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이기환 문화부 선임기자는 지난 8월31일 경향신문을 정년퇴임했고, 이후 ‘역사 스토리텔러’ 직함으로 경향신문에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를 주간경향에 ‘이기환의 Hi-story’를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습니다.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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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Hi-story 왜군이 도굴·훼손한 조선왕릉…‘이릉의 치욕, 결코 잊지 마라' 최근 조선왕릉과 관련해서 반가운 소식이 하나 들려왔습니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40기의 왕릉 중에서 유일한 비공개릉이던 서삼릉의 효릉을 9월8일부터 일반에 개방한다는 겁니다. 효릉은 조선의 12대 왕인 인종(1515~1545, 재위 1544~1545)과 부인(인성왕후 박씨·1514~1578)의 무덤인데요. 비공개의 이유가 있습니다. 서삼릉의 다른 왕릉과 달리 효릉에 들어가려면 국내 농가에 젖소 종자를 공급하는 젖소개량사업소를 거쳐야 했거든요. 그래서 방역 문제가 걸려있어서 일반인의 출입이 곤란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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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Hi-story (97)“시라카와가 죽었다” 윤봉길 의거 그 후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上海) 훙커우(虹口) 공원은 일본인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1~2월 이어진 ‘상하이 사변’에서 중국군을 몰아낸 일본군이 시내를 장악하고 있었죠. 일본군은 승전 기념을 겸해 천장절(일왕 생일) 경축식을 훙커우 공원에서 열고자 했습니다. 행사장에는 일본군 1만여명을 포함, 상하이 거류민까지 모두 3만명의 일본인이 자리를 메웠습니다. 일본군 장교를 도륙하겠다 오전 7시 45분 어깨에 물통을 메고 도시락을 든 채 일반 관람객 속에 자리를 잡은 인물이 있었습니다. 스물네 살 청년 윤봉길(1908~1932)이었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3일 전(26일) “나는 적성(赤誠·참된 정성)으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한다”고 선서한 한인애국단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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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Hi-story (94)정전협정 지도에 담긴 휴전선의 비밀 시원하게 뚫린 자유로를 달리다 보면 임진강과 한강의 합수부에 경기도 파주 통일전망대가 서 있죠. 그쯤에서 한 5㎞ 정도 더 달리면 임진강변을 따라 설치돼 있던 철책이 갑자기 강 건너 북쪽으로 올라갑니다. 누가 “저 철책이 뭐냐”고 물으면 전 “아마 군사분계선(휴전선)의 남방한계선(휴전선에서 2㎞ 남쪽선)을 표시한 철책일걸?” 하고 대답합니다. 100% 이런 질문이 돌아옵니다. “그럼 통일전망대에서 여기까지 오는 자유로의 맞은편 지역은 뭐냐. 북한땅이냐”고요. 묻는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포털사이트의 지식백과를 검색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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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Hi-story ‘순종을 사육 동물로 전시하라’…이토 히로부미의 ‘창경원’ 프로젝트 최근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가 ‘창경궁 명칭 환원 40주년’을 맞아 올 연말까지 다채로운 행사를 벌인다고 발표했습니다. 아마도 50대 이상의 세대에게는 이 소식이 색다른 감회로 다가왔을 겁니다. 저만 해도 20대 초반까지는 ‘창경원’이었구요.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소풍 가서 사자며, 호랑이며, 하마며, 기린같은 여러 진귀한 동물을 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가 동·식물을 서울대공원에 옮긴 뒤인 1983년 12월 비로소 ‘창경궁’의 명칭을 되찾게 되었죠. 원래는 ‘궁’이었는데, 일제강점 초창기(1911년) ‘동식물을 키우는 동산’인 ‘원(苑)’으로 명칭이 바뀌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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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Hi-story 1400년전 초대형 '백제 냉장고'는 서동왕자와 선화공주가 사용했을까 “막상 와서 보니까 대단하네.” 얼마전 전북 익산 서동생가터에서 공개된 6~7세기 ‘백제판 냉장고’를 현장에서 직접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우선 규모가 비슷한 2기가 아주 정연하게 나란히 조성되어 있는 것도 흥미롭고요. 규모 또한 상상 이상입니다. 두 기 모두 길이가 4.9m(1호)~5.3m(2호), 너비가 2.4m(1호)~2.5m(2호)나 되는데요. 무엇보다 깊이가 생각보다 엄청 깊습니다. 2.3(1호)~2.4m(2호)나 되는데요. 사람이 들어가 있으면 보이지 않고요. 사다리를 타야 겨우 오르내릴 수 있습니다. 또 하나 각 냉장고의 벽면을 정연하면서 조밀하게 쌓아놓은 것도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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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2000년전 밴드 공연장에 등장한 악기 5종…며칠밤낮 쉼없이 연주했다 지금로부터 꼭 30년 전인 1992년 5월이었다. 조현종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와 최상종 연구원이 부리나케 광주 신창동 유적으로 달려갔다. 유적 주변에 살고 있던 최 연구원이 “지금 국도 1호선 확·포장 공사가 한창인데, 신창동 유적이 훼손될 수 있는게 아니냐”고 보고했기 때문이다. 신창동은 1963년 유·소아의 무덤인 독무덤(옹관묘) 53기가 확인되어 교과서에 실리기까지 한 2000년 된 매우 중요한 유적이었다. 