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미나
<아무튼, 잠수>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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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정치 참여는 공허함에 특효약이다 사회 격변 시기에 그 변화에 동참할 기회를 갖는 일은 행운이다. 대학 내에서 존경하던 스승에게 연달아 성폭력을 당하기 전까지 나는 그 행운을 누리지 못하고 살았다. 반복되는 성폭력은 모범생으로 지내온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고 종국에는 거리에서 소리치는 페미니스트 활동가가 되게 했다. 이후로 낯선 사람들로부터 공격과 비아냥을 받으며 지냈다. 당초 이 일들은 내 인생에 일어난 비극처럼 보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일들이 인생에 어떤 영향을 준 것인지 분명해졌다. 스승을 상대로 한 몇년간의 재판은 압도적 권위를 가진 존재를 대상으로 싸워 이길 수도 있음을 알려줬다. 내가 그를 두려워했던 것처럼 그도 날 두려워할 수 있었다. 난 내 안의 힘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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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학살이 이루어지는 동안 얼마 전부터 나는 하나의 서사, 거대한 서사, 선형적 서사로 이뤄진 글을 폭력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매끈하고 납득이 되는 서사일수록 다른 가능한 버전의 현실을 침묵시키기 때문이다. 성공적이며 심지어 윤리적으로 여겨지는 하나의 서사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제모습을 바꾸어 다른 서사를 압제하는 독재자가 된다. 그래서인지 글을 쓰려고 앉아 있으면 “한편”이란 부사만 떠오른다. 이를테면, 레바논 친구에게 편지가 온다. “상황은 참담하고 지금까지는 전망도 희망도 없어. 정말 비참해. 슬픔, 두려움, 분노… 여러 감정을 통과하고 있어. 이스라엘군은 도시에 폭격을 가하고 민간인을 전혀 존중하지 않고 있어. 그들의 정교한 살상 기계들은 쉬지 않고 사람들을 죽이고 파괴하는 데 사용되고 있어. 그들은 인류를 향한 범죄를 저지르는 최악의 범죄자고, 세계 대부분이 그걸 동의해주고 있어. 이건 문명의 수치이자 패배이고, 인간성의 패배야.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고 아름다운 순간들을 붙들려고 노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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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세상은 왜 그토록 아름다우며 동시에 폭력적인가 1970년대 후반 칼 세이건을 비롯한 몇몇 천문학자들은 성간 우주 탐사선 보이저호의 발사를 앞두고 두고두고 회자될 사랑스러운 아이디어 하나를 떠올린다. 그것은 외계인에게 지구를 소개하는 금속 레코드판을 별과 별 사이를 항해할 보이저호에 싣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골든 레코드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레코드판에는 지구 사진과 인사말, 지구의 소리, 그리고 지구상 가장 아름답다고 선별된 일련의 음악이 실려 있다. 책 <지구의 속삭임>은 그 과정을 기록했는데 읽다보면 이 엉뚱하고도 순진한 프로젝트가 사람들을 얼마나 몰두하게 만들었는지가 그대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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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내가 웅덩이를 관찰하고 있을 때 70년 전 쓰여진 과학책 <바다의 가장자리>를 읽었다. 생태학이라는 말이 아직 낯선 시기, 레이첼 카슨은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을 변화시킨 위대한 과학 저술가였다. <침묵의 봄>이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지만 해양생물학자로서 그는 바다 3부작을 저술하며 작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바다의 가장자리>는 그가 쓴 바다 3부작의 마지막 책으로,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경계인 해안을 다룬다. 책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암석 해안, 모래 해안, 산호 해안. 카슨은 각각의 해안이 지질학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곳에서 살아가는 생물은 무엇인지를 섬세하고 성실한 시선으로 소개한다. 책 곳곳에는 펜으로 그린 흑백의 삽화가 삽입되어 있었고 1950년대 독자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마음이 담긴 생물의 분류도 부록으로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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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기후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 타지 생활이 오래 지속되면서 유난히 예민해진 감각이 있는데 바로 청각이다. 내가 이곳에서 말 없는 사람이기 때문일까 나처럼 말 없는 존재의 소리가 전보다 크게 들린다. 가만히 듣고보니 세상이 소리로 꽉 차 있었다. 특히 인간이 만들어낸 소음이 줄어드는 곳에서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들의 소리로. 비둘기, 참새, 지빠귀, 까치 등 제각각 노랫소리가 다른 새들은 이른 아침에 가장 크게 합창한다. 집 근처 커다란 단풍버즘나무는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수십미터에 걸쳐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를 다른 높낮이로 들려주는데 듣고 있으면 잠이 솔솔 온다. 나뭇잎이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와 풀잎이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가 서로 다르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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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당신의 삶을 내 예술작품으로 만들어도 될까요 1993년 어느 가을날 바하칼리포르니아의 판자촌에서 두 여성이 만났다. 휴가를 보내던 미국인 사진작가 애니 아펠 그리고 벽돌공 남편에게 점심식사를 가져다주던 만삭의 마리아였다. 애니는 마리아에게 사진을 몇장 찍어도 되냐고 물었고 마리아는 좋다고 답했다. 애니는 휴가에서 돌아온 뒤에도 멕시코에서 만난 한 가족이 계속 떠올랐고 다시 돌아간다. 마리아를 찍은 사람은 많았지만 돌아온 사람은 애니가 처음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애니의 멕시코 프로젝트는 계속해서 늘어난다. 아무리 찍어도 마리아의 진실을 담았다고 확신할 수가 없어서였다. 마리아가 벽돌공 남편과 헤어지고, 마리아의 아이가 아이를 낳고, 또 그 아이가 미국으로 가며… 세월이 흐른다. 