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를 벗으려면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

지난달 초에 개봉된 영화 <비상선언>은 항공 재난이라는 독특한 소재로 눈길을 끌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오픈하여 지금까지 롱런하고 있는 또 다른 ‘비상선언’이 있는데, 국민의힘이 연출하고 주연하는 비상대책위원회가 그것이다. 전방위적 경제난에 폭우까지 쏟아지던 비상사태에는 팔짱을 끼고 있다가, 당내의 힘겨루기에서 궁지에 몰리자 황급히 결성된 조직이다. 그런데 꼼수로 출범시킨 비대위는 거듭 혼선을 빚고 난맥상을 자초하면서 그 자체가 더 커다란 위기의 근원이 되어버렸다. 벗어나려고 몸부림칠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지는 형국이다.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

정치인들을 개인적으로 만나서 대화해보면 하나같이 똑똑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실제로 방송에 나와 대담이나 인터뷰하는 것을 들어보면 총명한 정치인이 생각보다 많다고 느껴진다. 그런데 그들이 무리를 이뤄서 벌이는 행동은 어리석음의 극치로 치닫기 일쑤다. 조직의 논리가 합리적 의견을 묵음 처리하고, 권력에 대한 욕망이 부조리한 처사를 묵인하기 때문이다. 대화와 교류의 시너지로 생각을 고양시키는 ‘집단 지성’이 아니라, 공동의 허상에 사로잡혀 어이없는 오류를 범하는 ‘집단 사고’에 빠지는 것이다. 그 저변에는 특정 세력을 절대 신봉하는 지지자들의 갈채가 있다.

정치 영역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실존적 불안이 가중되는 현대 사회에서 오롯이 개인으로만 살아가는 것은 너무 어렵다. 그래서 단체나 조직에 가입하고 여러 집회에 참석하면서 사회적 자아와 정체성을 확인한다. 학연·지연 등의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데 힘을 쏟고 관련된 모임에 열심을 내면서 외로움을 달랜다. 문제는 그러한 사회적 행위가 타인에 대한 지나친 의존으로 흐르고, 집단이나 조직을 가장 으뜸으로 여기는 집체주의에 빠지는 경우다. 거기에서 ‘나’는 없고, ‘우리’만 있다. 리더는 보이지 않고, 보스만 판을 친다. 그런 패거리 행태에 매몰될수록 삶은 비루해진다.

멋지게 나이 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좀 더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닐까. 어떻게? 소아병적 욕망을 덜어내면서 자애로운 품성을 가꾸고, 부족주의적 정서에 거리를 두면서 내밀한 세계를 다져가야 한다. 고독 속에서 마음의 심연을 탐구하는 즐거움, 황동규 시인이 ‘홀로움’이라고 부른 ‘환해진 외로움’을 음미할 수 있는 시공간이 넉넉해야 한다. 그러한 경지에서 타인들과 맺는 인연은 아집과 독단을 키우는 에고의 동맹이 아니라, 삶의 깊이와 넓이를 더해주는 우애의 만남이다. 이해관계와 뒷담화로 접착되는 야합이 아니라, 상호 연민과 덕담으로 연결되는 공동체다.

정치 무대에서 펼쳐지는 드라마는 우리의 자화상을 비춰보는 거울이 될 수 있다. 나는 지인들과 무엇을 공유하면서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가. 자칫하면 저열한 보호막에 안주하면서 더불어 퇴행할 수 있다. 미망의 굴레를 일깨워주며 동반 성장하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껍데기는 가라. 허세의 각질을 벗겨내고, 온전한 삶으로 나아가고 싶다. 그러려면 자기 안에 깃든 나약함과 두려움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각자의 그림자와 화해할 수 있도록 서로를 품어주어야 한다.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수용할 때, 새로운 생애로의 진입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겸손하면서도 줏대 있는 인격으로 성장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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