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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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굴기의 꽃산 꽃글 대나무-산수유-매화 이야기 봄이 왔다. 노랗고 붉고 하얗게. 저 꽃들 속에서 올봄 특히 찾는 게 있었다. 남산으로 나서면서 혹 산수유를 볼 수 있을까, 기대를 했다. 세상에 참 흔한 게 산수유이지만 막상 찾으려니 눈앞에 없기도 하다. 둘레길에 우세한 건 벚꽃과 개나리. 없는 것을 찾으며 두리번거리는 나에게 핀잔이라도 주려는 듯 죽은 나무가 찾아왔다. 남산골 한옥마을로 내려가는 골짜기쯤에 탈색된 나무가 있다. 모두가 활짝 피어나는 마당에 푸르름을 상징하는 일군의 대나무였다. 작년에 퍽 희한한 일 하나를 겪으면서 우연히 집어 든 <삼국유사>에 많은 위로를 받았다. 꼼꼼히 읽어나가자니 내 마음에 사생(死生)과 성속(聖俗)이 함께 구비된 남산보다 더 넓은 동네 하나가 들어서는 듯 망외의 소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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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굴기의 꽃산 꽃글 자두꽃 그늘에서 봄을 맞이하다 날씨는 날氏다. 그이는 날마다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공중의 한 장막을 걷고 나타난다. 그렇다고 봄마저 그런 건 아니다. 봄은 언제나 대지를 무대로 한다. 바야흐로 피어나는 꽃들, 연두에서 초록으로 번지는 산색이 이를 증명한다. 뉴스 화면을 통해 이 알뜰한 계절을 미끌미끌하게 구경하는 건 봄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다. 오늘은 나에게 많은 식물 공부를 이끌어주시는 꽃동무의 누님의 농장을 찾아간다. 김천 농소면 봉곡리의 자두꽃을 잠깐 본 뒤 인근 백마산의 골짜기를 훑기로 한 것이다. 자두는 자도(紫桃)에서 변한 것으로 오얏나무라고도 한다. 오얏(李)은 내 성씨에 꽉 맞물려 있는 것이니, 신축년의 봄을 저 자두나무 아래에서 제대로 영접하자니 존재의 바닥을 일깨우는 흥분이 안 일어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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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굴기의 꽃산 꽃글 갑사에서 지렁이를 공부하다 계룡산 갑사는 천년 고찰이다. 대웅전에서 한 끗 비켜난 곳에 마음을 움푹 퍼가는 진경이 있다. 대적전 앞 배롱나무가 좋아 그늘로 가니 할머니 한 분이 승탑 곁에 보물처럼 쉬고 계신다. 슬그머니 돌무덤에 앉았다. 배롱이 참 훤칠합니다, 혼자 오셨나요. 요 아래 공주에 사는데 버스 타고 혼자 종종 나와요. 집에 있으려니 자꾸 등 아래가 푹 파이고 땅이 꺼져 들어가는 것 같아서요. 할머니는 시원스레 말을 잘 이어나간다. 저 나무가 얼마나 아름다운데요, 꽃 피고 곧 열매 맺더니 금방 서리 내리고, 뭐 한 해가 가요. 한바탕 웃음을 남기고 할머니 떠나고 나만 남았다. 할머니의 등 아래가 된 기분으로 배롱나무 아래 “寶物 第二五七號, 甲寺 浮屠” 표지석을 한참 본다. 이 무거운 돌에 왜 ‘뜰 浮’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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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굴기의 꽃산 꽃글 봄빛에 마취된 어떤 몽상 환하다. 따뜻하다. 눈부시다. 봄이 오면 가장 크게 변하는 건 햇빛이다. 햇빛은 부피를 가지지 않는다. 제가 만나는 그것을 모두 그것으로 만들어준다. 산에 들어가서 숲, 강에 뛰어들어 강물, 바위를 만나면 고대의 침묵을 빚어낸다. 물오른 물참대 가지처럼 빳빳하게 내리꽂힌 햇살 사이로 걸어간다. 낙엽은 제 본래의 모양과 색을 모두 버렸다. 세상에게 받은 것은 고스란히 세상한테 돌려준 뒤 지하로 녹아드는 잎들의 최후. 경북 경주와 포항의 한 경계인 운제산 산여계곡. 운제(雲梯)는 구름의 사다리이다. 원효, 의상, 자장, 혜공. 숱한 고승들이 산과 계곡을 오르내리며 수행할 때 구름을 사다리 삼았다는 뜻을 살린 이름이다. 혼자 특출하게 높은 산은 없고 모두들 다정하게 어깨동무한 형제들처럼 봉우리와 능선이 죽 이어진다. 신라의 배후가 되는 이 산이 내어준 길을 걸을 때 무언가 신령한 기운에 휩싸이는 건 이런 풍수와 지리의 덕분일 것이다. 인걸은 가고 없지만 이름은 아직도 남아서 풍광을 휩싸고 돈다. 바람을 타고 눈빛 형형한 도사가 뛰어나올 것 같은 저 신통한 골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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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굴기의 꽃산 꽃글 군위 인각사의 향나무 늦었다. 