인가 얼마 전 딸아이가 임신 소식을 알려왔다. 기다렸던 일이라 기쁘지만 얼떨떨하기도 하다. 이제 할아버지가 되면 노년에 확실하게 입문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돌봄의 무게가 가중되는 것이 더 구체적인 삶의 변화로 다가올 듯하다. 손주를 키우는 일은 큰 즐거움이지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면 고역이 된다. 주변에는 조부모가 ‘독박’으로 육아를 하면서 사실상 ‘조손 가정’으로 지내는 집이 적지 않고, 그 경우 양육 방식을 둘러싸고 아이 부모와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조카가 자기 친구의 경험이라면서 들려준 이야기인데, 친정어머니에게 맡긴 아이의 언어 발달이 너무 늦었다고 한다. 웬일인가 들여다보니, 어머니는 식사와 기저귀 갈이 등 최소한의 보살핌만 해주었을 뿐 눈을 맞추며 놀아주는 상호작용은 거의 하지 않았다. 본인이 스마트폰에 빠져 아이를 방치했던 것이다. 딸은 문제를 제기하지만 어머니는 아이는 내버려두어도 저절로 큰다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사실 예전에는 그러했다. 집안에 형제자매가 많았고, 동네 아이들과 어울렸기에 자연스럽게 말을 배우고 사회성도 익혔다.
-
인생+ 마을과 사회적 면역력 코로나19의 피해는 광범위했지만 요양원이 특히 취약했다. 전염병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시대에 노인들이 격리된 공간에서 집단생활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너무 쇠약해져 집에서 돌보기 어려운 경우 시설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입소 시기를 최대한 늦추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자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건강 나이를 늘려야 하는데, 그 기반은 역시 마을이 될 것이다. 집이나 동네에서 계속 생활하면서 나이 들어가는 ‘지역사회 계속 거주’(Aging in place)를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할 때가 왔다.
-
인생+ 구슬이 서말이라도 물리학자 새뮤얼 아브스만이 쓴 <지식의 반감기>라는 책이 있다. 지식이나 사실의 유통기한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붙여진 제목이다. 방사성 동위원소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시간처럼, 기존 지식의 절반이 오류로 드러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간경변과 간염에 관한 의학 논문들을 분석해보니, 45년이 지나자 절반이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다. 지식의 반감기는 분야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10년 안팎으로, 그 주기로 업데이트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처지게 되는 셈이다. 그런데 이것은 연구자들이 집중적으로 작업하고 검증해서 내놓는 전문지식에 해당하는 이야기다. 시중에 떠도는 소문이나 인터넷에서 전달되는 지식의 수명은 훨씬 더 짧을 듯하다. 매일 엄청난 양으로 쇄도하는 정보의 대부분은 하루만 지나도 가치를 상실할 만큼 휘발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질 언론사나 일부 유튜버들이 클릭 장사를 하기 위해 퍼뜨리는 과장된 기사나 가짜뉴스는 유통기한 자체가 무의미하다. 사이비 지식에 현혹되지 않으려면 냉정한 팩트체크의 여과 장치가 필요하다.
-
인생+ 말년의 은총 얼마 전 오랫동안 교분을 나눠온 후배가 세상을 떠났다. 상(喪)을 치른 지 한 달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데, 유난히 더 그렇게 느껴지는 까닭이 있다. 카톡의 대화 상대 가운데 첫 사별이기 때문이다. 가족이 계정을 없앤다 해도 그동안 오갔던 메시지는 내 폰에 고스란히 보관된다. 이제 대화를 나눌 수 없지만, 나는 차마 삭제할 수가 없다. 몸은 떠나갔어도, 마음속에서는 곧바로 결별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고인과의 대화방을 보존하는 이들이 많다. 20~30년 후 내 또래의 휴대폰을 상상해본다. 전화번호부에 통신이 종료된 이름들이 절반 이상이 될지도 모른다. 카톡방은 어떨까. 친구나 동문 모임처럼 신입 멤버가 없는 공간에서는 어느 시점부터 인원이 빠르게 줄어들어 마지막에 한 사람만 남게 될 것이다. 텅 빈 대화방에 저장된 메시지들을 바라보는 심경은 황량하리라. 아날로그의 세계에서는 망자가 서서히 잊히지만, 디지털의 세계에서는 있음과 없음이 0/1의 부호로 명확하게 구별되고 가시화된다.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