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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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의 선물 김치 한 통, 쌀 한 부대 아버지는 자신의 여러 친구를 유산으로 남겼다. 차라리 돈이나 집을 남길 일이지, 라고 비죽거렸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친구들이 아버지 가고 난 뒤 엄마와 나를 자꾸만 찾아왔고, 안 친한 사람들이 자꾸 찾아오니 불편한 마음으로 인사를 나눴다. 그런 세월이 십사 년, 이제는 아버지의 친구들이 내 친구가 되었다. 곡성에서 농사짓는 한 아저씨는 아버지보다 스물일곱 살이나 어리다. 그런데도 친구로 자주 어울렸다. 내가 서울에서 내 인생을 사는 동안 고향에 있는 부모님은 나날이 초라하고 쓸쓸하게 늙어가는 중이었다. 그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늘 그렇듯 강하게 잘살고 있으리라 믿었다. 그 무심한 딸 대신 곡성 아저씨는 걸핏하면 아버지를 찾아왔다. 아버지는 아파트 경비로 일하고 있거나 사촌의 밤밭을 빌려 밤농사를 짓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벌이가 변변치 않기는 매한가지, 아저씨는 틈만 나면 구례로 달려와 아버지에게 소내장탕이나 국밥에 소주를 대접했다. 갚을 길도 없으면서 아버지는 무람없이 잘도 얻어먹었다. 부모님이 잠시 서울로 옮겼을 때 구례에서 서울까지 이삿짐을 옮긴 것도 아저씨였고, 늘그막에 다시 구례로 돌아왔을 때 역시 아저씨가 이사를 도맡았다. 변변치 않은 딸자식이 난생처음 취직해서 원주로 이사할 때 아버지는 호기롭게 외쳤다. -
정지아의 할매 열전 나의 마지막 할매 1976년 12월, 한강이 꽁꽁 얼어붙었던 혹독한 겨울에 그 할매를 처음 만났다. 만난 곳은 종암동 어느 한옥이었지만 그 할매는 천생 구례 할매였다. 나무 대문을 밀고 들어섰을 때 한복 차림의 할매는 개조해서 미닫이문을 단 마루에 한쪽 다리를 세운 채 앉아 있었다. 할매는 한달음에 시멘트 마당으로 달려왔다. 아무 말도 없이 내 어머니의 등을 쓸어내리던 할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난생처음 겪는 서울의 추위에 잔뜩 움츠린 채였다. 버짐 핀 얼굴이 허옇게 질려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내 손을 잡아끈 할매는 마룻바닥을 일일이 손으로 더듬더니 제일 따뜻한 자리에 나를 앉혔다. 할매는 어머니 등을 쓸던 거친 손으로 이번에는 내 머리를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
정지아의 할매 열전 고상한 욕쟁이 할매 아랫마을 욕쟁이 할매는 남원 양반가 출신이었다. 그런 집안에서 왜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보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가난보다 양반 족보가 더 중요했겠지. 남원떡이라 불린 할매는 시집온 뒤로 죽자고 고생만 했다. 재산이라고는 지픈(깊은) 논 - 지픈 논은 비가 조금만 와도 잠기기 일쑤였다 - 두 마지기에 산기슭의 밭뿐이었다. 자식은 줄줄이 일곱이나 낳았는데 어쩌자고 남편은 빨갱이가 되어 산으로 갔다. 여순사건 뒤 집에서 쫓겨난 할매는 좀 큰 자식들은 친정으로 보내고 막둥이만 들쳐업은 채 산에서 일 년을 보냈다. 다람쥐가 숨겨놓은 밤을 훔쳐먹으며 겨울을 났다던가. -
정지아의 할매 열전 엉덩이로 살아낸 세상 오래전 우리 윗마을에 앉은뱅이 아짐이 살았다. 할매가 되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오래다. 아짐이 언제 어떤 사연으로 앉은뱅이가 되었는지는 모른다. 아짐은 내가 기억하는 한 처음부터 앉은뱅이였다. 아짐의 남편은 좌익을 도운 죄로 짧은 감옥살이를 했다. 감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자리보전하고 누워만 있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
정지아의 할매 열전 베락 맞아 죽은 놈 백평할매 고향은 남원이다. 남원 어느 골 이름이 백평이었나 보다. 그래 백평떡이었는데 하필이면 푸둥푸둥 인심 좋게 생겼더랬다. 백평할매 시댁은 난리통에 아작이 났다. 시어른 넷 중에 셋이 좌익이었는데 두 사람은 산에서 죽고, 자수한 한 사람은 어느 날 토벌대가 앞장을 서라고 했다. 한때는 동지였던 자들을 토벌대 끌고 제 발로 찾아가는 길이었다. 그 참담한 심정의 사람을 토벌대가 등 뒤에서 쏴 죽였다. -
정지아의 할매 열전 가출 전문 재실 할매 재실 할매는 내 고향 반내골보다 더 깊은 산중, 집이라곤 고작 세 채뿐인 마을에 살았다. 읍내 술집 여자와 딴살림을 차렸다는 남편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명절에나 잠깐 얼굴을 보였고 그마저도 차츰 횟수가 줄어 어느 순간부터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첩과 멀리 대처로 나갔다는 소문만 돌았다. 첩에게 홀린 남편은 생활비도 주지 않는 눈치였다. -
