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이기환 문화부 선임기자는 지난 8월31일 경향신문을 정년퇴임했고, 이후 ‘역사 스토리텔러’ 직함으로 경향신문에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를 주간경향에 ‘이기환의 Hi-story’를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습니다.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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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Hi-story 이완용의 부음기사는 왜 통째로 사라졌나…사망·별세·서거의 차이 얼마 전 노태우 전대통령이 세상을 떠났죠. 저는 기자 시각에서 각 언론이 노 전대통령의 죽음을 어떻게 표현할지 눈여겨 보았는데요. 경향신문과 한겨레는 ‘사망’으로, 조중동(조선·중앙·동아일보) 등은 ‘별세’라 했더군요. 조선일보는 작은 제목에서 ‘서거’라는 표현을 썼구요. 국립국어원의 표준대사전에서 검색해보니 ‘사망’은 그냥 ‘사람의 죽음’이고, ‘별세’는 ‘윗사람이 세상을 떠남’이라고 풀이했더라구요. ‘서거(逝去)’는 ‘사거(死去·죽어서 세상을 떠남)’의 높임말이라고 했구요. 왕조시대에는 ‘붕(崩·천자), 훙(薨·제후), 졸(卒·대부), 불록(不祿·선비), 사(死·백성)’(<예기> 곡례)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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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Hi-story (7)쌍욕에 신상털기까지 조선판 댓글문화 요즘 댓글문화가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데요, 130년 전에도 일종의 댓글문화가 있었습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도서대여점(세책점)에서 빌린 소설책에 독자들이 툭툭 써내려간 낙서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게 요즘의 댓글이 아니겠습니까. 국권이 침탈되던 당대 소설책에 쓰인 낙서 가운데는 암울한 시대상황을 꼬집고 풍자하는 이른바 ‘시국 댓글’이 있었습니다. 낙서, 즉 당시 댓글의 주공격 대상은 매국노 이완용(1858~1926)과 송병준(1858~1925) 등이었습니다. “이완용 놈아! 내 손에 죽으리라!” “이완용 놈아… 네 몸이 남지 못하리라”, “대역부도 이완용아, 네가 무슨 일로 이 나라를 이렇게 만들었느냐”, “이 나라 망하게 놓은 자는 누구냐 하면 이완용과 송병준이라 하니… 두 놈을 잡아내 장안에서 만민의 원수를 갚으세”, “천하에 몹쓸 놈 아무 때 죽어도 내 손에 죽으리라. 총리대신 이완용 개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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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전두환이 보러온다고 소란 떤 신라고분, 그곳엔 고구려벽화가 있었다 1960년대부터 대구 경북 지역 골동품상 사이에서 심상치않은 소문이 돌았다. “(영주) 순흥면의 어느 곳에 벽화고분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 소문을 허투루 듣지않은 이가 있었다. 당시 진홍섭 이화여대 박물관장이었다. 틈나는대로 순흥 지역을 답사하던 진관장은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에 따라 도굴 구덩이가 있는 무덤을 들어가 벽화의 유무를 확인했다. 지금으로부터 꼭 50년 전인 1971년 마침내 바로 그 순흥 태장리에서 벽화고분을 찾아냈다. 여러차례 도굴의 화를 입은 벽화 묘는 철저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도굴이 시작된 후 “무덤 내부의 벽에 칠해진 회를 삶아먹으면 만병통치”라는 헛소문까지 퍼졌다고 한다. 그 때문에 무덤 벽과 천정에는 채색화의 흔적만 겨우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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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Hi-story (6)중국 애국주의 영화 원조는 <상감령> 최근 중국 애국주의 영화인 <장진호>가 중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합니다. 이 영화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1월 개마고원 장진호 부근까지 진격했던 미군이 중국군에게 포위된 뒤 천신만고 끝에 철수한 ‘장진호 전투’를 중국의 시각에서 다룬 작품입니다. 