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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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굴기의 꽃산 꽃글 소백산천문대 가는 길의 꽃과 별 죽령에서 아득히 꼬부라지는 소백산 등산로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날이 갈수록 내 문명의 발상지는 눈도 아니고 손도 아니라 발등에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하늘의 한 귀퉁이에서 출발하는 해를 따라 오늘도 또 걸어보자. 소백산천문대까지 완만한 시멘트 길이 내내 이어졌다. 가랑비가 간간이 흩뿌리는 날씨. 내처 오르기만 한다면 가쁜 숨이 악착같이 들러붙겠지만 서로의 자리를 고유하게 차지하는 꽃들 덕분에 그리 힘들지 않고 발등을 옮긴다. 입구에서부터 자꾸 고개를 숙이라 하는 식물들의 몸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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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굴기의 꽃산 꽃글 소백산천문대 옆 둥근이질풀 그저 넓고 큰 것을 좋아하는 게 세태라지만 산들은 좁은 곳을 지향하면서 하늘이라도 찌를 듯 오르다가 마침내 정상을 완성한다. 그래서 이 높이를 획득하고, 저 깊이를 아래 세상으로 훅 찔러넣는다. 소백산 오르는 길. 죽령-소백산천문대-연화봉-비로봉으로 간다. 그 이름이 대백(大白)이 아니라 소백이어서 크다는 것을 더욱 실감하는 산. 사람들이 태풍을 무서워하고 여름의 더위를 걱정하는 동안 벌써 식물들은 해야 할 일들을 착착 수행하고 있다. 열매는 여지없이 모두 둥글고, 잎은 더욱 둥그렇게 변해간다. 나무의 줄기도 각진 것이 없다. 물론 소백산표 꽃들도 동그랗고 무척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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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굴기의 꽃산 꽃글 북한산 비봉 아래 바위채송화 아주 뒤늦게 한문을 배우려고 전문기관에 응시했다가 보기 좋게 미끄러졌다. 공자와 맹자가 내겐 너무 버거운 노인이었다. 임서(臨書)라면 노안 탓이라도 하겠는데, 시험에서의 모자란 실력을 어디에 하소연하랴. 나에게 남은 시간을 고려한다면 이 시험이 마지막일 테니 불합격자의 꼬리를 떼지 못한 채 그곳으로 가야 한다. 우리 사는 세상이 잘 안 되기는 무지 쉽고, 잘되기가 너무나 어려운 곳임을 예전에 알았다지만 야속한 마음이 전혀 없다고 하는 건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겠다. 어찌하겠나 ‘아니 불(不)’의 위력을 미처 챙기지 못한 나의 이 불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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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굴기의 꽃산 꽃글 오대산의 멧돼지와 풀솜대 오대산 비로봉에서 상왕봉으로 가는 능선은 완만하고 두툼한 산길이었다. 배가 불룩한 황소의 등에라도 올라탄 듯 능청능청 기분 좋은 산행이 이어졌다. 이 높은 지대에 웬 물일까. 대수롭잖게 여겼는데 물기가 촉촉한 곳이면 어김없이 멧돼지의 소행인 듯 흙이 마구 파헤쳐졌다. 단단했던 땅이 깊은 상처를 입고 흙으로 변해 그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검게 번들거리는 흙을 가볍게 한 줌 쥐어 보고 지나쳤는데 꽃동무가 어깨를 툭 치더니 말라가는 풀솜대를 건네주는 게 아닌가. 멧돼지한테 받혀서 뿌리째 뽑힌 것이니 가져가서 한번 키워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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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굴기의 꽃산 꽃글 오대산 적멸보궁 앞의 구슬붕이 귀에 대해 궁리해본다. 신체발부 중에서 가장 상부에 속하는 귀는 어쩐지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세수할 때도 그것만 쏙 빼놓고 씻지 않는가. 귀는 누가 몰래 내 생각을 한 삽 푹 뜬 뒤 자루만 달랑 빼들고 가버린 것 같기도 하다. 뜨거운 냄비를 들다 앗, 뜨거울 때 찾는 건 귀. 몸에서 손가락보다 더 먼 변방, 가장 추운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 노자나 공자를 생각하더라도 그렇게 소홀히 대접해야 할 귀가 아니다. 오대산 오르는 길. 