늦은 아침을 먹고 느긋하게 나섰다. 고향과 절은 저물어가는 저녁에 닿는 것이 좋다지만 마음이 좀 급해졌다. 국도에 접어들어 급격한 각도로 몇 번 핸들을 꺾다 보니 방향 감각이 마구 헝클어졌다. 이렇게 모르는 상태, 그게 좋았다. 산 그림자가 길게 덮치는 길에 드디어 이정표가 나타났다. 한 고개를 넘었더니 아연 기린의 머리를 연상케 하는 봉우리가 딱 버티고 서 있다. 군위군 삼국유사면 삼국유사로. 어젯밤 읽은 <삼국유사>의 한 장면 속으로 미끄러지는 듯 기이한 느낌이 일순 휩싸고 돌았다.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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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굴기의 꽃산 꽃글 거제 해금강의 동백에 포개는 진달래꽃 뭍과 물이 다투는 남녘 바닷가. 지난여름 치열했던 땡볕을 바다는 솥처럼 속으로 잘 갈무리했다. 이제 그 온기를 풀어놓으니 벼랑 끝의 바위에도 신축년의 봄기운이 낭자하다. 해금강이 환히 보이는 거제 우제봉. 그 어느 곳에도 하나 뒤질 것 없는 높이와 깊이가 팽팽한 평형을 이루고 있다. 남해의 훤칠한 상록수들이 늠름히 기지개를 켤 때, 멀리 낮은 섬들도 겨우내 웅크렸던 자세를 푼다. 바다에서 막 올라오는 공룡이 한 발을 파도 사이로 내밀며 기회를 노리는 듯한 바위 해안선. 동백꽃으로 장식된 초록터널을 통과하는데 발길을 붙드는 풍경 하나가 있다. 가뭄이나 농약을 살포할 때의 물을 보관하는 대형 물통. 아무렇게나 휙 갖다 놓을 수도 있겠으나, 그 품새가 예사롭지가 않다. 쪽빛 바다를 빼닮은 물통의 밋밋한 껍질에 단정한 글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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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굴기의 꽃산 꽃글 계수나무 가지에 걸린 달을 보는 뜻 2021년이 열리고 벌써 한 달하고도 열흘이 흘렀다. 신축년은 이제야 비로소 밝았다. 둘을 구분해야 하는 건 작년에 배웠다. “요즘 경자년, 쥐의 해가 어쩌고저쩌고하는 기사가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경자년이 되려면 아직 20일 가까이 기다려야 한다. 갑자년이니 을미년이니 하는 육십갑자의 기준은 양력이 아니라 음력이기 때문이다.”(엄민용, ‘말글 나들이’) 2021년과 신축년. 격을 갖추고 때에 맞게 둘을 호명하니 나무의 가지와 줄기, 풀의 꽃과 잎을 구별한 듯 마음이 개운하다. 어린 시절 그렇게 설레게 기다렸던 설이 어느 때부턴가 시무룩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올해처럼 이렇게 싱겁게 넘어갈 줄은 미처 몰랐다. 절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몸을 제대로 구부리는 동작을 만들지 못했으니 꺾어지는 생각도 없다. 세월이 빠르다는 건 시간과 그에 맞물리는 사건이 아무 고리도 없이 각자 뿔뿔이 흩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겨우 열흘 남짓 지나가는 신축년의 설날이 벌써 흐지부지 옛일이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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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굴기의 꽃산 꽃글 꽃을 사랑한 동굴 화가의 후예들 2월, 학년이 올라가고 교실을 이동하는 시기.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터득되는 슬픔이 왔다. 정든 짝꿍과 헤어지는 와중에 새 교과서를 받는 은밀한 즐거움도 있었으니 국영수는 뒤로 미루고 체육과 미술, 지리부도를 즐겨 보았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건 각종 신기록의 육상선수들과 알타미라 동굴 벽화. 모든 학창 시절을 청산하고 넥타이 매고 사회로 진입할 땐 여기도 한 동굴이 아닐까, 아득하고 캄캄했다. 남산터널에 버스가 갇힐 때도 있었으니 시계를 보고 창밖을 더듬으면 차의 꽁무니가 휘갈긴 치졸한 낙서뿐이었다. 어느 해 여름휴가에 접한 울산 반구대 암각화의 수승한 그림들. 이런저런 자료와 체험을 바탕으로 짧은 글을 끄적여 보았다. 한 줄기 빛이 찾아드는 순결한 동굴. 마지막 점을 찍은 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사로잡은 들소를 보며, 동굴 화가는 손뼉을 쳤다. 울타리가 없어도 도망가지 않는 사나운 짐승. 가난뱅이 무명 화가는 그림 속에서 먹이 한 톨 얻을 수 없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사냥하러 나왔다가 여섯 대륙으로 흩어진 동굴 화가의 후예들. 고기맛의 문명에 너무 취했나. 