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곤
사월의 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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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삶 ‘나도 정치병 환자인가?’ 가까운 지인들이 가끔 정치 과몰입을 지적할 때면 솔직히 이런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SNS나 칼럼 등의 글에서 감정이 들끓는 정치적 발언을 여과 없이 쏟아내는 경우가 많아서일 텐데, 그럴 때마다 나는 살아가는 일이 다 정치인데 어찌 정치에 무관심할 수 있겠느냐며 대충 화살을 피하곤 한다. 속으로는 ‘이 신나고 흥분되는 일을 어찌 멈추라는 거냐’고 중얼거리지만. 그렇다. 비록 말이 전부이긴 하지만 정치에 관여하는 데서 희열과 보람(?)을 느끼는 나 같은 부류의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치를 피곤하다고 말하고 짜증스러운 정치놀음으로부터 일상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두 부류에는 공통점도 있는데, 양쪽 다 정치를 눈앞에서 벌어지는 시끄럽고 뜨끈뜨끈한 현실 정치의 의미로 쓴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삶이 곧 정치라고 할 때의 정치는 그보다 훨씬 크고 넓은 무언가를 뜻할 텐데 말이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는 정치 과몰입층이든 무관심층이든 몰정치적인 것은 다르지 않으리라. 진영으로 갈려 상대에 대한 비판과 권력의 향방에만 골몰한 정치가 오히려 우리를 몰정치적으로 만들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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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가성비로 따질 수 없는 것들 책을 읽자는 얘기는 이제 하기가 싫다. 출판사를 운영하고 책을 팔아서 먹고사는 입장이지만, 듣기 좋은 이야기도 한두 번이지 계몽적인 어조로 책 읽기의 미덕을 자꾸 설파해봐야 꼰대의 잔소리로 들릴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요는, 책 안 읽는 시민에게 문제가 있다기보다 책 읽기 어려운 환경, 책을 읽지 않아도 되는 사회적 기풍이 더 문제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초점을 시민 아닌 당국과 공공기관에 맞추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시민이 책을 읽든 안 읽든, 책 읽을 환경을 조성하고 시민 스스로 성장케 할 책무는 정부에 있다. 헌법 제14조에서 22조는 이 정부가 그토록 좋아하는 국민의 ‘자유’를 촘촘히 명시하고 있거니와, 특히 22조는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가 국민의 행복권과 마찬가지로 ‘ ~로부터의 자유’라는 소극적 의미가 아니라 적극적 향유로 해석되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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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죽음의 권리를 돌려달라 가을이 되니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잦다. 나는 유물론자로서, 이런 기분은 해가 짧아지고 일조량이 줄어 호르몬 분비에 변화가 생긴 탓이라고 간단히 믿는 편이지만, 요즘 들어 아는 사람의 부고나 암 선고 소식을 자주 접한 탓도 있는 듯하다. 이런 소식이 예전과 달리 범상하게 들리지 않는 것은 이제 나도 노년이 머지않은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 진리에 한마디를 덧붙여야 할 것 같다. 인간은 누구나 병원에서 죽는다. 국민 10명 중 8명이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니, 요즘의 죽음을 더 자세히 정의하는 게 좋겠다. 우리는 누구나 병원에서 아플 대로 아프다가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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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밀키트가 된 공부 ‘강연의 시대’라 할 만큼 곳곳에서 강연회가 열리고, 많은 독서모임에서 끊임없이 책을 읽고, 클릭 몇 번으로 필요한 동영상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이 시대에 왜 우리 사회의 교양과 지적 수준은 날로 쇠퇴하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던져본다. 지난번 “언어소통, 지식, 의견은 이제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가치이기보다 시장의 소비재이자 서비스 상품이고, 그것을 구매하는 이는 다만 뼛속까지 소비자일 뿐”이라고 썼거니와, 이 이야기를 이어보고자 한다. 출판사는 신간이 나오면 책을 알릴 마땅한 수단이 없어 저자 강연회를 열곤 하는데, 수십명의 독자가 모인 강연회에서 팔리는 책은 고작 몇 권에 불과하다. 강연을 듣는 것으로 다 이해했다는 태도다. 유튜브에 넘쳐나는 공짜 강의들은 잘못된 정보나 제멋대로 해석한 지식을 천연덕스럽게 제공하고, 이용자는 아무 노력 없이 그 콘텐츠들을 소비한다. 