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숙
교육지 ‘민들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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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이번엔 체험학습을 없앨 건가 만난 적 없지만 알던 사이 같다. 체험학습을 떠난 초등학생 가족이 실종되었다면서 언론은 줄곧 아이 사진과 실명을 공개하며 기사를 냈다. 그새 익숙해진 이름과 얼굴, 광주에 사는 유나는 ‘제주 한 달 살이’를 떠난 후 실종 한 달여 만에 수심 10m의 바닷속에서 발견됐다. 교육계는 또 ‘체험학습’으로 들썩인다. 실종자들을 발견한 다음날, 교육부 차관 주재로 연 대책 회의에서는 교외체험학습 학생관리 방안을 강화했다. 연속 5일 이상 체험학습을 신청하면 담임교사가 주 1회 이상 학생의 안전을 확인할 것을 권고하는 안이다. 일부 언론들은 아동학대와 방치를 조장하는 허술한 제도라며 체험학습 자체를 비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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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안과 밖 인간적인 만남이 가능한 학교 2학기 전면 등교 소식이 들린다. 주 5일 등교가 ‘교육의 정상화’를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서적 우울, 돌봄 격차, 기초학력 저하…. 코로나19 장기 팬데믹으로 일그러진 일상의 리스크를 안고 아이들은 다시 긴 시간 학교에 머무르게 되었다. 코로나19로 학교의 역할이 명징해졌다. ‘학습’ 공간으로만 여기던 학교가 그에 못지않게 ‘친교, 돌봄, 복지’의 공간이었음이 드러났다. 개인적 돌봄에 취약한 학생들일수록 ‘학교가 전부였다’는 사실도 또렷해졌다. 앞으로의 교육개혁도 그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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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안과 밖 교사로서의 자리 ‘스승의날’이라고 30대가 된 제자들이 연락을 해왔다. 고맙고도 민망한 일이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스승이 웬 말이냐고, 이젠 술친구나 하자고 해도 ‘쌤’이란 호칭을 잘 놓지 않는다. 그들은 고마웠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시절의 미숙함이 먼저 떠오른다. 20대 중반의 풋내기 선생 시절, 망아지 같은 사춘기 아이들을 감당하지 못해 툭하면 울고 화내고 야단쳤다. 마음만 앞서고 몸은 따라주질 않으니 용을 쓰다가 방학식을 마치고 나면 시름시름 앓았다. 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외려 내가 목격한 훌륭한 선생들은 ‘선생’이란 이름을 달고 있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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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안과 밖 아동학대를 끊는 실마리 모든 생명은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간다. 그중엔 더 절대적으로 남에게 제 목숨을 의지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생명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어린이가 그렇다. 온전히 어른에게 제 삶을 맡기고 있다는 점에서 어른에겐 그들을 안전하게 돌보아야 할 절대적 의무가 있다. 비극적인 아동학대 기사가 연일 이어지는 가운데 의료진이나 교육, 아동복지 종사자를 대상으로 하는 아동학대 신고의무제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학대가 의심되는 아동을 만나도 교사들은 신고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가장 큰 이유는 아이가 원치 않아서다. ‘자신 때문에 부모가 경찰에 잡혀갈까봐’ 두려운 아이들은 둘러대며 학대를 부인한다. 신체에 흔적이 없는 경우 정황만으로 신고를 결심하긴 더욱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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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안과 밖 인권교육, 개념을 바꿔라 예전에 담임을 했던 학생 중 선천적으로 한쪽 팔이 없는 아이가 있었다. 입학식 날 선우(가명)는 두꺼운 점퍼 안에 의수를 끼고 강당에 들어섰다. 불편하다고 안 하고 다녔는데 새 친구들을 만나려니 긴장이 되었는지 다시 의수를 찾더라고, 어머니가 귀띔해 주었다. 날이 풀리고 긴장도 풀리자 선우는 의수를 빼서 다른 한 손에 들고 다녔다. 정신없이 놀다가 어디다 뒀는지 몰라 “내 팔 봤어?” 하면 친구들이 함께 찾아줬다.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축구를 한다고 쌩하니 뛰쳐나가는 바람에 급기야 의수는 교실 창가, 운동장 벤치, 여기저기 나뒹굴다 눈에 띄는 아이들의 장난감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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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안과 밖 코로나19가 바꾼 교육의 지형 지난해, 교육에서 드러난 큰 차이 중 하나는 지역별 등교 일수였다. 수도권에선 등교 일수가 20일이 안 되는 학교가 있었던 반면에 지역의 소도시에서는 90일 이상 등교한 곳도 있었다. 지역 전파가 심하지 않던 상반기만 해도 시골 아이들은 날마다 학교를 갔다. 확진자가 거의 없고 유동 인구도 적은 덕분이었다. 길어지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교육 환경의 변화를 꾀하는 움직임이 눈에 띈다. 특히 대도시에 거주하는 가정 가운데 시골로 이주를 고려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당장 귀촌이 어려우면 가족 일부라도 시골로 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보호자들의 시의적인 고민을 반영한 교육정책이 새로 도입되기도 했다. 서울시교육청과 전남교육청의 협약으로 올 3월부터 시행하는 농·산촌유학 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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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안과 밖 코로나19가 ‘해방’인 아이들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 3단계를 놓고 고심하는 정부를 향해 “차라리 다 봉쇄하고 빨리 끝내자”는 극단적인 반응이 쏟아진다. 