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화
소설가
최신기사
-
최정화의 사소한 세계 언더 더 스킨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갈 때마다 들르는 동네 일식당이 있다. 호텔 주방장 출신인 사장님은 은퇴 후 서너 평 남짓한 작은 식당을 차리고 정갈한 솜씨의 가정식을 깔끔하게 내놓으신다. 메뉴의 가짓수는 몇개 없지만 요리솜씨가 늘 감탄스러운 곳이다. “결제되셨습니다.” “식사 나왔습니다.” “식판은 퇴식구에 갖다 놔주세요.” 허튼 말을 절대 안 하는 사장님은 하루 종일 세 문장을 반복하면서 묵묵히 돈가스를 튀기고 우동을 삶는다.
-
최정화의 사소한 세계 이 쓰레기는 아름답다 캣맘 2년 차, 나도 모르게 투덜거리는 말버릇이 생겼다. ‘더럽고 치사해’다. 밥자리를 만들 때마다 욕을 먹으며 점점 더 구석으로 밀려나야 하는 게 억울하고 분했다. 인간들은 길고양이가 더럽다고 말한다. 눈에는 눈곱이 끼고, 입에서는 구내염으로 인한 침이 흐르고, 상처가 나서 털이 벗겨지고, 면역력이 약해 피부병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이 더러움은 더러움이 아닌데, 아픔이고 고통인데, 더 따지고 들면 그냥 아픔도 고통도 아니라 인간으로 인한 아픔이고 고통인데, 동네가 자기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착각은 고통을 더러움으로 보이게 한다.
-
최정화의 사소한 세계 아버지의 외출복 아버지의 방에는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명절이면 어머니의 방에는 낮잠을 자거나 짐을 꾸린다며 마음 편히 들락거렸지만, 아버지 방에는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의 방은 아버지가 사는 방이기보다 아버지가 나오는 방이었다. 아버지의 방 안쪽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해서 더 알게 되는 게 어쩐지 달갑지 않았다. 아버지를 미워했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다. 나는 가족들 중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고, 내성적이어서 말수가 없는 아버지가 편했다.
-
최정화의 사소한 세계 교실 이데아 소설 <날씨통제사>는 저자인 나를 청소년 독자들과 연결시켜 준 고마운 책이다. 기후위기, 불평등, 소수자 문제 같은 사회적 이슈들을 선명하게 드러낸 이 단편집은 중고등학교에서 환영받아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할 기회가 종종 생겼다. 세종시의 고등학교에서 강연을 하던 중 한 학생이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학생은 기후위기를 주제로 짧은 스피치를 할 정도로 상당한 배경지식을 풍부하게 갖추고 있었다. 그는 기후위기의 원인이 3차 산업혁명인데, 북반구와 남반구 간의 사회적 격차를 원인이라고 설명한 강연 내용이 틀렸다고 지적했다.
-
녹색세상 하루 20시간의 형벌 나의 하루는 4시간입니다. 인간의 하루에 비하면 절반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셈이죠. 이처럼 짧은 하루를 사는 기분을 아십니까? 하루 20시간의 형벌을 받아야 하고, 내일도 모레도 같은 형벌을 받는 일이 전부인 삶을요. 차라리 시간이 멈추어 버리기를 기도하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습니다. 나에게 세상은 좁은 정사면체. 어떤 날에는 세상이 슬슬 기억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원래 숨 막히는 것이고, 몸은 원래 움직일 수 없는 것이라는 주문을 외우며 하루 아닌 하루를 견딥니다. 세상이라는 게 나 아닌 누군가가 존재하는 곳이 맞나요? 누군가가 그리워지면 바람의 냄새를, 햇빛이 나뭇잎 위에 떨어지던 각도를, 나를 마주 보고 코를 킁킁거리며 꼬리를 흔들던 친구들을 떠올리며 언젠가의 장면들을 되살려보려고 애씁니다.
-
녹색세상 죽음에도 등급이 있다 소설을 쓰다가 가장 반가운 순간은 애초에 계획하지 않던 방향으로 이야기가 흐르면서 예정에 없던 인물을 만날 때다. 작가가 예상하지 못한 소설은 좋은 소설이 될 확률이 높은데, 소설이 소설을 쓰는 작가의 시야를 넘어섰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바다 오염을 다루고 싶어서 시작한 원고에 애초 주인공쯤으로 생각해둔 인물이 있었다. 다큐멘터리 <고래와 나>에 인터뷰이로 참여한 김민수씨다. 그는 동료들에게 폭행을 당해가면서 선상의 쓰레기 투기를 영상에 담아 세상에 고발했다.