우리 사는 세상 쪽으로 나와 궁금한 눈길로 두리번거리는 야생화들이 많다. 이맘때면 거의 모든 등산로에서 눈 밝은 이들의 발길을 붙드는 건 초롱꽃, 노루오줌. 이름이 좀 사나워도 서슴없이 얼굴을 들이대면 향기 혹은 털이 코를 찌른다. 어느 돌계단 옆에선 그 귀한 청닭의난초가 있어 일순 내 꽃동무들을 불러 모아 엎드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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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굴기의 꽃산 꽃글 발왕산, 그림자, 일식 그리고 열쇠 평창의 발왕산은 만만한 산이 아니다. 희미한 등산로를 따라가는데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평전이 나온다. 걸음을 조절하여 일행과 뒤떨어져 혼자 있는 풍경을 만들어 본다. 어디선가 새 울음이 들리는 ‘옴방한’ 공간에 나를 밀어넣었다. 아무리 깊숙한 산중이라도 물리의 세계는 변함이 없다. 나무들은 크고 풀들은 작다. 이끼 덮인 돌에 내 그림자가 덮칠 땐 둘이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듯 묘한 느낌을 연출하였다. 아연 숙연한 기분이 들 때 나는 문득 내 나이를 생각하였다. 이건 지난 주말 나에게 틀림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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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굴기의 꽃산 꽃글 발왕산 헬기장의 쥐오줌풀 앗, 쥐오줌이네! 앞장서 가던 일행이 한마디 던졌다. 등산지팡이 끝에 다소곳이 서 있던 꽃은 이제 막 피어나려는 쥐오줌풀이다. 나도 안다. 저 꽃의 활짝 피어난 아름다움을! 그런데 웬 오줌? 몸 안에서야 어디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성분이지만 몸 바깥에서야 어디 그런가. 우리나라 식물 이름에 참 사나운 게 많다. 그래도 저 정도면 얌전한 편에 속한다. 식물 이름 입에 넣고 중얼거리자고 했건만 여기에 열거하기가 좀 민망할 만큼 사나운 이름들. 말과 글을 독점하는 인간들의 횡포가 이리도 심하다. 톨스토이의 <크로이처 소나타>는 원래 베토벤의 작품을 모티브로 쓴 동명의 소설이다. 베토벤이 작곡한 이 바이올린 소나타는 이름에 관해 흥미로운 사연이 있다. 원래 이 곡은 베토벤이 친구를 위해 작곡하고 둘이서 초연까지 마쳤다고 한다. 그런데 뒤풀이 자리에서 그가 베토벤의 여자친구를 비난하자 화가 난 베토벤이 헌정을 취소하고 일면식도 없는 크로이처에게 이 곡을 주었다는 것. 그래서 이름이 ‘크로이처 소나타’가 되었다는 것. 식물학자 칼 폰 린네는 뒤죽박죽이던 이 세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사람이다. 천지사방의 이름 없던 식물들에게 정식 명칭을 부여한 이른바 이명법을 확립하였다. 분류학의 아버지인 린네는 해롭고 추한 식물에 자신이 미워하는 적들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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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굴기의 꽃산 꽃글 화천 산소길에서 만난 버들개회나무 검은 뿔테 안경을 처음 쓴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참 가소로운 치기였다. 칠판 앞에서 코끝으로 내려온 안경을 검지로 슬쩍 밀어 올릴 땐 텔레비전이 아니라 공부 때문에 눈이 나빠졌다는 은근한 자부가 있었던가. 얼굴에 부착하는 이물질이 안경으로 족하려니 했는데 난데없이 마스크가 들이닥칠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다. 한번 나빠진 시력을 다시는 돌이킬 수 없듯 잠깐 쓰고 벗을 마스크가 아니다. 이 얄궂은 물건이 찰거머리같이 오래 들러붙을 것이란 불길한 예감. 이 마스크 한 장의 사회학을 어찌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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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굴기의 꽃산 꽃글 관악산 어느 돌 틈에 핀 병꽃나무 불교는 현상인가. 오래전 궁리에서 펴낸 <세계의 깊이>(김우인 엮음)를 초파일에 즈음하여 빼내들었는데 저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그간 지식이란, 접시에 담긴 콩자반처럼 젓가락으로 집어야 내 것이 되었다. 책 몇 권 읽은 게 전부인 불교에 대한 교양도 그런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불교가 현상이라는 말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관악산은 여러 골짜기를 거느린 큰 산이다. 