옛집으로 가는 길을 까맣게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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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굴기의 꽃산 꽃글 동묘에서 곡괭이를 구입한 하루 느긋한 휴일 아침, 눈이 몹시 내렸다. 이 기세라면 알록달록한 문명을 제로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닐 것 같았다. 이대로 사흘만 쏟아져도 서울은 아득한 태곳적 서라벌로 변하고 남산은 그야말로 우뚝 돌발한 눈탑. 하지만 아무리 과장법을 동원하려고 해도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어쩌면 올해의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눈의 여운을 찾아 남산터널 지나 인사동으로 나섰다. 아직 토막난 골목이 군데군데 숨어 있는 곳. 발자국을 몇 개 찍으며 늘샘 김영택 화백의 전시회를 보았다. 그야말로 수십만 획의 섬세한 선들이 지배(紙背)를 뚫을 듯 은모래처럼 반짝거리는 펜화. 안타깝게도 작가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유고전이 되고 말았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소란스러운 인사동을 빠져나와 걸음을 옮긴다. 북망산으로 가는 듯 종로 지나 동대문 건너 동묘로 간다. 멀리 인왕산은 눈을 아직 받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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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굴기의 꽃산 꽃글 마지막 화전민의 굴피집 처마 밑을 보다가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고서 골목이 없어졌다. 골목이란 호기심의 창고. 그것을 먹고 자라던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처마가 사라졌다. 처마란 하늘을 맞이하는 응접실. 그 아래에서 잠시 비를 긋던 사람들도 이젠 없다. 물론 빗소리도 함께. 지난주 밤늦게 본 다큐. ‘마지막 화전민, 사무곡의 겨울’의 한 장면이 길게 여운을 남겼다. 산에서 태어나 군대생활을 제외하고 팔십이 넘도록 산중 굴피집에서 살아가는 노인. 산이 터전인 노인의 몸에는 산이 그대로 들어앉은 듯하다. 굽은 어깨는 산의 능선을 빼닮았다. 밭 가운데 선친의 묘에 제사 지내고 혼자 앉아 음복할 때 뒷모습. 고단한 등이 두툼하게 솟았다. 휜 등에 작은 무덤이라도 숨기고 있으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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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굴기의 꽃산 꽃글 눈 속의 매미 소리 펄, 펄, 펄, 내리는 눈송이를 보면서 맴, 맴, 맴, 우는 매미 소리를 떠올리는 버릇을 지닌 지가 여러 해다. 매미와 눈. 내리는 방향과 착지하는 자세가 너무 닮았다. 둘이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결정적 근거를 들이댈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증거 또한 어디에도 없다. 같은 자리에서 피고 맺는 꽃과 열매도 서로 만나지는 못한다. 이 겨울의 가운데에서 땡볕의 매미 소리를 소환하는 것으로 냉기는 한결 가시고, 괜히 주눅 든 나의 어깨도 슬쩍 기지개를 켜며 냉랭한 마음 한 조각도 잠시 데울 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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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굴기의 꽃산 꽃글 나무가 제자리를 지키는 까닭 나무가 처음부터 제자리에 머문 건 아니었으니 짐승에 쫓겨 달아나기도 하고, 고사리의 간지러움을 피해 바위 근처로 물러났다가 절벽 위에 멈추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멀리 뻗어 나가던 뿌리가 제 허리를 뒤에서 부여잡는 것을 보고 알게 되었다. 아, 나 있는 곳이 둥근 바닥이로구나. 메아리가 귀로 돌아오는 것처럼, 언젠가는 제 본래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삐거덕삐거덕 노 젓듯 팔 흔들며 돛단배처럼 돌아다닌다. 외출도 하고, 섬에도 건너가고, 어쩌다 외국에도 가보았으나 손오공이 부처님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듯 저 나무들의 둘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나도 결국 원점 회귀하듯 귀가해야 하는바, 이 또한 세상이 둥글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