웨이보 등 중국 SNS에는 영화가 끝난 뒤 자리에서 일어나 거수경례를 하는 관객 모습을 담은 영상이 올라왔는데요. 영화에서는 한국군과 북한군이 등장하지 않고 중국과 미국의 전투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군요. 지난해 10월 개봉 이후 국내 수입 허가로 논란을 빚은 영화 <금강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영화는 휴전협정을 앞둔 1953년 7월 강원도 화천 북쪽에서 벌어진 금성 전투를 배경으로 다룬 작품인데, 역시 미군-중국군의 대결이 주된 내용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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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Hi-story 고종황제 이름이 'Tom?'…국새에 찍힌 기막힌 영어 낙서 “당장 쓰는 것도 아니고 돈으로 쳐도 몇 푼 안되는데…. 그만한 것을 잃었다고 좋아하는 꼴푸(골프) 놀이를 못한단 말이요?” 1924년 4월 15일자 동아일보 기사입니다. 신문은 당시 매국노 이완용(1858~1926)의 아들인 이항구(1881~1945)의 항변을 전하면서 기막힌 한마디를 더 얹습니다. “아니 그럼 집에서 술을 먹거나 기집(계집)을 데리고 노는 것도 못하겠구려!” 대체 이항구는 ‘돈도 안되는’ 무엇을 잃어버렸기에 길길이 날뛰며 막말을 뱉어내고 있는 것일까요. 이틀전인 4월 13일 동아일보를 찾아봅니다. “10일 아침 종묘안 영녕전에 안치되었던 덕종(성종의 아버지·추존왕·1438~1457)과 예종(재위 1468~1469) 어보가 분실된 사실이 확인됐다. 놀라운 소식을 들은 이왕 전하(순종)가 밤을 새우며 ‘어보를 찾았느냐’고 물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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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일가족 죽여묻은 순장 확인'…1500년전 고인골 DNA 분석해보니 1982년 1월14일 해외 밀반출 되려던 유물이 부산세관에 의해 극적으로 적발된다. 은제 새날개형관장식과 순금제귀고리, 금은제 고리자루큰칼, 은제 허리띠 등 15점이 압수됐다. 유물을 빼돌리려던 장물업자 3명은 대구 중부경찰서로 넘겨졌다. 이 유물은 경북 경산 임당동의 구릉에 조성된 과수원(복숭아밭)에서 훔친 도굴품이었다. ■해외 밀반출 직전에 적발된 도굴품 이 지역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소국인 압독국의 근거지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압독국은 102년(신라 파사왕 23) 사로국(신라)에 투항했다. 예부터 이 일대, 즉 임당동과 조영동 등에 상당한 고분이 산재해있었다. 이곳 평야는 압독의 다른 이름(압량)을 따서 압량벌로 알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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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Hi-story "'독립문' 현판 글씨, 매국노 이완용의 작품이랍니다" 저는 일제강점기 문화재지정 관련 자료를 들춰보다가 뭔가 이상한 대목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일제가 1935년 서울 독립문을 고적(제58호)로 지정했다는 기사인데요. 그것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인 이마이타 기요노리(今井田淸德)가 주재하는 회의에서 확정했다는 겁니다. ■독립문을 문화재로 지정한 이유 그 뿐이 아닙니다. 그보다 8~9년 전에는 독립문이 방치되어 아예 붕괴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 바 있는데요. 이때 “이 참에 헐어버리자”는 의견도 개진됩니다. 그런데 조선총독부는 4100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대대적인 보수공사에 나섭니다. 어째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독립문이라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야 할 일제가 왜 대대적인 보수공사에 나서고, 그것도 모자라 아예 ‘천세에 남을 문화재’로 지정했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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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30년전 '쉬쉬'하며 감췄던 일본식 고분…이제는 말할 수 있다 “아니 이건….” 1991년 3월 26일 전남 함평 신덕고분을 찾은 국립광주박물관 조사팀이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고분의 원형부 서쪽에 드러난 도굴구덩이가 보인 것이다. 