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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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진의 정치시평 혁신하는 자가 이긴다 일부 언론은 황교안 대표의 단식 이후 자유한국당 지지율이 반등했다고 보도했으나, 사실은 그 직전에 잠깐 빠졌던 2~3%포인트를 다시 회복했을 뿐이다. 6개월 전과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5월 말에 자유한국당 지지율은 22%였는데 며칠 전인 11월 말 지지율은 23%로 6개월 동안 딱 1%포인트 올랐을 뿐이다(이하 갤럽 자료 기준). 중간에 많이 올랐다가 떨어진 것도 아니다. 소위 ‘조국사태’가 정점으로 달려가던 10월 중순에 27%를 찍은 것이 가장 많이 오른 것이었다. 자유한국당에 가장 유리한 판국에서도 민주당 지지층 2~3%를 빼앗아 오는 것에 그쳤고, 이들은 한 달 만에 다시 민주당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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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진의 정치시평 공정성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또다시 공정성이 정치적 화두가 되었다. 장관 한 사람과 그 가족을 둘러싸고 두 달 넘게 이어진 공방을 지켜보면서 결국 유탄의 일부는 대학으로 튈 거라는 정도는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교수의 자녀가 다른 교수 논문에 이름을 올리거나 장학금을 받는 일들은 공정성에 대한 사람들의 역린을 자극할 가능성이 매우 높고, 따라서 교육 문제를 넘어 정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역시나 대통령의 정시 확대 발언에 이어 교육부는 각 대학에 정시를 얼마나 확대해줄 수 있는지 타진하느라 여념이 없다는 소문이 들린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대학에서 입시를 가장 잘 아는 입학처장들이나 입시전선의 최전방에 있는 교사들은 정시 확대에 부정적이라고 한다. 이들은 공정성이 필요 없다고 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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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진의 정치시평 결손민주주의 vs 결손민주주의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2016년 12월에 이루어진 조사에 따르면 집회 참여자의 11%가 원래 새누리당 지지자였다. 원래 새누리당 지지자 중에서 지지를 철회한 사람이 60%를 넘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책임을 물은 사람도 50%에 달했다. 새누리당 의원 중 탄핵에 찬성한 사람이 62명이었다. 잠깐이나마 이건 아니라는, 그러니 바꿔야 한다는 정치적 합의가 존재했다는 뜻이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국민은 세 갈래로 나뉘었다. 검찰개혁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사람, 조국 사퇴 광화문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 이도저도 지긋지긋하다며 염증을 내는 사람. 왜 이렇게 되었을까. 결손민주주의를 치유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손민주주의란 정치학자 볼프강 메르켈이 제시한 개념으로, 민주주의냐 독재냐의 이분법을 넘어 민주주의의 외피를 쓰고 있기는 하되 여러 결함을 가진 하위 유형들을 말한다. 시민의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는 비자유민주주의, 시민권을 제한하는 배제민주주의, 선출되지 않은 자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후견민주주의, 통치자가 대의제 민주주의의 파트너가 아닌 시민과 직접 연합하는 위임민주주의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한국의 결손민주주의는 무엇보다 대선개입을 통한 선거체제의 훼손과 위헌적 통치행위로 인한 비자유민주주의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로 인해 쌓여오던 정치적 압력은 소위 ‘최순실사태’를 통해 밝혀진 대로 대통령의 권한을 비선실세에게 넘겨준 가장 저열한 형태의 후견민주주의 행태까지 드러나자 마침내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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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진의 정치시평 조국 임명···좌우 아닌 위아래 '격돌의 시간' 많은 이들이 예상했던 것처럼 문재인 대통령이 조국 법무장관을 임명했다. 놀란 사람은 별로 없어 보인다. 지금의 상황에서 임명을 하든 안 하든 어차피 독이 든 두 개의 잔이다. 임명과 철회 중 어느 쪽을 선택해도 별로 놀랄 일이 아니고, 어느 쪽을 선택하든 지켜보는 심경은 그저 착잡하다. 국회의 시간도 지나고, 대통령의 시간도 지나고, 격돌의 시간이 다가왔다. 대통령과 조국 장관은 야당과 검찰과 언론과 여론을 상대로 격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4중 격돌이다. 격돌의 내용은 무엇일까. 