그런데 도로공사가 벌어지면 유적파괴는 불보듯 뻔한 것이 아닌가. ■2000년 전의 생활도구들이 줄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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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고꾸라진 채 발견된 '5cm' 기적의 신라 불상…굳이 일으켜야 할까 “땅과 불상의 공간은 단 5㎝ 차이(lls’en est fallu de cinq centimetres)…(불교계 인사는) ‘기적과 같은 일’이라 했다.” 2007년 9월 13일자 프랑스 ‘르 몽드’지는 ‘1300년 전 넘어진 경주 마애석불, 원형 그대로 보존…’이라는 제목의 기사와 함께 대문짝만한 불상 사진을 1면에 실었다. 이 불상이 경주 남산 열암곡에서 ‘엎어진채 발견된 대형 마애불’이다. 마애불의 규모는 엄청나다. 불상을 새긴 바위는 폭 4.0m, 높이 6.8m, 두께 2.9m나 되고, 무게는 무려 80t에 이른다. 그런 바위가 40도 가까운 경사면에 거꾸로 박힌 것도, 불상의 코가 지면에서 불과 5㎝이 거리를 둔채 떨어진 것도 불가사의하다. 그런 거대한 몸이 속절없이 고꾸라지면서도 코 끝 하나 다치지 않았으니 에누리없는 ‘해외토픽’ 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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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Hi-story “이순신은요, 원균은요”…선비가 쓴 ‘난중일기’가 전한 밑바닥 여론 임진왜란을 기록한 공식사료는 당연히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이겠죠.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그 어떤 이들보다 기록에 진심인 사람들이죠. 진중일기인 이순신(1545~1598)의 <난중일기>, 관리로서 임진왜란을 치른 류성룡(1542~1607)의 <징비록>이 대표적이죠. 선조(1569~1608)의 피란길을 수행한 김용(1557~1620)의 <호종일기>, 의병장 김해(1555~1593)와 정경운(1556~?)의 <향병일기>(김해)와 <고대일록>(정경운), 전쟁포로로 일본으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노인(1566~1622)의 <금계일기>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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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거대사찰 황룡사에 우뚝 선 '80m 랜드마크'와 '서라벌판 광화문 광장' “서라벌에 절이 별처럼 펼쳐져 있고 탑들이 기러기처럼 늘어서 있다.(寺寺星張 塔塔雁行)” <삼국유사>가 전한 전성기 서라벌 시내 모습이다. 527년(법흥왕 14) 이차돈의 순교로 공인된 불교가 어느덧 ‘절과 절이 별처럼, 탑과 탑이 기러기 행렬처럼 늘어서 있을 정도’로 성행했던 것이다. 553년(진흥왕 14) 짓기 시작한 황룡사는 본래 사찰(寺)로 조성된 것은 아니었다. <삼국사기>는 “월성의 동쪽에 새 궁궐을 지으려 했는데, 황룡이 나타나는 바람에 사찰(‘황룡사’) 조영으로 계획을 수정했다”(‘신라본기’)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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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Hi-story 죄책감에 빠진 '백,제,왕,창'…0.08mm 초정밀 예술 쏟아냈다 제가 가본 문화재 발굴 현장 중에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곳이 있는데요. 2007년 10월 24일 부여 왕흥사터 발굴유물을 실견했을 때입니다. 절정기 백제예술의 정수를 보면서 넋을 잃었답니다. 과연 어떤 발굴이었는지 시간을 15년 전으로 돌려보겠습니다. 발표 2주 전인 10월10일이었습니다. 왕흥사 목탑터를 조사중이던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사단원들의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습니다. 목탑터 초석의 사리구멍을 막은 돌뚜껑(25㎝×15㎝×7㎝)이 노출되었는데요. 떨리는 손으로 뚜껑을 열자 흙탕물이 가득했답니다. 대나무칼로 조심스레 흙을 제거하자 글자들이 한자 한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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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숙종의 피난처, 북한산성에 왜 금괴 매장설이 퍼졌을까 서울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이 감탄사를 연발하는 포인트가 있다. 도심에서 걸어서 오를 수 있는 산이 즐비하다는 것이다. 외국인들은 산을 등지고 강을 마주하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자리에 터전을 잡고 살았던 전통 덕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100여 년 전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도 ‘도심 지척의 산’이 그렇게 신기했나보다. “경성에서 서양인의 피크닉이라 하면 대개 북한산이 통념으로 되어 있었다…지게꾼들을 데려와서 말과 대나무 가마로 간다.”(<외국인이 본 조선외교비화>, 1934) 1894년 7월 관립법어(프랑스어)학교 교장으로 내한한 에밀 마르텔(1874~1949)의 회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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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Hi-story '최고 5만대 1'의 극한경쟁률…조선시대 과거시험의 비밀 바야흐로 대학입시의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대학진학을 위한 수능시험을 마친 수험생과 수험생 부모들이 그야말로 살떨리는 겨울을 맞이하시겠죠. 입시철을 맞아 조선시대 과거시험장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보겠습니다. 과거시험 하면 가장 극적인 이틀이 떠오르네요. 지금으로부터 221년 전인 1800년(정조 24) 3월21~22일의 일입니다. 당시 왕세자(순조)의 책봉을 기념하는 특별시험(경과·慶科)이 창경궁 춘당대에서 열렸는데요. 첫날(21일)엔 초시가, 둘째날(22일)에는 인일제(人日製·유생들을 대상으로 치른 특별과거)가 잇달아 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