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비와 메르켈 그리고 윤석열

김민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메르켈처럼 하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주변의 관료주의 벽을 넘어
서민의 삶을 보아주었으면 한다

대통령이 ‘합리적 가격’ 반응 대신
‘지속 가능’을 물었다면 어땠을까

1985년 5월,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에서 군중들의 엄청난 환호성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소련의 서기장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는 카메라 앞에서 서슴없이 군중들을 마주했다.

모여든 군중들은 몹시 놀란 얼굴로 고르바초프가 걷고 말하는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한 군중이 고르바초프에게 말했다. “당신은 국민과 가까이해야 합니다.” 고르바초프가 웃으며 답했다. “어떻게 이보다 더 가까이하라는 말인가요?” 그를 둘러싼 군중들이 모두 활짝 웃었다.

그렇다면 왜 소련 군중들은 그의 모습에 이토록 놀라고 신기해했던 것일까? 그 이유는 고르바초프 이전 서기장들 중 누구도 준비된 대본 없이, 이렇게 비공식적으로 보통 사람들을 가까이서 만나고 연설하고 이야기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위 노동자의 나라, 인민의 나라에서 국가지도자가 평범한 사람들과 이렇게 격식 없이 만난 적이 없었다니. 대신 고르바초프 이전까지 국가지도자와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강력히 존재하고 있었던 건 만연한 ‘관료주의’였다. 특히 레오니트 브레즈네프(1964~1982)의 통치 이후엔 정기적인 관료들의 공직 순환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고르바초프가 소련 경제를 되살리려 실행한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재구조화)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변화를 거부하는 복지부동의 관료들과 당 내부의 저항에 부딪힌 상태였다. 고르바초프는 이런 상황에서 경제 개혁이 이루어지려면 민주적 개방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이를 레닌그라드에서 실행에 옮겼다.

이는 고르바초프 자신을 둘러싼 관료주의에서 벗어나 평범한 사람들에게 가겠다는, 폐쇄된 문을 부수고 소련을 외부에 개방하겠다는 명확한 메시지였다. 이 메시지는 ‘글라스노스트’(Glasnost, 개방)라는 정책으로 이어졌다,

이런 거창한 이야기를 다시 떠올린 이유는 ‘대파 한 단 875원’ 논란 때문이다. 지난 18일 윤석열 대통령은 서울 서초구 하나로마트 양재점을 방문했다. 이때 대파에 붙은 가격이 ‘875원’이었고, 대통령은 이 가격을 두고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당연히 이 언급은 논란이 되었다. 일상에서 서민들이 주변 마트에서 구입하는 가격과 격차가 컸기 때문이다.

지난 23일 내가 동네 마트에서 확인한, 여섯 뿌리로 이뤄진 대파 한 단의 가격은 5960원이었다. 닷새 전 대통령이 집어든, 합리적인 대파 한 단의 값으로는 우리 동네 마트에선 한 뿌리조차 살 수 없는 셈이다. 윤 대통령이 민생점검에서 확인한 대파 가격은 어쩌면 그날 대한민국 마트에서 가장 싼 가격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윤 대통령도 “여기 지금 하나로마트는 이렇게 하는데 다른 데는 이렇게 싸게 사기 어려울 거 아니에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5대 대형마트 다 합니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언론 보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당일에도 양재점 주변에서 1000원 미만 가격으로 대파 한 단을 판매한 곳은 없었다.

윤 대통령과 송 장관의 대화는 정치지도자와 관료 사이에 놓인 긴장 관계를 잘 드러낸다. 원래 관료들이 하는 일의 핵심은 ‘관리’이다. 고위공직자일수록 자신이 ‘관리’를 잘하고 있다는 것을 정치지도자에게 보임으로써 능력을 인정받는다.

이날도 대통령과 동행한 관료들 입장에선 자신들의 관리 능력을 보이는 자리였다. 왜 이날, ‘우연히도’ 대통령이 대파 한 단 가격이 가장 싼 마트에 민생점검을 나가게 되었는지 쉽게 짐작해볼 수 있다. 정치지도자란 이런 관료주의의 속성을 파악하고 대응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소개된 바 있는 앙겔라 메르켈의 장보기는 함께 볼만하다. 메르켈은 우리로 치면 정부청사 근처의 오래된 슈퍼에서 1993년부터, 이후 총리 재임 시(2005~2021)에도 일주일에 한 번꼴로 장을 봤다고 한다. 이를 보도한 기자에 따르면, “오렌지·루콜라(샐러드용 채소)·가지·양배추·로션·주방용 타월·크림치즈·레드와인·초콜릿·밀가루·토마토소스” 같은 일상의 물품이 카트에 담겨 있었다. 총리가 이런 일상을 지속하는 곳에서 ‘잠깐’의 전시용 관료주의가 통할 수 있을까?

물론, 메르켈처럼 하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자신을 둘러싼 관료주의의 벽을 넘어 서민들의 삶을 보아주었으면 한다는 바람이다. 예를 들어, 그날 대통령이 ‘합리적’이란 반응 대신 ‘이 가격이 지속 가능하냐’고 물었다면 어땠을까?

김민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김민권 경희대 학술연구교수·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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