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지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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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의 할매 열전 세상 쿨한 요즘 할매 지난가을 나의 친애하는 떡집언니-나에게는 언니요, 남에게는 할매다-가 웬일로 점심을 사겠노라 연락을 했다. 비싼 떡갈비를 얻어먹고 헤어지려는데 언니가 선물 꾸러미를 내밀었다. 알고 보니 언니의 팔순이었다. 언니는 팔순을 맞아 자식과 친척, 성당 사람들, 친구들 몇 팀에 식사를 대접했단다. 작은 선물과 함께. “나이 들어봉게 곁에 사램 있는 것이 젤로 좋데. 먼저 안 가불고 나랑 놀아주제, 밥 묵어주제, 월매나 고마운가. 하도 고마와서 나가 밥 한 끼 대접하는 것이여. 긍게 말 안 했다 서운해 말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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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의 할매 열전 놉은 한 고랑, 아짐은 두 고랑 초등학생 시절, 나는 경애 언니가 제일 부러웠다. 예쁘장하게 생겨서도, 광주 고등학교에 다녀서도 아니었다. 동네서 양동떡으로 불리던 언니 엄마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었던지 그 집에서 잠을 잔 적이 있다. 사춘기 접어든 언니들 이야기 듣느라 날 새는 줄도 몰랐을 테지. 해가 훤히 솟은 뒤에야 눈을 떴는데 다들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그 사이를 기어다니는 굽은 등이 보였다. 양동떡이었다. 양동떡은 혹여 누가 깰세라 조심조심 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양동떡이 검지손가락을 입에 대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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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의 할매 열전 이토록 젊은 할매 나의 할매들은 이제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아짐들도 그 뒤를 따랐다. 내가 언니라 부르던 이들이 어느 순간 동네 할매가 되었다. 하기야 내가 할매 나이다. 일찍 결혼한 친구 중에는 손주를 두어 진짜 할매가 된 사람도 있다. 세월은 이렇게나 빠르다. 오늘의 할매는 젊다. 순전히 내 기준으로. 나보다 열 살쯤 위려나? 그런데 십오 년 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그이가 할매인 줄 알았다. 구십 도로 굽은 허리 탓이었다. 그이는 동네에 새로 이사 온 내가 싹싹하게 인사를 해도 잘 받아주지 않았다. 어디선가 구한 유모차를 보행기 대신 밀고 집과 논밭만 부지런히 오갔다. 동네 마실도 다니지 않았다. 체구도 자그만 양반이 보릿고개 있던 시절의 소처럼 잠시도 쉴 틈 없이 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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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의 할매 열전 아이를 품은 채 할매가 되었네 서울 살 때의 얘기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출근길 지하철역,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가 어찌나 컸는지 플랫폼의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 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급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오며 소리치는 이는 여든쯤 된 여성이었다. 그제야 그이가 목이 터져라 외쳐 부르는 게 내 이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 까마득히 잊었던 기억 하나가 뇌세포를 뚫고 생생하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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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의 할매 열전 이모는 화투점을 치며 무엇을 기다렸을까 나는 그이를 광주 이모라 불렀다. 이름도 정확한 나이도 모른다. 엄마가 친구라 했으니 비슷한 또래일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아버지는 광주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그때만 해도 광주는 머나멀었다. 아버지 면회를 갈 때마다 엄마는 광주 이모 집에서 자고 먹었다. 이모 집은 넓은 정원이 딸린 멋진 한옥이었다. 전통 한옥은 아니었던지 마루 끝에 유리로 된 미닫이문이 달려 있었다. 이모는 고급스러운 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피부가 서양인처럼 새하얗고 볼이 통통했다. 내가 태어나서 본 가장 하얀 사람이었다. 입고 있는 한복처럼 고급스러운 것도 같고, 어딘지 나른한 것도 같았다. 이모가 미닫이문을 열고 마루에 앉아 봄볕을 쬐며 자울자울 졸고 있는 모습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게 그 나른한 첫인상 때문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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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의 할매 열전 이번에는 할배! 왜? 할매 얘기나 할 때가 아니다(젠장. 머릿속으로 다 써놨는데!).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오래(오래는 아니다. 고작 12월3일 밤 10시59분부터 현재까지. 그런데 무지막지하게 길게 느껴졌다. 한 45년쯤으로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고민했으나 할 말이 없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이런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하도 얼척이 없응게 헐 말이 없네이.