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곤
사월의 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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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공과 사가 뒤섞인 세상 온화하고 너그러운 아저씨, 유머러스하고 짓궂기도 하지만 솔직 겸손해서 왠지 안전한 아저씨, 남을 잘 배려하고 베푸는 아저씨, 머릿속에서는 이런 이상적인 아저씨가 되고 싶지만 현실은 다르다. 길거리에서 매일 마주치는 퉁명스러운 중년들처럼 나는 아마도 성마르고 지루한 비호감의 아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가까운 동년배 친구 중에는 앞의 이상적인, 닮고 싶은 아저씨도 분명 있는데 말이다. 내 주변을 잘 아는 이들은 누구를 말하는지 금방 눈치챌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의 친구도 지방 강연을 위해 탄 KTX 안에서는 독서를 방해하는 전화통화들과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 시끄러운 대화들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친척을 욕하고, 용돈을 덜 줬다고 자식을 험담하고, 아이의 대학 합격을 자랑하는 대화를 SNS에 고자질하며 괴로움을 토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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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소비지옥’의 민낯 겨울옷을 정리하려고 옷장 문을 열었다. 이거, 옷이 너무 많잖아. 매일 옷을 꺼내 입고 벗어두는 옷장이건만, 켜켜이 쌓이고 걸린 옷들을 보고 새삼 놀랐다. 버리고 정리하기를 잘한다고 자부하는 데다가 새 물건 사기를 최소한으로 한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정리를 잘 못하는 아내는 나를 보고 가끔 ‘무자비하다’고 표현하지만, 쌓인 옷들을 보니 나는 무자비한 게 아니고 무심한 쪽이었다. 옷들의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중에는 10년을 넘어 20년이 더 된 옷들도 꽤 섞여 있었다. 언젠가는 아내가 버리려고 내놓은 옷들 중에 아주 오래된 여름 티셔츠를 발견하고 한참을 망설인 적이 있다. 너무 빨아서 천이 얇아지고 색이 빠진 데다 군데군데 터진 부분이 여러 곳인 티셔츠를 손에 들고는, 내 영혼의 일부가 버려지는 듯한 기분을 지그시 억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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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클래식 기타 배우기 새해 들어 결심한 것 중 하나는 기타를 배우자는 것이었다. 그냥 기타가 아니라 클래식 기타. 평생 다룰 줄 아는 악기 하나 없다는 게 말이 안되는 것 같았고, 그중 기타가 만만해 보였다. 지금 중장년인 세대에게 ‘청바지에 통기타’는 젊은 시절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어서 나도 간단한 포크송 정도는 뚱땅거린 경험이 있다. 하지만 동네 형이나 누나에게 배운 기타는 한계가 뻔해서 도무지 실력이 늘지 않았고, 기본 코드로 칠 수 있는 곡 몇 개를 배운 다음에는 곧 시들해져서 관두고 말았다. 기타를 새로 배우기로 결심했으니 장비 일습부터 갖추어야 했다. 무릇 프로의 시작은 장비 아니던가. 기타 학원의 원장이 나를 보더니 “장비로는 당장 무대에 올라도 되겠어요”라며 놀려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리를 해서 장비를 갖춰놓으면 들인 비용이 아까워서라도 결심이 오래간다는 게 우리들의 지론이다. 자전거 속도가 안 나는 건 싸구려 자전거 탓이고, 요리를 못하는 건 삼중바닥 다이아몬드 코팅 프라이팬이 없기 때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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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소중한 ‘나’ 1월 중순이 되도록 눈이 없는 겨울인지라 충청북도 깊은 산골의 산들은 메마르고 쓸쓸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시골 기차역 플랫폼은 바람이 휭휭 불어 더 황량했다. 1박2일의 여행을 함께하고 집으로 가는 청량리행 무궁화호를 기다리며 일행 한 명이 긴 한숨을 섞어 말했다. “앞으로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이 정도만 살고 아침에 눈 뜨지 말고 그냥 죽었으면 좋겠어요.” 짧은 여행, 긴 대화 끝에 내린 무슨 결론 같았다. 