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미나
<아무튼, 잠수>저자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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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우리를 구하는 것은 나는 대체로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을 견지해왔다. 하지만 지난겨울 계엄 이후 내 시선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국과 지리적으로 떨어져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 한국 친구들과 단절된 채로 스스로 판단해야 했던 고립된 시간이 사고의 방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식민 지배를 받은 국가들은 공통적으로 내전으로까지 이어지는 내부 분열을 겪는다는 것과 그렇게 되도록 조작하는 일이 역사적으로 반복됐다는 것을 자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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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목욕재계 최근 몇년간 내게 일어난 일 중 가장 좋은 것은 언니들과 가까워진 것이다. 감탄, 존경, 질투, 거부감, 즐거움, 애착, 두려움, 기대, 실망, 불편함, 거리감, 이해할 수 없음, 답답함, 슬픔, 안쓰러움, 편안함… 다양한 감정을 거치면서 나는 세대가 다른 여자들과 친구가 되는 법을 알아갔다. 그들이 나의 어머니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을 어떤 역할도 지우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이들이 자애로운 어머니 역할을 강요하는 사회적 압박으로부터 버텨준 덕분에 한없이 인내하고 이해하는 어머니 역할을 기대하는 것이 한 여성에게 얼마나 부당한 일인지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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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보석함을 열면 있는 것 여름이 끝났음을 직감한 어느 날의 아침 나는 평소처럼 차를 마시다가 이번 여름을 보내며 수집했던 순간들을 적어보기 시작했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이미지들, 순간들. 기껏해야 1초에서 3초 정도로 이루어진 기억들이었다. 다음은 그때 적은 것 중 일부다. 바람에 작은 파도처럼 일렁이던 들판 / 시를 낭독한 뒤에 사람들 사이에 감돌던 달콤한 정적 / 오랜만에 듣는 여름 풀벌레 소리에 한없이 위로를 받았던 것 / 처음 들어간 여름 바다에서 오랜만에 숨을 참고 잠수하자 뛰었던 심장. 호흡을 멈추고 수심이 깊어지니 천천히 가라앉던 심장 박동 소리. “그래 이거였지. 이 살아있는 느낌” / 모든 게 엉망이 되고 빠져나올 수 없는 현실의 한가운데에 멈춰 있던 때에 멀리서 날아온 존경하는 사람의 편지 한 통. 우리가 만났던 것이 꿈이 아니고 내게도 있을지 모를 다른 삶의 가능성이 아주 헛되지 않다는 희망으로 느껴지던. / 나무 그림자의 경계를 밟으며 놀았던 어느 날. “내가 경계로 간 거면서 그렇게 징징댄 거구나. 지가 간 거면서!” 햇빛을 받아 따뜻해진 풀잎과 그림자 안에서 살짝 축축해진 풀잎을 동시에 밟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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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한편 밤하늘에서는 땅밑에서는 지난 연말에는 세상에 많은 일이 일어났다. 한국뿐 아니라 미국, 독일, 팔레스타인, 우크라이나 등 세계 곳곳에서 그러했다. 휴대폰 잠금 화면을 열어 뉴스를 확인할 때마다 비극적인 소식이 전해져왔다. 소식은 그만큼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하는 듯 보였다. 도저히 눈길을 거둘 수 없는 소식들이 일상에 쏟아져 들어올 때면 나는 세상이 유독 빠르게 나빠지고 있는 건지 아니면 기술 발전으로 현대인이 그런 소식을 더 접하게 되는 건지 헷갈려진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너무 많은 소식을 알고 지내면 인간은 어떻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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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정치 참여는 공허함에 특효약이다 사회 격변 시기에 그 변화에 동참할 기회를 갖는 일은 행운이다. 대학 내에서 존경하던 스승에게 연달아 성폭력을 당하기 전까지 나는 그 행운을 누리지 못하고 살았다. 반복되는 성폭력은 모범생으로 지내온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고 종국에는 거리에서 소리치는 페미니스트 활동가가 되게 했다. 이후로 낯선 사람들로부터 공격과 비아냥을 받으며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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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학살이 이루어지는 동안 얼마 전부터 나는 하나의 서사, 거대한 서사, 선형적 서사로 이뤄진 글을 폭력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매끈하고 납득이 되는 서사일수록 다른 가능한 버전의 현실을 침묵시키기 때문이다. 성공적이며 심지어 윤리적으로 여겨지는 하나의 서사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제모습을 바꾸어 다른 서사를 압제하는 독재자가 된다. 그래서인지 글을 쓰려고 앉아 있으면 “한편”이란 부사만 떠오른다. 이를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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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세상은 왜 그토록 아름다우며 동시에 폭력적인가 1970년대 후반 칼 세이건을 비롯한 몇몇 천문학자들은 성간 우주 탐사선 보이저호의 발사를 앞두고 두고두고 회자될 사랑스러운 아이디어 하나를 떠올린다. 