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반경

하미나 <아무튼, 잠수> 저자

안다고 생각하지만 알지 못하는 것들. 상투어가 되어버린 말들. 당연하게 받아 누려 온 역사들. 이것들이 낯설고 새롭게 다가와 마음을 때리는 일은 언제, 왜 일어나는 것일까?

고백하자면 나는 한국을 떠난 사람들을 향한 약간의 미움이 있었다. 나를 버리고 더 좋은 세상으로 떠난 당신…. 막상 나가보니 실상은 달랐다. 오래전 하와이로 떠난 이민자는 독립운동의 자금줄이었고 광부로 또 간호사로 독일에 도착한 이들은 민주화 운동을 다방면으로 도운 사람들이었다. 국내에 있을 때는 해외로 떠난 사람들이 사라져버리는 것만 같았는데 밖에서 보니 이들의 발자취가 형형히 빛난다.

최돈미 시인이 그렇다. 그를 처음 본 것은 작년 3월 베를린에서였다. 비무장지대(DMZ)를 소재로 한 그의 책 <DMZ 콜로니>가 독일어로 번역되어 이를 소개하는 행사였다. 최돈미 시인은 1972년 당시 10세의 나이로 한국을 떠났는데 기자였던 아버지가 당시 시대적 상황에 신변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김혜순 시인의 시를 번역해 영어권 독자에 소개해왔다. 그가 번역한 김혜순 시인의 <날개환상통>은 올해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DMZ 콜로니>는 2020년 전미도서상을 수상했다. 그는 스스로 “추방된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추방당한 사람. 다른 언어나 문화로 들어가보려 노력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 이들 덕분에 나는 세계를 또 다른 관점에서 볼 기회를 얻는다.

삼일절에는 영어로 번역된 3·1 독립선언서를 레바논 친구와 나눴다. 삶의 경로에서 레바논 내전을 그대로 통과하고 현재는 베를린에 머무는, 모국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희망이 없다”고 반복해서 말하던 친구였다. 독립선언서에는 일제강점기 한복판에서 스스로 독립을 선언한, 총칼 앞에서도 비폭력 평화운동을 한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친구는 선언문이 지금의 세계와, 또 자신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고 했다. 실제로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 인도와 이집트, 튀르키예 등에 영향을 주었다.

3월8일 베를린에서 여성의날을 맞아 1만여명이 거리로 모인 시위 역시 초국가적이었다. 시위를 주최한 국제 페미니스트 동맹의 구성원은 다양하다. 정작 독일인은 소수이고, 각 국가를 대변하는 단체가 있는데 국가와 상관없이 로힝야 난민과 쿠르드족처럼 난민과 소수민족을 대변하는 단체도 있다. 한국 협회 산하 기관인 액션 그룹 ‘위안부’(AG ‘Trostfrauen’) 역시 한국뿐 아니라 독일, 일본, 콩고, 필리핀 등의 구성원과 함께한다.

사람들이 들고온 팻말에는 이런 문구들이 적혀 있었다. “모두가 자유로울 때까지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팔레스타인 여성 곁에 서는 중국 페미니스트들” “과거, 현재, 그리고 언제나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아시안들” “우리 몸에서 손 떼, 우리 땅에서 손 떼” “가자에서 2만5000명의 여자와 아이들이 죽었다. 분노는 어디에 있는가?”

내게 가장 낯선 행렬은 라틴 아메리카 여성들이 모인 행렬이었다. 팻말에 붙은 이름들은 전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찾아보니 많은 수가 환경, 인권, 평화를 위해 싸우다 암살당한 여성 활동가였다. 브라질의 인권 운동가 마리엘 프랑코, 온두라스의 환경 운동가 베르타 카세레스, 과테말라의 여권운동가 리고베르타 멘추, 페루의 환경운동가 막시마 아쿠냐….

한국어로 쓰인 적이 많지 않았을 이름들. 이러한 이름을 배워가며 나는 겸허해진다. 누군가는 다음에 올 사람을 위해 전 생애를 걸고 싸운다. 그걸 알아차릴 때마다 세상은 증오뿐 아니라 어쩌면 더 큰 사랑으로 세워졌음을 배운다.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이 흐름 안에 있으며, 이 흐름은 국경을 넘어 이어진다. 그걸 기억하자면 누구도 어떤 상황에서도 감히 혼자라고 말할 수 없을 듯하다.

하미나 <아무튼, 잠수> 저자

하미나 <아무튼, 잠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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