다른 일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고통 없이 그냥 마칠 수만 있다면 저도 딱 그래요.” 50대 초반의 한 언론사 부장과 60대를 바라보는 번역가가 서로에게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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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책’이라는 물건의 본질 만들고 있는 책에 ‘본질주의’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와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우리에게 변치 않는 정체성 같은 건 없다는 말을 하려고 저자가 ‘본질’이라는 표현을 자꾸 쓰고 있는 것이다. 부실한 기억이나 반복된 상상이 만들어낸 산물을 엄격히 가려낸다면 우리가 사물, 인간, 집단에서 흔히 찾는 정체성이나 본질은 의외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한때 하이파이 오디오에 빠져 지낸 적이 있다. 오디오 애호가로 공력이 붙으면 웬만한 납땜질과 수리 정도는 직접 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전자기기치고는 상대적으로 단순한 구조인지라 좋은 소리를 내려고 밤낮 기기를 주무르다보니 물리가 트였다고 할까? 앰프에 꽂힌 진공관은 물론이고 각종 소자에다 내부선재까지 바꾸는 일도 허다하다. 그러다보면 우스운 생각도 든다. 원래의 것이라곤 거의 케이스밖에 남질 않았는데 이 오디오가 그 오디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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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그놈의 감나무 때문에 회사일로 분주한 한낮에 아내가 전화를 해왔다. 평소 묻거나 알릴 얘기가 있으면 문자메시지를 이용하는 터라 전화를 받을 때부터 무슨 큰 사달이 났나 싶어 긴장이 되었다. 아내는 화를 억누르느라 거의 울먹이는 상태로 말했다. “엄마가 햇볕이 안 든다고 집을 나가시겠대.” 인근에 홀로 살던 장모님과 합친 지 한 달째였다. 딸만 둘인 처가인지라 연세가 더 드시면 두 딸 중 한 집이 모시는 게 당연했고, 처형네보다는 우리가 그나마 형편이 맞았다. 근처로 당신이 이사를 올 때부터 조만간 모셔야겠거니 생각했으므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한 달 이상 부부가 땀을 빼며 방방마다 묵은 살림을 정리하고 장모님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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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불의의 방관자, 가난을 잊은 사람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요,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함을 받을 것이요….”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에 나오는 이 구절은 흔히 ‘팔복(八福)’이라 하여 가장 많이 인용되는 말씀의 하나다. 윤동주 시인이 팔복의 하나를 모티브로 삼아 쓴 시도 유명하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시인은 다른 팔복은 다 제쳐두고 하나만을 팔복이라며 여덟 번 반복하더니, 갑자기 기대를 배반하듯 그들이 위로는커녕 ‘영원히 슬플 것’이라고 한다. 이 시를 처음 접했던 학생 시절, 마지막 구절에 몸서리를 쳤던 기억이 난다. 바닥조차 없는 시인의 막막한 절망이 어린 마음에도 사무쳤나보다. 사람들은 그래서 이 시를 일종의 풍자시이자 절망시라고 평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어떤 평자들은 시인 스스로 슬픔과 절망을 껴안고 영원히 함께 애도하는 ‘행복한 몰락’(김응교 시인)이라 이해하기도 한다. 우리는 슬픔의 자발적인 수용으로 복락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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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지면 낭비 일에 지쳤고, 날마다 이어지는 약속과 술자리로 피곤이 쌓였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칼럼의 순서가 돌아와 글을 강요한다. 오늘은 그 요구에 공백으로 답하고 싶다. 글자에 글자를 이어붙이고 단어들을 엮어내지만 기실 글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기호들이 모여 의미를 전달한다는 건 우리의 오랜 환상이다. 우리들의 기억은 구성되었다. 당연히 그랬으리라는 추정, 동일한 패턴으로 반복되는 상상을 가지고 우리는 기억한다고 믿는다. 누가 만들어준 이데올로기, 습관화된 단어, 공식적인 표현들에 의지해 우리는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마르크 블로크는 말했다. “역사가에게는 애석한 일이나, 사실이 바뀌었다고 해서 그때마다 어휘까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이미 오래전에 사실을 떠나 화석이 된 말이 새롭게 달라진 사실을 가리키는 데 쓰인다. 그러므로 당신이 듣는 것은 내가 말한 것이 아니다. 