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곤
사월의 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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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냉면과 평화 아버지는 6·25 때 단신 월남한 실향민이지만 고향 얘기는 잘하지 않으신다. 80대 중반의 연세로 남쪽에서 보낸 세월이 북쪽에서 살았던 시간의 네 배가 넘으니 기억과 애착이 차츰 바래서인지도 모른다. 월남할 당시 황해도 연백의 고향에는 어머니와 네 살배기 늦둥이 동생만 있었다니, 오래전에 돌아가셨을 어머니 연세를 떠올리고는 그리움을 접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띄엄띄엄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셨고, 나도 어려서부터 들어온 이야기에 어느덧 황해도민의 정서에 동화된 듯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고향을 물으면 대뜸 “황해도 연백이오!” 해놓고는 “사실은 파주에 터를 잡고 내내 살았지만…” 운운하며 설명을 붙이곤 한다. 사람들은 황해도가 고향이라는 내 대답을 농담으로만 듣고 “내가 만주 개장사 시절에 말이야” 하면서 웃음을 터뜨리곤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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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만족의 적정 수준 “제3세계 대다수 농부들에게 빠른 속도로 달리는 트럭 따위는 필요 없다. 그들에게는 당나귀보다 조금 나은 차면 충분하다. 하지만 그런 차는 생산되지 않는다. 그뿐이 아니다. 좁은 비포장도로에 현대식 트럭 하나라도 등장하면 짐 싣고 가던 당나귀와 사람들은 모두 비켜서야 한다.” 편집 중인 원고를 보다가 만난 대목이다. 자사 책을 홍보하는 격이 될까봐 제목은 밝히지 못하겠다. 우연일까. 이런 구절을 읽고 있는데 TV에서 당나귀에 사탕수수를 싣고 장에 가는 에티오피아 농부들 이야기가 나온다. <가축>이라는 다큐멘터리다. 열댓 명의 농부들이 당나귀에 100㎏씩 사탕수수를 싣고 4시간을 걸어 장에 간다. 당나귀 대상(隊商)이다. 가파른 산등성이 비포장도로에 대형트럭 하나가 먼지를 피우며 나타나자 그것을 피하며 한 농부 여인이 말한다. “지난해에는 장에 가던 사람들이 트럭에 치여 17명이 한꺼번에 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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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고통을 말하고, 공감할 자유 “끝없는 미투 폭로… 문화행사 차질로 시민도 피해자.” 뉴스를 보려고 TV채널을 돌렸다가 화면에 찍힌 자막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앵커의 말이 이어졌다. “전국 각 분야에서 미투 폭로가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유명 문화예술인들의 성추문 폭로로 문화예술 행사도 차질을 빚으면서 성폭력 피해 당사자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피해를 보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똥인지 된장인지 못 가린다는 탄식이 절로 입에서 새어나왔다. 이제는 고통을 말할 자유도 없구나. 저 앵커와 기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성폭력 피해가 피해 당사자뿐 아니라 시민에게까지 미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말일까? 아무리 새겨들어도 미투 폭로가 가해자 아닌 애먼 시민에게 손해를 입힌다는 뜻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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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출판사에 전화벨이 울릴 때 출판사 편집부에는 독자들의 전화가 심심찮게 걸려온다.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책의 품절이나 출간예정 여부를 묻는 전화이고, 또 하나는 책의 오자나 파본을 지적하는 전화다. 출판사들로서는 소중한 독자의 전화이므로 성심성의껏 대하려고 애쓰지만, 독자들이 천차만별인지라 웃지 못할 경우도 꽤 있다. 한번은 지방에 사는 독자가 전화를 했다. 중년의 목소리였다. “여보세요? 무슨 무슨 제목의 책이 그 출판사 것 맞죠?” 그렇다고 확인을 해주자 다시 묻는다. “그럼 그 책을 어디서 사죠?” 아, 이것 참…. 서점에 가보거나 서점에 없거들랑 주문을 하면 된다고 말하자 또 묻는다. “아하, 서점에서 사는구나. 그런데 그 서점이 어디에 있죠?” 황당한 경우였다. 예전이라면 아주 시골을 빼고는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동네서점이 죄다 없어진 탓도 있지만, 이 독자는 정녕 서점에서 책을 산 적이 없는 걸까? 