정지아의 할매 열전 작고 작은, 나의 째깐이 할매 오늘은 내 고향 마을에 뜨내기로 들어와 잠깐 살다 떠난 째깐이 할매 이야기다. 한 4~5년 살다 갔나?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데리고 빈 몸으로 들어와 빈 몸으로 떠났다. 째깐이 할매는 모든 게 다 작았다. 키도 작고 몸피도 작고 얼굴도 작고 눈코입도 작고, 말하기 좀 그렇지만 가슴도 작았다. 옆집 박센떡과 나란히 서 있으면 작은 가슴이 더 도드라졌다. 박센떡은 째깐이 할매처럼 자식이 넷인데도 가슴이 어찌나 풍성한지 늘 저고리가 벌어져 더러는 허연 젖무덤이 아슬아슬 볕 구경을 하기도 했더랬다. 가슴만 풍성한 게 아니라 몸 전체가 풍성했던 박센떡은 고된 일 따위, 발가락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고 뚝딱뚝딱 해치웠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런 것처럼 보였다. 박센도 힘깨나 쓰는 일꾼이라 그 집 살림은 하루가 다르게 윤택해졌다. 애들도 푸둥푸둥 살이 올랐다. -
정지아의 할매 열전 알고 보니 부처였던 100살 엄마의 머릿속엔 100년의 기억이 뒤엉켜 있다 어느 순간 아무 기억이나 불쑥 솟구치는 모양이다. 어느 날 아침, 뜬금없이 물었다. “아이, 규갑이는 살았다냐 죽었다냐?” 규갑이가 누군지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게 누구냐고 되물었다. “규석이 동생이제.” 그제야 기억이 났다. 엄마가 규갑이라 부르는, 전남편의 먼 피붙이를 나는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나에게는 그냥 중학 시절의 집 주인아저씨다. -
정지아의 할매 열전 그늘에서 그늘로 오래된 부고를 들었다. 더 오래전에 까맣게 잊은 사람의 부고였다. 그이, 곽센떡은 우리가 세 들어 살던 집의 식모였다. 나에게 몰래 먹을 것을 주려다 주인에게 들켜 노상 두들겨 맞던 영자 언니가 무슨 일이었던지 식모살이를 그만뒀다. 무슨 소문이 어떻게 났는지 아무도 그 집 식모로 오려 하지 않았다. 부잣집 딸로 고이 자란 주인 마나님이 일꾼들까지 십수명 밥해대는 게 쉬웠으랴. 보다 못한 엄마가 곽센떡을 추천했다. 인생 첫 노동에 지친 주인 마나님이 어린아이까지 딸린 곽센떡을 마지못해 허락했다. -
정지아의 할매 열전 세상 쿨한 요즘 할매 지난가을 나의 친애하는 떡집언니-나에게는 언니요, 남에게는 할매다-가 웬일로 점심을 사겠노라 연락을 했다. 비싼 떡갈비를 얻어먹고 헤어지려는데 언니가 선물 꾸러미를 내밀었다. 알고 보니 언니의 팔순이었다. 언니는 팔순을 맞아 자식과 친척, 성당 사람들, 친구들 몇 팀에 식사를 대접했단다. 작은 선물과 함께. “나이 들어봉게 곁에 사램 있는 것이 젤로 좋데. 먼저 안 가불고 나랑 놀아주제, 밥 묵어주제, 월매나 고마운가. 하도 고마와서 나가 밥 한 끼 대접하는 것이여. 긍게 말 안 했다 서운해 말소이.” -
정지아의 할매 열전 놉은 한 고랑, 아짐은 두 고랑 초등학생 시절, 나는 경애 언니가 제일 부러웠다. 예쁘장하게 생겨서도, 광주 고등학교에 다녀서도 아니었다. 동네서 양동떡으로 불리던 언니 엄마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었던지 그 집에서 잠을 잔 적이 있다. 사춘기 접어든 언니들 이야기 듣느라 날 새는 줄도 몰랐을 테지. 해가 훤히 솟은 뒤에야 눈을 떴는데 다들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그 사이를 기어다니는 굽은 등이 보였다. 양동떡이었다. 양동떡은 혹여 누가 깰세라 조심조심 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양동떡이 검지손가락을 입에 대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
정지아의 할매 열전 이토록 젊은 할매 나의 할매들은 이제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아짐들도 그 뒤를 따랐다. 내가 언니라 부르던 이들이 어느 순간 동네 할매가 되었다. 하기야 내가 할매 나이다. 일찍 결혼한 친구 중에는 손주를 두어 진짜 할매가 된 사람도 있다. 세월은 이렇게나 빠르다. 오늘의 할매는 젊다. 순전히 내 기준으로. 나보다 열 살쯤 위려나? 그런데 십오 년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그이가 할매인 줄 알았다. 구십 도로 굽은 허리 탓이었다. 그이는 동네에 새로 이사 온 내가 싹싹하게 인사를 해도 잘 받아주지 않았다. 어디선가 구한 유모차를 보행기 대신 밀고 집과 논밭만 부지런히 오갔다. 동네 마실도 다니지 않았다. 체구도 자그만 양반이 보릿고개 있던 시절의 소처럼 잠시도 쉴 틈 없이 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