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만권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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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손길 국민의힘이 벌인 두 번째 쿠데타 2024년 12월3일은 경악의 밤이었다. 공포의 밤이었고, 울분의 밤이었다. 아침이 오면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누구에게 건넬 수 있을까, 근심에 찬 밤이었다. 윤석열이 너무도 뜬금없이, 위헌적이고 위법적인 계엄령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국회에 완전무장을 한 군인들이 헬기를 타고 들어와 난입했다. 이들은 707특수임무단, 제1공수여단, 수방사 특임대로, 국가를 위협하는 적에 맞서는 우리나라 최정예 부대였다. 이들이 국회의원들을 본회의장에서 끌어내고, 국회의장·야당 대표·여당 대표를 비롯해 주요 정치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뛰어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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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손길 긴 위기, 비상사태가 시작되었다 지난 7일 윤석열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 및 기자회견이 있었다. 대통령은 “모든 것은 저의 불찰이고, 부덕의 소치”이며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다는 말씀, 진심 어린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로 시작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사과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잘못한 게 있으면 딱 집어주시면 사과를 드리겠다”는 답변으로 끝났다. 이날의 사과를 대통령의 표현을 빌려 요약하자면, 이유는 정확히 모르지만 “어찌 됐든 사과한다”이다. 다음날 한국갤럽에서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대통령 국정 지지도는 17%였다. 일반적으로 이 정도의 지지율이면 대통령의 업무수행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전날 기자회견에서 “야구선수가 전광판 보고 운동하면 되겠나, 전광판 안 보고” 뛰겠다고 답변했다. 그런데 이게 적절한 비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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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손길 네포티즘의 시대 흔히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구분하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활동의 본질이 완전히 상반되기 때문이다. 우선 사적 활동의 본질은 ‘숨겨짐’이다. ‘사생활을 보장하라’는 말에 묻어나듯 이 영역에서 활동은 굳이 타인이 알 필요가 없다. 이 영역에서 우리 각자는 자신의 가치와 선택에 따라 삶을 영위하며 자신과 가족에게 필요한 것들, 특히 ‘부’를 축적하는 활동을 한다. 이 사적인 활동이 벌어지는 터전으로서 시장에선 ‘이기심’이 찬양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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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손길 ‘닫힌 사회’ 우려 키우는 신임 인권위원장 20세기 정치사상을 들여다보면 ‘냉전 자유주의’라는 흐름이 있다. 말 그대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이 대립하며 체제경쟁이 시작되자 이 여파가 만들어낸 자유주의 흐름이다. 그 시작을 대표하는 인물이 과학철학자 칼 포퍼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해, 1945년에 출간한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포퍼는 과학적 사고로 20세기 유럽을 지배한 사상인 ‘나치즘’과 ‘마르크시즘’을 향한 무자비한 비판에 나섰다. 여기에서 포퍼는 자유주의를 ‘열린 사회’로, 나치즘과 마르크시즘을 ‘닫힌 사회’로 규정했다. 열린 사회와 닫힌 사회의 차이는 명확했다. 열린 사회는 누구나 ‘이성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은 ‘오류 가능성’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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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손길 공화국이 위기에 빠졌다 “자세히 보면 지금도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만, 그때 제일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악’이 내놓고 ‘선’을 가장하는 것이었다. 악이 자선이 되고 희망이 되고 진실이 되고, 또 정의가 되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나오는 ‘작가의 말’ 중 한 대목이다. 1978년에 출간된 이 작품은 지금까지 거의 150만부가 나갔을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고전이 되어 청소년들에게까지 널리 읽히는 소설이다. 작가 조세희는 이 소설을 ‘유신시대’에 쓰기 시작했다. 조세희는 19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고도 작품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작가는 당선 소감에 자신이 깊은 세계로 가는 통로를 찾지 못하고 있다며, 이 상태가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어 불안한 마음을 털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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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손길 격노하는 대통령, 분개한 국민 ‘격노’(激怒), ‘몹시 분하고 노여운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라는 뜻이다. ‘격노’가 2024년 올해를 지배한 단어라도 될 기세다. 이 격분의 감정이 대한민국 대통령의 정서적인 상태를 상징하는 표현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난 4월에 열린 국민의힘 총선 패배에 관한 토론에서도 ‘뻑하면 대통령이 격노한다’는 말이 나왔다. 대통령의 격노는 다양한 수준에서 드러난다. 