사는 곳을 묻고는 근처 대도시 서점을 알려주며 전화를 끝냈지만, 입에서는 길게 탄식이 새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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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적’은 어디에 있는가 “시스템의 실패를 개인에게 책임지울 수는 없는 법이야.” 아이를 지방의 유수한 자율형 사립학교에 보낸 친구가 변명하듯 한 말이다. 정치적 성향에서 평소 공유하는 점이 크기에 친구는 아이를 평범한 일반고에 보내지 않은 데 대해 뭔가 변명할 필요라도 느꼈나 보다. 공교육이 다 무너진 마당에 그런 결정을 가지고 내가 무슨 비난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잖아도 일반고 교실의 쉬는 시간에 남자애가 여자애를 무릎에 앉힌 채 시시덕거리고 수업시간에는 모두 엎드려 자는 게 흔한 풍경이라는 얘기를 듣는 터였다. 똘똘한 아이를 그런 환경에 버려두고 싶은 부모가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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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나 혼자 뽑는 ‘올해의 책’ 한 사람의 서가는 그의 일기장과 비슷하다. 책 좀 읽어왔다는 사람이라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금방 이해하리라. 그의 서가에는 오랜 시간 숨겨온 그만의 자부심 혹은 부끄러움이 켜켜이 꽂혀있다. 책을 도통 읽지 않는 세상이 되어 책 읽기 자체가 소수만이 향유하는 취미처럼 되어버렸지만, 책 읽는 사람들끼리는 남의 서가를 훔쳐보는 일이 내밀한 사생활을 엿보는 것처럼 스릴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예전에 ‘독서인’ 또는 ‘교양인’이라 불리던 사람들에게는 자기 서가를 타인에게 보여주는 일이 결사 방어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썩 탐탁한 일도 아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인격에 관계된 일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번쩍이는 전집류와 세계사상서가 인테리어처럼 말끔하게 꽂혀있는 서가와, 긴 세월에 걸쳐 사들인 책들이 서로를 압사시키며 책들의 재앙을 빚어내고 있는 서가의 차이를 무슨 감별사처럼 가려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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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시인의 책방 “나리 나리 개나리 네가 두드릴 곳 하나 없는 거리….” 시 낭독이 이 대목에 이르자 청중들 사이에서는 짧은 탄식이 새어나왔다. 지난주 어느 저녁 일산 호수공원 옆의 작은 책방에서였다. 김이듬 시인이 본인 표현대로 ‘겁도 없이’ 차린 책방이듬에 그날 모인 사람들은 서른 명이 넘었다. 평론가 임우기 선생이 먼저 기형도의 시들에 대해 길안내를 하고,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한 편씩 그의 시를 읽는 모임이었다. 어깨를 맞대거나 무릎을 부딪치지 않고는 도저히 서른 명이 앉을 수 없는 공간이었지만, 사람들은 기형도의 ‘나리 나리 개나리’에서 시작하여 두 시간이 넘는 동안 꼼짝 않고 자리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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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김을 구우며 휴일 아침이다. 주방에서 김 굽는 냄새가 집안에 가득하다. 우리 집은 김을 구워서 먹는다. 나는 집에서 이렇게 손수 김을 구워 먹는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고작 김 구어 먹는 게 자랑스럽다니, 비웃음이 쏟아질 것 같다. 하지만 웃지들 마시라. 이 쉬운 반찬도 다들 사서 먹지 않는가. 내게 필요한 것을 사지 않고 직접 하는 것, 남에게 맡기지 않고 스스로 하는 건 어쨌건 나쁘지 않다. 집안일에 잠시의 짬도 낼 수 없는 일하는 부부들, 편부모 가정에게는 미안한 얘기다. 우리 생활의 많은 부분을 ‘외주’로 맡길 수밖에 없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누가 김 굽는 걸 할 줄 몰라서 안 하나? 질이 떨어지고 맛은 없어도 싼값에 외주를 주고 우리는 그 시간에 좀 더 비싼 일을 해야만 그나마 생활을 지탱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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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책은 살아남을까?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생전에 프랑스 언론과 가진 한 대담에서 “책은 그 자체로 완성된 발명품”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망치, 수레바퀴, 가위가 그렇듯이 더 이상 개선할 필요가 없는, 오래전에 발명이 끝난 도구라는 얘기다. 