지난 한 달간의 소위 ‘조국 사태’에서 드러난 것들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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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진의 정치시평 혼돈의 시장과 정치의 역할 한·일 무역분쟁이 첨예해지면서 점점 도드라지지만 아무도 묻지 않는 질문이 하나 있다. 바로 기업정책을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요즘 무역분쟁 관련 언론보도를 보면 조금씩 희망적인 소식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앞으로 1년 정도면 우리 기술력으로 이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고, 오히려 피해는 일본의 수출 기업에 돌아갈 것이라는 전망이 대표적이다. 관련 기술을 모르는 사람으로서 실현 가능성을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그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가 하면 큰 피해를 입을 줄 알았던 우리 대기업들이 이미 상당량의 재고를 확보해 놓았다든가 혹은 일본이 아닌 제3국으로부터 대체 수입원을 확보했다든가 하는 소식에 사람들은 환호한다. 우리의 글로벌 기업들이 위기에 빠질 뻔한 나라를 구해내고 있는 것 같은 생각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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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진의 정치시평 한국은 왜 등을 보였나 이번 아베 정부의 계산된 공격은 아프다. 누군가는 등에 칼을 꽂는 행위라고도 했다. 동의한다. 일본은 분명히 선을 넘었다. 물론 일본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한국이 계속해서 일본을 자극했고 거듭된 대화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선을 넘어 갈등을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린 것은 일본이다. 분노한 국민들은 일본 여행을 취소하고 일본산 제품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다. 많은 이들은 외교의 실패를 지적하기도 한다. 도대체 이 지경이 되도록 우리의 외교라인은 무엇을 했느냐는 질책이다.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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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진의 정치시평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의 교훈 “폭발사고다!” 나도 모르게 이렇게 외쳤다. 2009년 5월23일 토요일 아침이었다. 조금은 느긋한 주말 기분에 젖어 침대에서 TV를 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알리는 자막이 떴던 순간의 기억이다. 평소에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단어였는데, 왜 이 말이 떠올랐는지는 모른다. 내가 학교에 몸담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우리의 학교에는 선진국에 비해 안전 인프라가 한참 부족한 상태에서 연구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밤을 새우며 실험하다가 사고를 당하는 일이 간혹 일어난다. 그 장면을 떠올린 것일까. 정당정치와 사회적 합의의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한 한국에서 정치개혁을 위해 단기필마로 분투하다가 마침내 목숨을 버린 그를 보며 폭발사고의 장면을 떠올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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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진의 정치시평 합의의 미래는 있는가 눈만 뜨면 경제정책이 논란거리지만, 길게 보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다. 성장률은 25년째 하락 중이다. 그사이에 정권교체도 여러 번 있었고, 경제정책도 수없이 바뀌었다. 그래도 백약이 무효로 25년째 하락 중이다. 그러니 경제정책 가지고 논쟁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지금 경제가 어렵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지금 정도의 논쟁으로는 답이 안 나올 것이라는 얘기다. 우리는 운 좋게도 제조업 시대의 성장모델에 기적적으로 성공했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 정책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머리카락이 쭈뼛해진다. 제1, 제2 금융권과 국민투자기금 등 국내의 가용한 자금이란 자금은 죄다 끌어다 썼고, 대일청구권 자금과 베트남전쟁 참전을 통해 얻은 자원은 물론 불과 몇 년 사이에 세계 최고 수준의 외채 대국이 되었다. 실패하면 온 나라가 쪽박을 찰 수밖에 없는 일대 도박이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성공할 가능성보다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은 도박에 ‘올인’했는데, 기적적으로 그 판을 휩쓸어버린 것이다. 