국민의힘에 한동훈 비대위가 들어설 당시 김기현 전 대표가 사퇴를 거부하자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보도, 한동훈 비대위가 들어선 이후엔 김건희 여사에 대한 특검을 총선 이후 조건부로 검토한다는 말이 나오자 이에 대해 격노했다는 보도, 심지어 방미 기간 중 블랙핑크 공연이 무산되자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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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손길 청탁금지법과 에코백 2016년 1월, 한 출판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김영란 전 대법관의 책이 곧 나오는데, 이 책의 출간 기념 북토크 사회를 맡아줄 수 없냐는 부탁이었다. 당시 정의에 관한 책을 쓰는 중이었고, 김 전 대법관이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 재직 당시 입안한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청탁금지법)을 한 꼭지로 다루고 있던 터라 요청을 수락했다. ‘청탁금지법’은 입법 과정 내내 이런저런 비판에 시달리고 있었다. 정치철학 전공자의 눈으로 볼 때, 이 비판들은 매우 놀라웠다. 이 비판들이 현대 정의론에서 쓰는 판단의 잣대인 효용, 권리, 미덕이란 세 가지 모두에서 쏟아져 나온, 일종의 종합선물세트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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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손길 돌봄 살인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반성하고 참회합니다. 반성하고 참회합니다. 반성하고 참회합니다. 반성하고 참회합니다. 반성하고 참회합니다. 반성하고 참회합니다.” 지난 5월3일 대구지방법원 법정에서 예순이 넘은 아버지가 토로한 절규에 가까운 참회였다. 도대체 아버지는 무슨 일을 저질렀기에 이토록 고통스러워했던 걸까? 아버지의 비공식적인 죄명은 ‘돌봄 살인’이었다. 아버지는 지적 장애가 있는 서른아홉 살 아들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장에 섰다. 1984년 아이가 이 세상에 온 이후 아버지는 직장도 그만두고 아이의 돌봄을 전담하다시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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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손길 총선 후에 묻는다, 정치란 무엇인가 22대 총선이 끝났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정치란 무엇인가?’ 돌아보면, 이 질문에 체계적으로 답한 최초의 인물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에게 정치란 공동체가 서로 다른 이해관계, 종교, 전통을 지닌 다양한 집단들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행하는 인간적 활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서로 다름’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을 조정하는 일을 두고 ‘정의’(justice)라고 부르며, 정치란 이런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라고, 인간이 그 어떤 동물보다 정교한 언어를 가지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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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손길 고르비와 메르켈 그리고 윤석열 1985년 5월,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에서 군중들의 엄청난 환호성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소련의 서기장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는 카메라 앞에서 서슴없이 군중들을 마주했다. 모여든 군중들은 몹시 놀란 얼굴로 고르바초프가 걷고 말하는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한 군중이 고르바초프에게 말했다. “당신은 국민과 가까이해야 합니다.” 고르바초프가 웃으며 답했다. “어떻게 이보다 더 가까이하라는 말인가요?” 그를 둘러싼 군중들이 모두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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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손길 오바마의 ‘경청’, 윤석열의 ‘경청’ 한 청년이 외친다. “행정명령을 발동해 1150만명에 이르는 모든 서류 미비 이민자의 추방을 멈춰주세요! 당신에겐 그럴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제 가족은 모두 흩어져 있습니다. 매일 같이 이민자의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지냅니다!” 그러자 연이어 청년들의 큰 외침이 따른다. “추방을 멈춰라! 추방을 멈춰라!” 2013년 11월25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이민개혁법 통과를 촉구하려는 연설을 시작하려던 와중에 벌어진 일이다. 대통령이 수차례 말하려 했지만 높아지는 외침은 끊이질 않았다. 이에 경호원이 제지에 나섰지만, 대통령이 오히려 말린다. “그만, 그만. 청년들이 여기 머물 수 있게 하세요.” 그러자 청중들은 박수로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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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권의 손길 재난을 대하는 권력의 예의 우리나라에서 큰 ‘사회적’ 재난이 일어나면 반복되는 일이 있다. ‘진상을 규명하라’는 끊임없는 요구와 이에 대한 권력의 외면이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이런 요구는 책임자에 대한 처벌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이어진다. 세월호 참사가 그랬고, 이태원 참사 역시 마찬가지다. ‘자연’이 일으키는 재난에 대해선 그 책임을 온전히 인간에게 지울 수 없다. 다만 좋은 국가일수록 이런 자연재난에 맞서는 인간이 자기 책임을 다하였는지를 면밀하게 따지고 책임을 묻는다. 자연재난과 달리 ‘사회적’ 재난은 그 책임이 온전히 인간에게 있다. 세월호 참사에서, 이태원 참사에서 자연은 그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우리 인간이 평소에 혹은 특정한 시기에 필요한 대책을 소홀히 해서 생겨난 비극이다. 그렇기에 이런 재난에서 제대로 책임을 지는 이가 없다는 건 그 국가가 혹은 권력이 그만큼 부패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