오래전 한 골짜기를 뻔질나게 드나들었지만 전공과의 불화를 톡톡히 겪으며 얼른 벗어났다. 오늘은 사당역에서 시작해서 옆 골짜기를 오른다. 골목이 끝나고 관음사 일주문에 현수막이 있다. “만유는 인연이고 인과는 현상이다.” 무슨 말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무슨 뜻인지 대강 알아먹겠는 글귀이다. 조금 용감하게 무식에 기댄다면 만유는 현상이라 해도 되겠고, 현상이란 말은 곧 공(空)으로 연결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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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굴기의 꽃산 꽃글 빗방울에 젖은 당단풍나무의 잎사귀들 겨울엔 비가 좀 뜸하긴 해도 경자년에 들어서 가뭄이 좀 심했다. 그 좋아하는 눈도 올해는 예년에 비해 많이 모자랐다. 덕분에 낙엽의 비명은 더 커지고 마른 먼지가 콧구멍으로 마구 들이닥쳤다. 뜻밖의 코로나19에 발목이 붙들려 문지방이나 지키다가 5월에 들면서 조금 사정이 나아졌다. 기후가 달라지고 시절을 아는 고마운 비가 드문드문 내린다. 빗소리를 인수분해하면 물과 소리이다. 물은 공중에서 떨어지고, 소리는 지상에서 나온다. 세상의 만물은 어찌할 수 없는 기쁨과 서러움을 아무도 몰래 내부에 간직하고 있는가 보다. 하늘이 손을 길게 뻗어 툭툭툭 건드려주면 저렇게 화들짝 놀라운 소리를 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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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굴기의 꽃산 꽃글 내 마음속 외가 같은 금괭이눈 저술등신(著述等身). 키만큼 책을 쓴다는 뜻이다. 본인 신장 높이의 책을 쓰는 저자들도 있지만 이제 내 몫은 등신같이 독서하기에도 빠듯하다. 시절이 시절이니만큼 망설이다 산으로 간다. 예보대로 아침부터 비가 뿌렸다. 강원도 횡성의 청태산. 산림휴양림 입구에서 소정의 절차를 밟고 산을 오를 때 기이한 문자처럼 나무가 울창하다. 우중의 산을 거슬러 오르자니 큰 책 속을 거니는 기분이었다. 외계인이 끄적거린 낙서 같은 이끼를 비롯해 모든 식물들은 세상의 비밀을 적어놓은 암호문. 나보다 키가 몇 배나 큰 산. 돌 틈 사이 서 있는 도깨비부채 옆에서 도(道)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달콤한 비, 축축한 안개, 추락한 구름이 빚어내는 풍경 속에 낯선 이방인같이 던져졌으니 그런 말이 필요했던 것. 도는 그냥 도여도 도인 줄 모르는 도가 가장 좋은 도 아니겠어요! 툭 던지는 말에 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도를 찾아 외가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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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굴기의 꽃산 꽃글 거제도 어느 무덤가의 편백나무 오월은 따끔한 달. 입하와 소만은 물론 복면한 날들이 징검다리처럼 기다린다. 오월에는 비가 자주 와야 한다. 억수는 아니래도 비가 웬만큼 필요한 건 까닭이 있다. 기쁘고 서러운 날들이 줄줄이 대기하는 달, 5월. 이런 마음의 생태계가 고리가 되어 그동안 이곳저곳 산으로 돌아다니며 만났던 여러 무덤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여수에서 훌쩍 건너뛴 거문도에서 동백으로 단장한 무덤. 제주 별도봉 오름에서 왕벚나무와 쥐똥나무가 호위하는 무덤. 그렇게 멀리 가서 햇빛 끝에 서면 이 무덤을 만들 때의 여러 소리들이 바람결에 실려오는 듯하다. 개복 수술하듯 땅을 열어놓은 곳으로 긴 행렬의 만장 펄럭이는 소리, 딸랑딸랑 요령에 맞춰 메기는 상여소리, 뒤따르던 상주들의 타박타박 발소리와 목울대를 치는 곡소리, 지켜보는 조문객들의 탄식소리. 유족들이 흙 한 줌을 손에 담아 관 위로 뿌리고 나면 상여꾼들이 달려들어 흙을 꼭꼭 다진 뒤 봉분을 완성하는 동안 삽과 삽이 부딪치는 소리 속에 길고 느린 노래와 함께 막걸리도 뿌렸지. 이윽고 곡하는 소리가 길게 여운을 끌며 사라지고 막내딸의 흐느낌만 들릴락 말락 할 때, 꼭 등장하는 게 있었지. 해도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어디선가 팔랑팔랑 날아와 한편에 꽂아둔 삽자루에 앉아 망자의 영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훌쩍 몇 바퀴 돈 뒤 떠나는 영리한 나비. 슬프기 이를 데 없는 죽음을 저리도 소슬하게 거두어가는 무덤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