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조루 종부 할매

정지아 소설가
[정지아의 할매 열전]운조루 종부 할매

구례에는 영조 52년에 지어진 고택 운조루가 있다.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자가 새겨진 큰 뒤주로 유명한 집이다. 운조루의 주인 유씨 가문은 1년 소출의 20퍼센트인 쌀 서른여섯 가마니를 이 뒤주에 넣어 쌀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라도 가져가도록 했다. 오늘의 주인공은 유씨 가문의 종부, 이길순 할매다.

나는 이 할매를 오래전 텔레비전에서 처음 만났다. 전국의 명문가를 찾아다니며 그 집만의 특별한 요리를 소개하는 프로였다. 멋진 고택에 어울리는 멋진 요리가 줄줄이 나왔다. 근현대사의 격동 속에서도 품격 있는 집안에서는 저렇게 손 많이 가고 귀한 음식을 해먹었구나, 어쩐지 배알이 꼴리는 것도 같았다. 구례 운조루라는 자막이 뜨더니 허리 질끈 묶은 일복 차림의 할매가 촬영팀을 끌고 밭으로 향했다. 할매는 볏짚을 걷어내고 괭이로 언 땅을 파헤치더니 무릎 꿇은 채 땅속 깊이 손을 넣었다. 할매는 그날, 유씨 가문의 별식이라며 겨울 무에 돋아난 연둣빛 싹을 잘라 데치고 무쳤다. 다른 종갓집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하찮은, 그러나 나 같은 서민도 익히 아는 진짜 겨울 별미였다.

구례로 돌아온 몇년 뒤 읍내로 향하는 중이었다. 택시 기사가 한 할매를 보고는 태워드려도 되겠냐 양해를 구했다. 어차피 남는 자리, 그러시라 했다.

“집이 코앞이요. 고맙제만 그냥 가씨요.”

“그래도 걸어가실라먼 힘드시잖애라.”

“펭상 다니던 질인디 멋이 힘들겄소.”

할매는 끝내 택시에 타지 않았다. 그이가 바로 운조루 종부였다. 할매는 봄부터 가을까지 집에서 3~4㎞ 떨어진 밭을 다니며 일을 한다고 했다. 돈이 없는 집도 아닌데 한여름에도 택시를 탄 적은 물론 없단다. 그 뒤로 운조루에 갈 때마다 할매를 눈여겨 살폈다. 할매는 언제나 부지런히 몸을 놀리고 있었다. 운조루의 정취를 구경하러 온 손님 중 누구도 허름한 일복을 입은 채 깨를 털거나 콩단을 나르는 할매가 종부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어느 가을밤, 운조루 정자에서 흥겨운 콘서트가 열렸을 때도 할매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종종걸음으로 마당을 오가며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었다.

부잣집으로 시집간다고 다들 부러워했지만 할매는 시집올 때 꽃가마도 타지 못했다. 달구지를 타고 시댁으로 왔더니 행랑채고 안채고 낯선 사람들이 드글거렸다. 반란군에게 양식을 대준다는 이유로 군인들이 산 밑 마을에 불을 지르고 쫓아내던 시절이었다. 오갈 데 없는 사람 중 상당수가 운조루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할매는 낯선 여자들과 대청마루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결혼생활은 한시도 숨 돌릴 새 없는 노동의 연속이었다. 겨울이면 찬물에 대식구 빨래를 하느라 벌겋게 달아오른 손이 퉁퉁 부어올랐고, 펼 새 없는 허리는 늘 시큰거렸다. 그 와중에도 아이는 줄줄이 태어났고 시어머니가 돌봤다. 자식 얼굴 볼 새도 없이 할매는 소처럼 일만 했다. 아이들은 할매를 성이라 불렀다. 시누이가 성이라 부르니 자기들도 그렇게 부른 것이다.

“자석 이삔 줄도 모리고 살았소.”

할매는 평생 뼈빠지게 일해서 시할머니의 뜻을 이으며 산다. 할매는 보리물 죽을 끓여 살뜰히 모셨던 시할머니의 가르침을 지금도 잊지 않았다. 시할머니는 집안일 하는 사람 누군가 나뭇단에 쌀자루 숨겨놓았다는 말을 듣고 고자질한 사람을 나무랬다.

“네 이놈! 손대지 말고 가만히 두거라. 오죽 굶었으먼 그랬겄냐!”

시할머니는 당신 딸들에게는 누룽지나 먹이면서도 굶주리는 이웃의 사정을 헤아리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유씨가문 덕분에 인근의 농민들은 자기들 굶주릴 때 부잣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며 부자에 대한 분노를 키우지 않아도 되었다. 굶주림에 못 이겨 헐값에 자기 땅을 넘기는 일도 없었다. 운조루와 인근 주민들은 이런저런 현대사의 격랑을 항꾼에(함께) 겪고 항꾼에 견뎌냈다. 그러나 할매는 행복했을까? 활동사진 튼다고 나팔소리 울려퍼질 때 가슴이 설레었던 청춘의 할매는, 시집가면 영영 못 보게 될 친구들과 읍내 나가 사진 한 장 찍고 싶었던 할매는, 봄꽃 흐드러지면 까치발을 들고 담장 밖을 기웃거리던 신혼의 할매는 어디에 있을까? 북망산천 갈 날이 낼모레, 올해도 꽃은 흐드러졌는데 늙은 할매의 마음은 여전히 두근거릴까? 뜻을 지킨 인생은 아름답기도 쓸쓸하기도 하다.

정지아 소설가

정지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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