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우리 집 손님을 태우러 오신 기사님께서 한마디 보탰다. 먼 일이대요? 취했응게 그랬겄지라? 순간 생각했다. 이번에는 할배 이야기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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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의 할매 열전 할매가 되지 못한 할매 순천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한 남자가 학교로 나를 찾아왔다. 잘생기진 않았던 모양이다. 학교가 발칵 뒤집히지 않았던 걸 보니. 처음 보는 남자가 깔깔거리며 지나가는 여학생들 앞에서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교문 옆에 서 있었다. 내 운동화가 시야에 들어오자 그는 번쩍 고개를 들고는 환하게 웃었다. 처음 보는 남자의 속절없이 환한 미소가 기이해서 그 장면이 각인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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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의 할매 열전 넘의 묏등(묘)이라도 시인 류근은 잘생겼다. 잘생긴 주제에 심지어 동안이다. 뱃살도 없다. 뿐인가. 돈도 많다. 그런 주제에 시인답게 외로움을 탄다. 전화만 하면 외롭단다. 질투에 눈먼 나는 매번 냉정하게 쏘아붙인다. “우리 치타(나의 사랑스러운 똥개)도 외로워. 꺼져!” 시인만 외로운 게 아니다. 나의 서울 친구들은 전화만 하면 하소연이다. 서울 것들은 늘 외롭고 뭔가가 부족하고 뭔가가 억울하다. 이상도 하지. 가진 것 없는 시골 할매들은 하소연을 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겪고 보릿고개를 지난 세대인데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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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의 할매 열전 날쌘돌이 큰어매 어느 봄날의 풍경 하나. 아마 어린 날의 기억인 것 같은데 내가 어디에서 이 풍경을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큰집의 넓은 뜰 안쪽에만 봄볕이 가득하다. 아마 이른 아침인 모양이다. 반내골은 앞뒤 산이 가팔라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지는 전형적인 산골이었다. 암탉 한 마리가 샛노란 새끼 10여마리를 거느린 채 종종걸음으로 어둔 그늘을 벗어나 봄볕 쪽으로 이동한다. 신기하기도 하지. 닭은 부리며 발이며 참으로 못생겼는데 병아리들은 몇달 뒤의 역변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어여쁘다. 암탉은 햇볕 좋은 자리에 자리를 잡고, 이제 조금 자라 엄마 품을 벗어난 병아리들은 엄마 몸에 기댄 채 자울자울 잠을 청한다. 거기서 머지않은 펌프 옆, 큰엄마가 볏짚 몇 가닥에 양잿물을 묻혀 타구(唾具)를 닦고 있다. 여느 때처럼 큰엄마는 눈·코·입이 오종종한 작은 얼굴을 찌푸린 채 속사포처럼 혼잣말을 내뱉는다. 무슨 말인지 정확히 들리지 않는데 중간중간 썩어빠질, 염병 같은 욕설이 들린다. 큰엄마가 닦는 타구는 큰아버지의 것이다. 큰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이었다. 내가 좀 큰 뒤에는 안방 옆의 작은 방에 틀어박힌 채 허구헌날 술만 마셨다. 큰아버지가 머무는 방문을 열면 독한 담배 냄새와 오줌 냄새, 술 냄새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조는 병아리들을 봤던 그 봄날에 나는 타구가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도 알지 못했다. 타구가 침 뱉는 그릇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리듬을 타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큰엄마의 욕설을 뼛속 깊이 이해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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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의 할매 열전 우리 동네 미친 할매 내 고향 마을엔 미친년이 있었다. 우리 동네에만 있었던 게 아니다. 그 시절엔 동네마다 미친년이 한 명씩 있었다. 신기하게 미친놈은 잘 없었다. 여성이 몇 곱절은 더 힘들었던 시절이라 그랬을 테지 짐작한다. 미친년이라 표현하는 것을 부디 양해하시길. 야만의 시대를 옹호하려 함이 아니니까. 얼마나 야만적이었는지 폭로하기 위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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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의 할매 열전 복이와 복이 어매 어느 여름밤이었다. 등나무 덩굴 우거진 교정에 우뚝 버티고 선 복이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두어 해 전만 해도 덩치가 비슷했는데 복이는 그새 훌쩍 자라 소년이 되어 있었다. 어두웠지만 나를 노려보는 날 선 눈빛의 기운은 고스란히 느껴졌다. “깡패들하고나 어울리고, 자알하는 짓이다! 엄마를 생각해서라도 네가 그러면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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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의 할매 열전 삐뚤이 할매 작년 가을, 여행기 청탁 때문에 고흥에 갔다. 늦가을인데도 들풀은 새파랬고, 햇볕이 따가웠다. 녹동이란 표지판을 보고 잊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삐뚤이 할매. 입이 홱 돌아갔다고 삐뚤이 할매였다. 젊어서는 구례서 내로라하는 미인이었다는데 내가 태어났을 때 할매는 이미 삐뚤이인 데다 늙어 미(美)를 떠올릴 상황이 아니었다. 그저 입 돌아간 할매였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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