독서모임은 조금 낫다고 할까. 그러나 해묵은 베스트셀러와 말랑말랑한 책들을 읽느라 해가 지나도 독서 수준의 진전이 없는 경우를 흔히 본다. 나는 그나마 배움을 추구하고 자기 성장을 꾀하는 이들마저 지식을 스스로 만들기보다는 소비하는 습관에 젖은 탓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상품과 서비스의 소비 습관이 우리의 정신적 영역에까지 깊이 침투한 결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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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심심한 사과에서 복사학위까지 며칠간 SNS를 뜨겁게 달군 ‘심심한 사과’ 논란에 뒤늦게 한마디를 얹을 필요가 있을까 싶어 조심스럽다. 이미 많은 분들이 이 문제에 대해 설득력 있는 진단과 공감이 가는 비판을 내놓았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논란의 배후에 있는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징후가 눈에 걸려 사족이 될 것을 무릅쓰고 몇 마디를 얹는다. 시작은 서울의 한 카페가 웹툰 작가 사인회를 연기하면서 예약자들에게 “심심한 사과를 드린다”는 표현을 쓰면서부터였다. ‘심심한 사과’를 ‘심심하다’는 뜻으로 오독한 예약자들이 비난과 욕설을 퍼부으면서 문제가 불거졌는데, 예약자들이 자신들의 어휘력 부족과 무지를 인정하기보다는 오히려 당당한 태도로 그런 어려운 말을 쓴 상대를 비난한 것이 논란을 키운 원인이 되었다. 이에 대해 한자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거나 젊은 세대의 문해력 저하 또는 실질 문맹률을 걱정하는 말들이 나왔지만, 이 진단들은 확실히 번지수를 잘못 찾은 듯하다. 한자를 모르거나 어떤 단어의 뜻을 몰랐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무지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논란의 중심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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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철학책을 읽는 이유 벌써 30년이 훌쩍 지난 옛일이다. 대학 신입생으로 철학과에 입학한 후 처음 맞는 철학개론 시간이었다. 모든 학과가 수강하는 교양과목이었지만 대학 첫 강의인 데다 철학 전공생이었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수업을 기다렸다. 마침내 뚜벅뚜벅 강단에 선 교수는 첫 마디로 교탁을 가리키며 다짜고짜 “이게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라고 질문했다. 강의실 안의 그 누구도 다 다른 형태로 교탁을 보고 있고, 고개를 돌리면 교탁이 여전히 거기 있는지 알 수도 없는데, 어떻게 우리는 그것을 ‘교탁’이라 부를 수 있으며, 도대체 교탁이란 것이 지금 여기에 있기는 한 것이냐는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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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우리들의 자유 이 사회는 정말로 중병이 들었나보다. 뉴스를 보거나, SNS에 올라온 글과 사진을 보거나,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흔한 행동거지를 볼 때마다 나는 자주 이런 징후를 느끼곤 한다. ‘질병’이나 ‘진단’과 같은 의료적 용어로 사회문제를 병리화하는 것이 마땅치는 않으나, 나는 곳곳에서 마주치는 이 사회의 물리적·심리적·윤리적 퇴행의 징후들을 보면서 ‘병들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며칠 전 자전거 출근길에 있었던 일이다. 횡단보도 앞에서 인도 한가운데를 가로막고 기다리는 다른 자전거에게 “약간 비켜서 기다리시는 게 좋겠다”고 한마디 충고를 했다가, “당신이 뭔데 이래라저래라 하느냐”며 큰 싸움이 날 뻔했다. 그의 자존감은 이 정도 말을 수용하지 못할 정도로 강고하거나 아주 허약한 것인가 싶었다. “당신은 그렇게 규칙을 잘 지키느냐”는 말도 되돌아왔는데, 남과 견주어 남 하는 만큼만 한다는 노예의 도덕이 개인의 자유로 둔갑한 건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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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자전거는 공평하다 겨우내 방치해두었던 자전거의 먼지를 털고 매일 거르는 날 없이 자전거를 탄 지 두 달째다. 올봄은 얼마나 고마운지 예년에 비해 충분히 긴 계절을 맘껏 탕진할 수 있었다. 출퇴근길에 지나는 공원의 신록은 기뻐 죽겠다는 듯 반짝거리고 바람은 살랑살랑 땀에 젖은 목덜미를 어루만진다. 주말에 나선 장거리 자전거 길에는 또 숲과 햇빛과 바람이 조용히 기다리다 난데없이 나타난 객을 반겨주곤 한다. 자전거는 인간이 자력으로 이동할 수 있는 최적의 교통수단이라고 한다. 볼베어링의 위대한 발명으로 사람은 도보에 비해 세 배 이상 빠르게 자력으로 이동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자동차보다는 훨씬 느리지만 내가 탄 이동수단 때문에 앞에 나 있는 길을 가지 못하는 일 같은 건 자전거에게 없다. 아니, 자전거가 훨씬 느리다고? 