애니는 마리아의 이야기를 25년간 2만3000프레임으로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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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자유로운 몸의 문화 독일에 와서 신기했던 것 중에 하나는 나체가 그 자체로 성적인 함의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우나가 남녀공용으로 운영되고 수영장·탈의실 등은 성별로 공간이 나뉘어 있지 않아 모두 섞여 옷을 갈아입는다. 이것은 ‘자유로운 몸의 문화’를 뜻하는, 100년의 역사를 가진 독일의 나체주의 운동 에프카카(FKK; Frei-korper-kultur)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19세기 말 레벤스레폼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된 FKK는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자연과 멀어진 사람들이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벗은 몸으로 만나 자연 속에서 휴식을 취하자는 반권위주의 운동이었다. 아무래도 벌거벗은 몸으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뽐내기는 어려울 테니까. 지금도 독일 전역에는 국가가 지정한 FKK 해변과 공원, 사우나 등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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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고사리처럼 쓰기 우리집 앞마당에는 요즘 고사리가 자라는데 겨우내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땅속에 잠들어 있던 고사리가 날이 따듯해지자 기지개를 켜듯 순이 올라오더니 한 줌 햇빛으로도 매일 무서운 속도로 잎을 펼친다. 지구 역사상 가장 오래된 식물 중 하나인 이 양치식물은 수학이나 기하학을 배운 것도 아닌데 잎 모양이 완벽한 프랙털 구조다. 고사리 잎 전체 모양은 잎사귀 하나하나의 모양과 매우 유사하고, 큰 잎에서 작은 잎사귀로 갈수록 같은 모양이 반복된다. 무한히 반복되는 프랙털 구조는 줄기가 갈라지고, 또 그 갈래가 갈라지는 아주 단순한 규칙에 의해 만들어진다. 고사리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끊임없이 반응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속도대로 자기 모습을 갖춰간다. 고사리는 아름답고 완전하다. 그럴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데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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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군인이면서 어머니인 여자가 전쟁 영화 주인공일 때 다큐멘터리 영화 <Darvazeye Royaha>(페르시아어로 ‘꿈의 문’이라는 뜻)는 1989년생 이란 태생의 쿠르드족 여성 감독인 네긴 아마디가 시리아 북부 지역에서 ISIS에 대항하여 싸우는, 모두 여성으로 이루어진 쿠르드족 민병대에 들어가며 시작한다. 쿠르드족은 누구인가. 성경에 등장하는 메데인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뿌리 깊은 민족이면서 3000만명이 흩어져 사는 세계 최대의 나라 없는 민족. 쿠르드족은 터키, 이라크, 이란 등 주로 국경을 따라 이어지는 자그로스산맥 지역에 산다. 쿠르드족이 머무는 지역, 쿠르디스탄은 30만㎢로 한반도의 1.5배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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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공감의 반경 안다고 생각하지만 알지 못하는 것들. 상투어가 되어버린 말들. 당연하게 받아 누려 온 역사들. 이것들이 낯설고 새롭게 다가와 마음을 때리는 일은 언제, 왜 일어나는 것일까? 고백하자면 나는 한국을 떠난 사람들을 향한 약간의 미움이 있었다. 나를 버리고 더 좋은 세상으로 떠난 당신…. 막상 나가보니 실상은 달랐다. 오래전 하와이로 떠난 이민자는 독립운동의 자금줄이었고 광부로 또 간호사로 독일에 도착한 이들은 민주화 운동을 다방면으로 도운 사람들이었다. 국내에 있을 때는 해외로 떠난 사람들이 사라져버리는 것만 같았는데 밖에서 보니 이들의 발자취가 형형히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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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세상은 입맞춤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다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유독 개운한 책이다. 시간에 관한 우리의 직관을 하나씩 무너뜨려 종국에는 극단적으로 황량하고도 무한한 가능성으로 빛나는 공(void)의 풍경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이런 글을 읽다보면 일상을 살아가며 비대해진 자아는 줄어들어 티끌로 느껴지고 이내 상쾌해진다. 인간이 시간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시간은 유일하지 않다. 장소와 속도에 따라 다르게 흐른다. 둘째, 방향도 정해져 있지 않다. 사물의 미시적 상태를 관찰하면 과거와 미래 차이가 사라진다. 셋째, 광활한 우주에 ‘현재’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없다. 넷째, 시간은 독립적이지 않다. 시간은 우주의 다른 실체들과 상호작용할 때만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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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나보다 더 힘드신 분들을 위한 배려”라는 말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어쩐지 나는 이곳 어디서도 소속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첫 책을 내고 난 뒤에 세계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떠돌아다녔고 처음으로 강력한 연결감을 느낀 곳은 독일 베를린이었다. 그곳엔 각자의 이유로 모국으로부터 망명한 많은 이주민들이 있었다. 독일이 저지른 가해의 역사를 스스로 들여다보고 기억하느라 다소 분열적인 느낌마저 주는 곳이었다. 나는 종종 추방당했다고 느낀다. 베를린이 아니라 서울에 있을 때 그 감각은 뚜렷하다. 같은 언어와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데도 이곳은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를 환영하지도 내가 성장하기를 바라지도 않으며 내가 나 자신으로 존재하려 할수록 있는 힘을 다해 다른 방향으로 밀어내는 것만 같았다.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이 나 말고도 많다는 것을, 높은 자살률과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질환 유병률이 말해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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