긴 불황을 견디기 힘든 소상공인들도 시위를 하고 소송을 걸며 저항하기 시작했다. 입장이야 다양하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하루빨리 ‘코로나 사태가 종식되길’ 간절히 바란다는 것이다. 이런 틈새에서 코로나19 사태가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이들을 발견하고 놀라는 중이다. 아이들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주변에서 속속 증언하는 바로는 꽤 여럿이다. 지인들과 온라인으로 송년회를 하는데 한 멤버가 말했다. “우리 애는 코로나가 안 끝났으면 좋겠대요. 졸업할 때까지 계속 온라인으로 하면 좋겠다네요.” “실은 우리 애도 그래요. 새벽같이 일어나 학교 갈 일이 없는 것만으로도 삶의 질이 높아졌대요.” “우리 조카도 좋아해요. 억지로 학원에 안 가도 된다고.” 여러 목격담이 쏟아지는 중에 중학교 교사인 멤버가 쐐기를 박는다. “우리 반에, 그런 애들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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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안과 밖 교육과 보육 사이 코로나19가 다시 확산 추세다. 거리 두기 2단계 시행으로 유치원, 초·중학교 등교 인원이 3분의 1로 제한된다. 아이들은 일주일에 1~2일 학교에 가거나 학년별로 3주마다 돌아가면서 등교해야 한다. 추석 이후 정상등교를 하는가 싶더니 2개월도 못 되어 원점이다. 그간 친·인척 찬스에 각종 휴가를 끌어다 쓰며 버텨온 맞벌이 부모는 초등 저학년 아이를 혼자 둘 수 없어 애가 탄다. 매 끼니에 온라인 수업까지 챙겨야 하는 현실이 버겁기는 전업주부들도 마찬가지다. 이 와중에 초등돌봄교실이 지자체로 이관될 가능성을 둘러싸고 여러 입장이 대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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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안과 밖 아이들 마음은 누가 돌보나 수능을 50여일 앞두고, 서울 대치동 학원 강사의 코로나19 확진으로 비상사태다. 강남구는 무증상 감염자를 고려해 관내 2만여명의 강사들을 전수검사하기로 했다. 수능 보는 날 혹여 방해될까 비행기까지 멈춰 세우는 입시대국의 위력이다. 코로나19로 교문을 열고 닫기를 반복하면서, 학교의 주요 역할이라고 생각했던 ‘지식 전달’은 다른 방법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학습은 온라인으로도, 학원에서도 할 수 있다. 개학을 두 번이나 연기하고 온라인수업을 시작하던 시기에 민들레를 찾아온 한 고등학생이 말했다. “애들 열에 아홉은 학원 다녀요.” 목동의 어느 대형 학원에서는 학교별로 수강생을 모집한다. 아침부터 학교의 온라인수업을 강사가 같이 듣고 예상 시험문제를 뽑아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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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안과 밖 아이들과 손을 쓰자 코로나19의 확산 기세가 한풀 꺾이기는 했지만 혹여 민폐를 끼칠까, 몸 사리며 지낸다. 인파를 피해 한적한 길로 걸어서 출퇴근을 하다보면 요즘따라 자주 들리는 소리가 있다. 골목 주택가 창문 틈으로 새어나오는 리코더 소리, 우쿨렐레 소리. 누가 이사 온 것도 아닌데 윗집에서는 몇 주 전부터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기약 없는 고립감을 이겨내려는, 혹은 새롭게 주어진 삶의 시간을 재구성해보려는 노력의 산물 같다. 재구성의 수단이 ‘인간의 손’이라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코로나 시대에 ‘손’은 바이러스를 옮기는 숙주가 되어버렸다. 경계 대상 1호다. 수시로 위생을 관리해야 하고 타인의 신체에 닿는 것은 상상도 못한다. 남의 손이 닿은 물건에 자기 손을 이어 대는 일도 금지다. 코로나 이전까지 사람들은 ‘손’으로 감정을 나누고 서로를 연결했다. 낯선 이와 인사를 나눌 때, 정든 이에게 반가움과 고마움을 표현할 때 손을 마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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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안과 밖 기후 교육, ‘아끼는 마음’부터 꼰대 기질이 발동하고야 말았다. 민들레에선 점심을 먹고 나면 각자 설거지를 하는데, 물을 콸콸 틀어놓은 채 슬로모션으로 접시 한 장을 몇 분째 닦고 있는 아이 곁으로 가 수도꼭지를 잠그며 말했다. “세제 칠하는 동안엔 물을 잠그면 좋겠어. 아깝잖아.” 새로 채워둔 세제 한 통이 일주일 만에 바닥나고, 둘둘 말아 쓰는 화장지 때문에 사흘에 한 번꼴로 차오르는 화장실 휴지통을 비워야 한다. 교실엔 몇 글자 끄적이다 만 A4 용지들이 뒹굴고, 책상에 음료라도 한 방울 흘리면 그걸 닦으려고 티슈 서너 장을 툭툭 뽑는다. 일일이 지적하기엔 너무 쪼잔한 것들이 쌓였다가 콸콸 틀어놓은 수도꼭지 앞에서 잔소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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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안과 밖 삶, 저마다의 속도대로 상담 전화를 받았다. 부모의 고민은 중3인 아이가 너무 ‘느리다’는 것이었다. 학습도 느리고, 말이 어눌해 또래 관계도 쉽지 않다고 했다. 아이에게 맞는 대안학교를 콕 찍어주길 원했다. 대학을 가야 하니 이왕이면 학력이 인정되는 학교면 좋겠다고. 이 상태에서 입시라니, 아이가 받을 스트레스가 느껴졌다. 지금 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인가받은 고등학교’가 아니라 ‘속도전을 펼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 아닐까 싶었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접근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이 아이의 행동을 ‘문제’로 보는 거다. 어떤 현상을 ‘특성’으로 보는 것과 ‘문제’로 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문제’라고 여기는 순간 교육은 치료이자 계도가 되며, 아이는 ‘당장 뜯어고쳐야 할 하자품’이 된다. 하자품을 바라보는 부모나 교사의 마음은 조급해지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