자동차의 천국 미국의 시민은 연평균 1만2000㎞ 이동에 1600시간을 쓰는데 이것은 시간당 7.5㎞에 불과한 속도다. 자전거가 쉽게 낼 수 있는 시간당 15㎞의 절반이다. 자동차의 비효율은 그것뿐이 아니다. 선진국 국민은 날마다 30㎞의 거리를 이동하는데, 반경 10㎞를 벗어나는 일은 별로 없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 소모하는 시간은 깨어 있는 16시간 중 4시간에 달한다. 자동차 구입비, 유류비, 보험료, 세금을 버느라 쓰는 시간이 다 포함된 수치다. 즉 우리는 자동차 때문에 매일 4시간을 도로 위에서 쓰거나 그것을 위한 돈을 마련하는 데 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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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땅이 들려준 이야기 여느 사람들보다는 책을 조금 더 읽는 편이긴 하지만 크게 배우거나 공감하는 책을 만나는 일은 드물다. 몰랐던 지식을 얻는 즐거움은 자주 있어도 ‘삶이 송두리째 변화한’ 경험 같은 건 돌이켜보건대 없는 듯하다. 그러다 최근에 만난 김해자 시인의 <위대한 일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는 굳어버린 마음을 흔들고 공감케 하는 언어가 매 쪽마다 가득하여 책의 거의 절반에 밑줄을 치며 읽었다. 농부들의 삶과, 자연이 전해준 시와, 환대와 우정의 생생한 이야기에 눈시울이 뜨뜻해지고 말았다. 주변 사람들은 나를 도시 태생일 거라 어림짐작하고 나 역시 대도시에서만 살아온 지 오래이지만, 내게도 땅에 대한 기억이 조금은 있다. 어릴 적 시골 소읍에서 자라면서 집 앞 텃밭과 동네 논밭에서 흙덩이를 만지며 땀 흘리던 추억이 아련하다. 땅은 얼마나 신비로운지 봄에 묻은 씨감자 한 톨에서 감자덩이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나오고, 여릿한 배추 싹이 어느 틈에 큰 포기로 자라는가 하면, 고춧대 몇 십 주에서 한 가마니 고추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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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혐오 장사꾼 곧 여당이 되는 제1야당 대표는 오늘도 열심히 “나는 장애인을 혐오한 적이 없다”는 글을 SNS에 올리며 분투 중이다. 그의 글을 다시 한번 찾아보니 오늘도 역시 부지런하게 일하는 듯하다. “바쁜 출근길 시민을 볼모로 한 투쟁을 정당한 투쟁으로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 “전장연은 독선을 버려야 한다”면서 여전히 장애인 시위를 비판하느라 바쁘다. 비린내. 글에도 냄새가 있다면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냄새는 비린내일 것이다. 썩은 냄새나 구린 냄새와 달리 적당히 감췄지만 스멀스멀 올라오는 냄새. 그의 말은 화려한 언변과 논리로 치장했기에 언뜻 보면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저를 여성 혐오자, 장애인 혐오자로 몰아도 무슨 혐오를 했는지는 설명을 못하죠. 왜냐하면 지금까지 수많은 모순이 제기되었을 때 언더도그마 담론으로 묻어버리는 것이 가장 편하다는 것을 학습했기 때문이죠. 치열하게 토론하기보다는 프레임 전쟁을 벌이는 거죠. (…) 결국 그런 프레임을 내세운 이들이 성 비리 등으로 물러나도 그 담론을 포기 못하는 게 복어 패러독스입니다. 정작 소수자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주제 자체가 갈라파고스화되는 방식으로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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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책 읽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 이 칼럼이 지면에 실릴 때면 20대 대통령으로 누가 당선되었는지 결과가 나왔을 터이다. 신문 1면에서부터 새 대통령에 대한 기사가 크게 실릴 것이고, 초박빙의 결과에 대한 분석이 분분할 것이다. 이런 와중에 나는 지면 한 귀퉁이에 실릴 아무도 읽을 것 같지 않은 글을 위해 머리를 짜내는 중이다. 유례없이 치열했던 선거가 끝난 게 다행이랄까. 선거가 있거나, 월드컵 축구가 열리거나, 국내외 큰 사건이 있을 때마다 출판은 늘 영향을 받는다. 어떤 업계는 이런 일들로 가끔 특수 효과를 누리기도 한다는데, 왜 이 업계는 늘 손해만 보고 특수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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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오두막에서 만든 책 책 만들기에 관한 예전의 경험담을 가끔 꺼내면 사람들은 꽤 재미있게 또는 신기하게 듣기는 하지만, 이제는 사라진 한때의 이야기로 소비하고 곧 잊어버린다. 회고담 또는 ‘라떼는…’ 따위의 이야기로 들릴까봐 늘 조심스럽지만 아무렴 어떠랴. 시대가 변하고 사물이 바뀌면 그것에 얽힌 경험과 말들도 희미해지는 법. 역사가 마르크 블로크는 “사물이 바뀌는 만큼 어휘가 바로 바뀌는 것은 아니어서, 이제는 의미가 달라진 어휘가 과거를 오늘의 잣대로 잘못 이해하게끔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말에 따르면 사라진 것은 단어가 아니라 그것에 결부된 경험과 기억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