확실히 책은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에 수명이 길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수많은 기능을 가진 도구들을 닮았다. 나는 언제나 좋은 도구란 이렇게 단순하면서도 확장성이 큰 것들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망치는 쇠뭉치에 손잡이를 박아 넣은 것에 불과하지만, 못을 박고 단단한 것을 깨트리고 쭈그러진 것을 펴는 등 그 모든 일에 쓴다. 책은 종이에 글자들을 박아서 묶은 것에 불과하지만, 단순한 기록과 보존을 넘어 뭔가를 알리고 검색하고 참조하고 공감하고 또 빈 시간을 때우는 용도로 쓰인다. 심지어 책은 유사시에 불을 때고 베개 대용으로 쓰거나 화장실에 들고 들어갈 수도 있다. 나는 아침마다 화장실에 앉아 책을 읽곤 하는데, 변기 위에서 함께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책 읽는 것 외에 또 무엇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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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책을 살리는 방법 “책 사면 세금 깎아준대!” 지난 8월2일 기재부가 발표한 도서구입비·공연관람비 소득공제 소식을 한마디로 전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년 7월1일부터 책과 공연에 지출하는 비용을 연간 100만원까지 지출의 30%만큼 소득에서 공제해준다는 게 이번 세법개정안의 골자다. 수많은 뉴스에 이 소식이 묻혀서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일부러 쓴다. 책 좀 많이 사시라고. 출판계는 그간 소득공제보다 좀 더 직접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세액공제를 줄곧 주장해왔지만 이렇게나마 요구가 반영된 것을 반기는 분위기다. 우리 출판사 편집장과 점심을 먹고 산책하다가 이 얘기가 화제에 올랐다. 이제 책이 좀 팔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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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사물의 기쁨 요즘 사람들은 서점에 책보다 문구를 사러 가는 것 같다. 서점마다 문구코너가 빼놓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책이 하도 안 팔리니 그렇게 해서라도 매출을 유지하려는 서점의 고민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출판인들은 책이 놓일 공간을 이른바 ‘굿즈’가 자꾸만 파고드는 모습에 마음이 착잡하다. 이제 책은 영화나 게임뿐만 아니라 문구와도 경쟁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사실은 서점에 갈 때마다 문구코너에 꼭 들른다는 고백을 해야겠다. 실제로 뭔가를 사는 일은 드물지만 각양각색의 펜, 노트, 액세서리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요즘의 문구들은 디자인, 소재, 기능도 어찌 그리 빼어난지 유혹에 버티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내 파우치 필통에는 어느새 만년필 세 자루, 샤프펜슬과 색연필과 볼펜 각 한 자루, USB 메모리 하나가 들어있게 되었다. 가방 안의 가죽노트와 수첩은 별도로 하고 말이다. 변명을 하자면 이 물건들은 다 제각각 용도가 있다. 작심하고 글 쓰는 만년필과 책에 줄 긋는 만년필, 컬러잉크가 든 만년필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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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우리말 맞춤법 지키기’의 괴로움 우리나라에는 공인된 동네북이 두 군데 있다. 누구나 마음 놓고 조롱하고 웃음거리로 삼아도 괜찮은 곳들인데, 바로 기상청과 국립국어원이다. 공적 기관들인 데다 정치적 시비에도 전혀 걸릴 일이 없는 곳들이니, 사람들은 아무리 비난을 해도 명예훼손에 걸리거나 잡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별별 욕을 다 해댄다. 한번은 소셜 미디어에서 우리나라 어문규정에 대해 한탄하는 선배 출판인과 댓글을 주고받다가 마시던 커피를 뿜은 적이 있다. 맞춤법 기준이 제멋대로여서 모든 사람이 틀리게 만든다는 선배의 한탄에 “뭐가 틀렸는지 아무도 신경 안 쓰는데 하필 편집자를 택한 사람이 문제죠” 했더니, “나만 지키자니 울컥해서!”라는 답이 돌아와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억울하다. 왜 우리만 이런 걸 지키고 앉아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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