그것은 외계인에게 지구를 소개하는 금속 레코드판을 별과 별 사이를 항해할 보이저호에 싣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골든 레코드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레코드판에는 지구 사진과 인사말, 지구의 소리, 그리고 지구상 가장 아름답다고 선별된 일련의 음악이 실려 있다. 책 <지구의 속삭임>은 그 과정을 기록했는데 읽다보면 이 엉뚱하고도 순진한 프로젝트가 사람들을 얼마나 몰두하게 만들었는지가 그대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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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내가 웅덩이를 관찰하고 있을 때 70년 전 쓰여진 과학책 <바다의 가장자리>를 읽었다. 생태학이라는 말이 아직 낯선 시기, 레이첼 카슨은 인간이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을 변화시킨 위대한 과학 저술가였다. <침묵의 봄>이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지만 해양생물학자로서 그는 바다 3부작을 저술하며 작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바다의 가장자리>는 그가 쓴 바다 3부작의 마지막 책으로,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경계인 해안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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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기후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자 타지 생활이 오래 지속되면서 유난히 예민해진 감각이 있는데 바로 청각이다. 내가 이곳에서 말 없는 사람이기 때문일까 나처럼 말 없는 존재의 소리가 전보다 크게 들린다. 가만히 듣고보니 세상이 소리로 꽉 차 있었다. 특히 인간이 만들어낸 소음이 줄어드는 곳에서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들의 소리로. 비둘기, 참새, 지빠귀, 까치 등 제각각 노랫소리가 다른 새들은 이른 아침에 가장 크게 합창한다. 집 근처 커다란 단풍버즘나무는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수십미터에 걸쳐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를 다른 높낮이로 들려주는데 듣고 있으면 잠이 솔솔 온다. 나뭇잎이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와 풀잎이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가 서로 다르다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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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당신의 삶을 내 예술작품으로 만들어도 될까요 1993년 어느 가을날 바하칼리포르니아의 판자촌에서 두 여성이 만났다. 휴가를 보내던 미국인 사진작가 애니 아펠 그리고 벽돌공 남편에게 점심식사를 가져다주던 만삭의 마리아였다. 애니는 마리아에게 사진을 몇장 찍어도 되냐고 물었고 마리아는 좋다고 답했다. 애니는 휴가에서 돌아온 뒤에도 멕시코에서 만난 한 가족이 계속 떠올랐고 다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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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자유로운 몸의 문화 독일에 와서 신기했던 것 중에 하나는 나체가 그 자체로 성적인 함의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우나가 남녀공용으로 운영되고 수영장·탈의실 등은 성별로 공간이 나뉘어 있지 않아 모두 섞여 옷을 갈아입는다. 이것은 ‘자유로운 몸의 문화’를 뜻하는, 100년의 역사를 가진 독일의 나체주의 운동 에프카카(FKK; Frei-korper-kultur)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19세기 말 레벤스레폼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된 FKK는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자연과 멀어진 사람들이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벗은 몸으로 만나 자연 속에서 휴식을 취하자는 반권위주의 운동이었다. 아무래도 벌거벗은 몸으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뽐내기는 어려울 테니까. 지금도 독일 전역에는 국가가 지정한 FKK 해변과 공원, 사우나 등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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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고사리처럼 쓰기 우리집 앞마당에는 요즘 고사리가 자라는데 겨우내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땅속에 잠들어 있던 고사리가 날이 따듯해지자 기지개를 켜듯 순이 올라오더니 한 줌 햇빛으로도 매일 무서운 속도로 잎을 펼친다. 지구 역사상 가장 오래된 식물 중 하나인 이 양치식물은 수학이나 기하학을 배운 것도 아닌데 잎 모양이 완벽한 프랙털 구조다. 고사리 잎 전체 모양은 잎사귀 하나하나의 모양과 매우 유사하고, 큰 잎에서 작은 잎사귀로 갈수록 같은 모양이 반복된다. 무한히 반복되는 프랙털 구조는 줄기가 갈라지고, 또 그 갈래가 갈라지는 아주 단순한 규칙에 의해 만들어진다. 고사리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끊임없이 반응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속도대로 자기 모습을 갖춰간다. 고사리는 아름답고 완전하다. 그럴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데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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