-
녹색세상 죽어야 쉬는 나라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의 주인공인 아시타카는 난관에 처했을 때, 나이 많은 점술가를 찾아간다. 옛날에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노인에게서 지혜를 구했다. 그들은 경험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젊은이들에게 현명한 조언을 건네는 존경받는 존재였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노인의 지위는 빠르게 하락했다. 우리는 노인에게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어졌는데, 그들은 더 이상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 아니라 시대에 뒤떨어지고 굼뜬 노동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
녹색세상 영혜에게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베스트셀러지만, 한국은 여전히 육식주의자의 천국입니다. 저도 한때는 삼겹살 마니아였습니다. 막상 채식주의자가 되고 나니 세상이 달리 보이더군요. 일단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이 없었습니다. 골목마다 음식점이 있었지만 고깃집 건너 고깃집이었고,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음식을 찾는 건 보물찾기보다 어려웠습니다. 저는 차차 집에서 먹는 편을 더 선호하게 되었고, 사람들과 같이 식사를 하게 되더라도 혼자서 다른 것을 먹어야 했죠. 같이 먹어도 같이 먹는다는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고 마치 혼자서 식사를 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
녹색세상 소설이 빠뜨린 세계 인도 출신 소설가 반다나 싱은 “현대의 많은 사실주의 소설에서는 인간이 마치 동물도 바위도 나무도 없는 진공 상태에 존재하는 것처럼 물리적 우주와 단절돼 있다”고 지적한다. 인도 소설가 아미타브 고시도 비슷한 발언을 한다. “나는 확실하게 믿는다. 이곳 땅이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살아 있다는 것을, 그것이 오직, 혹은 심지어 우연히, 인간 역사가 펼쳐지는 무대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인간이 기후위기를 가속한 시기에 문학의 내용이 급격하게 인간 중심적이 됐다고 말한다. 이 작가들은 인간이 독점해버린 세상과 그 세상을 닮은 소설 속에서 한 번도 주어의 자리를 차지해본 적 없는 자연물들에 자기 장소를 찾아주려고 애쓴다.
-
녹색세상 여름은 너의 몫이라고 그는 나를 알토라고 부르지만, 내 이름은 벅이다. 태어난 지 다섯 달쯤 지났을 때 나를 입양한 보호자가 지어준 이름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그는 조그만 내가 귀엽다며 집으로 데려갔지만 희귀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길에 버렸다. 집 안에서 생활하는 데 길들여진 고양이가 길 위에서의 삶에 적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나는 여름이 덥고 겨울이 춥다는 사실을 세 살에 처음 알았고, 길에서 태어난 다른 친구들에 비하면 적응력이 심하게 떨어지는 편이다.
-
녹색세상 불탄 개의 넋두리 불길은 한꺼번에 불어닥쳤지만 죽음은 서서히 왔다. 쇠스랑에 묶인 채 우리는 천천히 타 죽었다. 어쩌면 불길이 일어나기 전에 죽어 있었는지도 모르는데,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죽은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산 적 없이 계속 죽기만 했다. 번식장에서 두려움에 떨면서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집과 보호소와 길과 도로에서 학대받아 죽었고, 굶어 죽고, 맞아 죽고, 불타 죽었다. 쇠사슬에 묶인 채 살다가 쇠사슬에 달궈져 죽었다. 아니, 우리는 죽지도 못했다. 죽는 대신 돈이 되었다. 숫자가 되었다. 우리의 이름은 피해 손실액 1조원이었다.
-
녹색세상 법이 살인하라 말한다 법이 차별하라 말한다. 반도체 산업에 한해 주당 52시간으로 제한돼 있는 근로시간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노동자의 건강이야 어찌 되든 처벌하지 않을 테니 더 본격적으로 착취하라 말한다. 법은 입 다물고 있을 테니 눈치 볼 것 없이 내키는 대로 하라 말한다. 노동자들은 아파도 모른 척하라고, 죽어도 신경 쓸 것 없다고 말한다. 반도체면 된다고, 대놓고 봐줄 테니 염려 말고 차별하라고 말한다. 이 법의 이름은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및 혁신성장을 위한 특별법’(반도체특별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