그 기적을 뒷받침한 정치사회적 기반은 유신이라는 암흑이었다. 아예 반론이 나올 수 없는 조건을 만들어놓고 도박을 벌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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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진의 정치시평 정체성 폐쇄의 정치 “이제 정치 그만둘래.” 알고 지내는 정치인들로부터 가끔 듣게 되는 말이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닌 것으로 들린다. 안타까운 것은 정치를 계속해주었으면 싶은 정치인들 중에서 정치를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점점 더 자주 듣게 된다는 점이다. 당장 몇몇 사람들 얼굴이 떠오르는데, 오늘은 자유한국당 이야기를 할 생각이어서 원래 그 당 출신 중에 꼽자면 얼마 전 정계를 은퇴하고 스타트업으로 제2의 인생을 살겠다고 선언한 남경필 전 경기지사가 떠오른다. 나는 그와 정치적 견해를 온전히 같이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가 꽤 괜찮은 정치인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한계가 있겠지만, 적어도 그는 정치의 의미와 그 부끄러움에 대해 사유하는 것을 아주 멈춘 적은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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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진의 정치시평 결손민주주의와 장기 386 최근에 나온 흥미로운 논문 두 편을 소개할까 한다. 하나는 2016년 말 ‘시민과 세계’에 실린 신진욱 중앙대 교수의 <한국에서 결손민주주의의 심화와 ‘촛불’의 시민정치>라는 논문이고, 다른 하나는 지난달 ‘한국사회학’에 실린 이철승 서강대 교수의 <세대, 계급, 위계: 386세대의 집권과 불평등의 확대>라는 논문이다. 신진욱의 논문은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2016년 말에 이미 결손민주주의 개념을 통해 사태의 원인과 향후 전망을 발 빠르게 분석해낸 통찰력이 돋보이고, 이철승의 논문은 필자가 평소 ‘386세대의 유통기한 만료 선언’이라고 부르던 현상과 거의 정확하게 같은 문제의식을 정교화한 것이어서 반가웠다. 두 논문을 교차해서 보면 오늘날 한국 정치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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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진의 정치시평 공화국의 배신자들 몇 해 전 일이다. 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국가들의 사회모델 비교연구를 위해 몇몇 나라를 방문해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의료, 연금, 복지 등을 담당하는 관료를 만났다. 프랑스는 GDP 대비 공적사회지출이 30%를 넘어서 OECD 1~2위를 다투고, 우리에 비하면 거의 세 배 가까이 된다. 문제는 프랑스의 재정적자가 30년 넘게 누적되고 있다는 점이다. 공적사회지출 30위권 바깥의 우리 입장에서 보면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흥청망청으로 보이기도 한다. 도대체 어쩌려고 저러는 걸까. 그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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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진의 정치시평 ‘홍카콜라’와 ‘알릴레오’ ‘홍카콜라’와 ‘알릴레오’. 재미난 대결 구도이다. 두 채널의 특징과 향후 예상되는 정치적 파급력을 비교해보자. 우선 홍준표 전 대표가 유튜브 방송을 기획하고 상당한 정도로 선전해온 것은 괄목상대라 할 만하다. 그는 2011년 <나꼼수>에 출연했을 때만 해도 “이거 언제 방송되는 거냐”고 물을 정도로 뉴미디어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사람이다. 홍카콜라가 많은 구독자와 조회수를 기록할 정도로 인기를 끌게 된 데에는 홍 전 대표 특유의 입담도 작용했겠지만, 오프라인의 정치현실도 못지않게 중요했다고 봐야 한다. 온라인 공간은 종종 정치적인 균형추의 역할을 한다. 트위터의 정치적 영향력이 극대화되어 있었던 2011년을 전후해서 보수언론은 트위터가 좌파의 소굴이자 확증편향의 근거지라는 공격성 기사를 쏟아냈었다. 그러한 평가에 동의하지도 않지만, 설사 동의한다 하더라도 그 이유는 그 당시 오프라인 세상이 우파의 소굴이자 여론호도의 근거지였기 때문이다. 온라인은 한쪽으로 치우친 오프라인의 균형을 잡기 위해 반대쪽으로 이동한다. 당시 한나라당은 안상수 대표가 ‘디지털 전사 1만 양병설’을 주장할 정도로 온라인에서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그 결과 보수정치세력이 선택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세금과 국가기관을 동원한 여론조작이었다. 당시에는 온라인에서의 열세를 만회하기가 그리도 어려웠는데, 왜 지금 홍카콜라는 일정한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이는가. 오프라인 세상이 반대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홍카콜라와 같은 우파 채널이 오프라인 세상의 균형을 잡는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