사실은 나도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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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이 세상의 크기 <우리 집 위층엔 킹콩이 산다>라는 어린이 책이 있다. 아파트 주민들 사이에서 흔히 벌어지는 층간소음 문제를 아이들 눈높이에 맞게 풀어낸 책이다. 조금만 뛰어도 쏟아지는 어른들 꾸지람 때문에 속에서 들끓는 ‘킹콩’을 꾹꾹 눌러 잠재워야 하는 아이가, 위층에 사는 또 다른 ‘킹콩’을 알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아래윗집 사이에서조차 교류와 소통이 단절되고 이해와 배려를 키울 기회를 갖지 못해 벌어지는 갈등과 적대감을 아이들은 상상 속의 ‘킹콩클럽’을 결성하여 나름 슬기롭게 해결한다. 어느 시인은 10분 안에 층간소음을 영원히 없애는 비결을 소개한 적이 있다. 위층에서 발 구르는 소리가 심할 때 과자봉지나 아이스케이크를 사들고 윗집 벨을 누르는 것이다. “이 집에 개구쟁이 아이가 있나봐요? 어떤 녀석인지 이거라도 주려고요.” 그렇게 아이 얼굴을 확인하고 나면, 그날부터 신기하게도 층간소음이 싹 사라진단다. 소리가 들리면 ‘아, 요놈이 자지도 않고 또 뛰는구나. 개구쟁이 녀석…’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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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호모 쓰레기쿠스 향유고래는 진화의 역사가 만들어낸 가장 장엄한 생물이다. 지난 2월 스페인 남부 해안에 죽은 향유고래가 떠밀려왔다. 죽은 고래의 몸속에는 29㎏의 플라스틱이 들어 있었다. 중국은 전 세계 폐플라스틱과 폐비닐의 절반 이상을 수입하는 나라다. 플라스틱 재처리로 먹고사는 노동자 가족을 다룬 영화 <플라스틱 차이나>로 인해 중국은 폐기물 수입금지 조치를 내렸고, 지난 4월 한국에서는 쓰레기 분리수거 대란이 일어났다. 카리브해 도미니카공화국의 아름다운 산토도밍고 해안에 각종 플라스틱 쓰레기가 해일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 500명의 인력이 하루 60t씩을 수거하고 있지만 또 그만큼이 밀려온다. 유엔환경계획에 따르면 매년 800만t의 플라스틱이 전 세계 바다에 버려진다고 한다. 이것은 평균 4t 정도인 코끼리 200만마리에 해당하는 무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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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예멘 커피’와 이슬람 예멘 커피는 커피 애호가들이 최고로 꼽는 커피 가운데 하나다. 자메이카 블루마운틴, 하와이안 코나, 예멘 모카를 묶어 ‘세계 3대 커피’라 부르기도 한다. 호되게 값이 비싼 블루마운틴이나 코나 커피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접근할 만한 가격이어서 가끔 마시곤 한다. ‘모카’는 커피를 수출하던 예멘의 항구 이름인데, 우리가 익히 아는 에티오피아 커피들도 이 항구를 통해 수출을 해서 같은 이름이 붙었다. 여기서 수출하던 커피가 얼마나 맛이 좋았는지 ‘모카’는 아예 일반명사가 되어버렸다. 예멘 모카가 가진 진한 초콜릿 맛을 재현하려고 커피에 초콜릿, 코코아를 넣다가 아예 초코 맛을 내는 식음료에 모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우리가 자주 마시는 달달한 카페모카는 예멘 모카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코코아시럽을 듬뿍 넣었다는 뜻이니까 헷갈리지 말자. 에스프레소를 뽑는 가정용 기구에도 ‘모카포트’라는 말이 붙어있으니 모카는 커피의 대명사쯤 되겠다. 한번은 인터넷에서 ‘목화커피’라고 쓴 것을 보고, 모카가 한국에 와서 참 고생이 많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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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나흘간의 드라마 상투적인 표현을 용서하시라. 한 편의 숨 막히는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지난주 목요일 밤 트럼프의 회담 취소 발언, 금요일 밤의 번복, 토요일의 2차 남북정상회담, 그리고 일요일 문재인 대통령의 기자회견과 트럼프의 북·미 정상회담 재확인 발언까지, 하루하루가 반전의 연속이었다. “아, 멀다구 하믄 안되갔구나” 하던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말을 실증이라도 하듯이, 판문점에 달려가 얼굴을 맞댄 두 정상의 행보는 이 드라마의 압권이었다. 남과 북은 언제라도 ‘번개’를 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는 것이다. 지리나 생태환경 등 자연 요소가 정치학의 숨은 구성원이라는 포스트모던 지리학의 주장도 있지만, 그 논지가 이런 방식으로 증명될 줄은 몰랐다. 나는 그 시간 동네친구들과 번개 모임을 가지면서 정상들도 ‘번개’를 한다는 데 대해 유쾌한 농담을 주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