더욱이 이 도굴구덩이는 불과 며칠 전에 판 흔적이 분명했다. “팠다가 다시 메운 구멍에는 부러뜨린 소나무 가지가 채 마르지도 않은 상태로 들어있었습니다. 주변에서 갓 베어진 소나무가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도굴 구덩이 주변에는 약간의 철기 부스러기와 도자(刀子·작은 칼)편이 흩어져 있었습니다.”(성낙준 당시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관의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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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Hi-story 몽골 쿠빌라이는 왜 "고려만큼은 특별대우하라!"고 명했을까 2018년 강화 옥림리 주택신축부지를 조사하던 한백문화재연구원 발굴단은 의미심장한 유구를 확인했습니다. 이곳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강화중성(길이 8.1㎞)의 한 지점이었는데, 그곳에서 9기의 목책구덩이가 보인 겁니다. 열을 이룬 목책구덩이는 성벽 외부로 돌출된 능선에서 치(雉)와 마른 도랑을 조성한 흔적이었는데요. 치와 마른도랑은 아시다시피 외부의 침입을 막는 방어시설이죠. ■울부짖으며 성을 헐었던 강화백성들 그런데 목책구덩이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목책에 사용된 나무기둥을 뽑아내려고 인위적으로 기둥자리를 파내고 흙을 다시 메운 흔적이었는데요. 한마디로 인위적으로 성을 헐어버렸다는 얘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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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Hi-story "임금은 절대 출입금지"···'화장실 고고학'의 은밀한 세계 혹시 ‘화장실 고고학’이라는 용어를 들어보셨습니까. 1970년대초 미국에서 처음 시작된 개념인데요. 옛 사람들의 배설물(기생충알 혹은 씨앗)로 당대의 식생활 및 건강상태 등을 복원하는 고고학의 한 방법론이죠. 1980년대부터 일본에서도 각지에서 확인되는 화장실유적과 기생충알을 활발하게 연구해왔죠. 얼마전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에서도 대형 화장실 유구가 확인됐는데요. 1991년 경복궁의 복원 정비가 시작된 이후 꼭 30년 만에 처음으로 화장실터가 나왔다는 게 좀 재미있습니다. ■경복궁에서 확인된 첫번째 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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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백제의 요서경략' 설파하면 '사이비' '국뽕'인가 한국사를 공부하다 보면 희대의 기현상과 마주치게 된다. 바로 ‘백제의 요서(遼西·랴오시) 경략’ 관련 기사이다. <송서>를 비롯해 10곳이 넘는 중국 역사서에 명백하게 기술되어 있는데도 그저 ‘설’이라는 모호한 표현이 통용된다. 최근 배달된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교수(융합고고학과)의 단행본(<백제요서경략>·서경문화사)을 읽고, 기자의 버킷리스트라 할까 예전부터 꼭 다루고 싶었던 ‘백제의 요서경략’ 기사를 쓰기로 했다. 과문한 기자가 이 교수의 주장이 타당한지 아닌지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이교수의 책을 바탕으로 역사서에 등장하는 ‘백제의 요서경략’ 관련 기사를 검토해보고, 어떤 주장이 타당성이 있는지, 객관성을 지니고 있는지 짚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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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Hi-story 아무도 눈치못챈 세종의 '숨겨진 업적'…'신의 한수' 될 줄이야 실물로 보이지 않았던 세종대왕 업적의 편린이 얼마전 서울 도심 공평동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금속활자 ‘갑인자’는 물론, 종합 자동 물시계인 옥루(자격루)와 해시계·별시계 겸용인 일성정시의 등 세종이 심혈을 기울인 국책사업의 결과물이 모습을 드러낸 겁니다. 따지고 보면 세종대왕의 업적이 한둘입니까. 훈민정음 창제와 해시계·물시계·측우기 등 과학기술 장려, 대마도 정벌과 4군6진 개척, 그리고 <농사직설> 편찬 등 손으로 꼽을 수 없죠. 더 있죠. 요즘 주목받고 있는 금속활자(경자자·갑인자)의 개발도 빼놓을 수 없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