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정환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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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노동 없는 ‘자유’민주주의 정권과 공권력의 직접적인 탄압 때문에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상당히 오랫동안 없었다. 노무현 정권 때의 배달호·김주익 등과 2000년대 이후 노동자들은 1970~1990년대의 전태일·박영진·양봉수들과는 다른 상황에서 죽음으로 항거했다. 기업의 손해배상 소송 같은 신종 탄압이 원인이 되었다. 2014년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경비노동자나 2019년 ‘타다 사태’ 때의 택시 노동자도 억울함을 풀고 호소하기 위해 목숨을 버렸지만 건설노조 양회동씨의 경우와 달랐다. 더 생각해보면 이번 사건은 ‘민주화’ 이후엔 없던 일이다. 정권의 수뇌부가 노동조합을 구체적인 타깃으로 정하고, 해당 부처의 장관이 갈등을 조정하기는커녕 광기에 들린 듯 밀어붙이는 가운데 일어났다. 여당과 보수언론은 총력으로 허위 프레임과 선동을 쏟아부었으며, 검찰·경찰이 행동대로 나서 사람들을 괴롭히며 노조 자체를 말살하려 하고 있다. 형사들에게는 ‘일계급 특진’이 걸리고 건설회사 사람들에게도 억지 수사의 압박이 가해졌다 한다. 간첩이라도 찾아내는 것처럼 전국의 건설현장에 ‘신고하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리고, 계엄령이라도 내려진 듯 600여명의 노동자들이 소환 조사를 받았다. 대한민국 시민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아파트가 그렇게 많은 ‘간첩’과 ‘조폭’들에 의해 지어져왔는가. 왜 두 아이의 아빠이며 평범한 노동자 양회동씨는 ‘조폭’으로 몰려 목숨을 버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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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대학의 절망과 새 희망 지난해 겨울, 존경하는 선배 교수가 정년을 여러 해 남겨두고 대학을 떠나버렸다. 이 일은 좀 화제가 되었다. 그의 학덕과 사명감, 또 감당해야 했던 과정을 조금 아는 나도 새삼 놀랐지만, 많은 이들이 크게 의아했다. 정규직 교수는 65세 정년까지 누릴 게 많다는 인식 때문이겠다. 그러나 당자는 자신의 한계에 대해 조금 얼버무려 말할 뿐, 자신의 가치관과 대학 현실의 엄청난 격차에 대해 어떤 멋진 말로도 포장하여 말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 하는 것조차 절망의 깊이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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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특권 중산층’의 지배를 넘어… 물가와 금리 상승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크게 늘었다지만, 작년에도 사교육비가 크게 증가하여 역대 최고액을 기록했다 한다. 재미 사회학자 구해근의 책 <특권 중산층 - 한국 중간계층의 분열과 불안>(국역본 2022년 11월)은 이에 연관된 하나의 중요한 분석을 내놓는다. 구해근은 부유한 나라 한국에서 어떤 새로운 계급 분화가 진행되어 중산층이 와해되고 재구조화하는지를, 특히 신흥 특권 중산층에 초점을 맞추어 보여준다. 이를 통해 ‘조국 사태’에서부터 한동훈·정순신 등의 특권층이 벌인 ‘교육 농단’과 그 전후 맥락을 더 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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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민주노총의 쓸모 민주노총에 대한 악의에 찬 ‘귀족노조’ ‘종북’ 프레임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2018년 12월25일 고용노동부가 ‘2018년 전국 노동조합 조직 현황’을 발표했을 때가 기억난다. 일부 ‘보수’언론과 경제지의 논조는 한마디로 히스테릭했다. 그들은 노동조합 조합원 전체 수가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고, 민주노총의 조합원 수가 96만명에 이르러 한국노총을 추월했다는 사실을 두고 이제 곧 나라가 망할 것처럼 썼었다.(2021년 민주노총 조합원 수는 113만여명이며, 한국노총이 다시 제1노총이 되었다.) 그들은 노동조합에 대한 상투적인 공포를 조장하고 ‘반민노총’ 선동에 성의를 다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오히려 그때 고용노동부 발표에서 걱정해야 할 것은, 여전히 한국 전체의 노동조합 조직률이 11%에 머무르고 그나마 대부분 대기업과 공공 부문에 치중돼 있으며, 30명 미만 작은 사업장의 노조 조직률은 0.1%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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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조세희 연말 서기 2022년 크리스마스날 우주로 떠나신 조세희 선생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20세기 한국문학사가 산출한 위대한 작품이다. 이 기묘하고 아름다운 소설은 아시다시피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탁마된 한국어 문장으로 짜여 있다. 흔히 철거민촌에 산 장애인 빈민 가족의 고난을 쓴 우화로 읽히지만, 그보다 훨씬 큰 현실의 주제를 담았다.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적대와 그 지양의 방법에 대해 쓴 것이다. 특히 <난쏘공>의 후반부는 1970년대에 본격화되던 한국식 재벌-자본주의와 그에 대한 ‘노동’의 저항에 대한 것이다. 재벌과 그 2세로 표상되는 새로운 종류의 ‘경제동물’(호모이쿠노미쿠스)이 노동자와 인간의 모든 것, 영혼과 존엄까지 짓밟자 세상에 대해 깊이 고뇌하던 난장이의 아들/ 노동자는 칼을 들고 가 재벌을 찌른다. 작가는 이런 행위의 맥락과 결과에 대해 깊고도 아프게 검토한다. 그의 세계관이 여실히 담긴 이는 계급적대와 비인간화를 종식시킬 해방과 사랑의 아이러니컬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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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늑대가 돌아왔다 2016~2017년 ‘촛불항쟁’ 때 반블랙리스트 운동에 나선 문화예술인들은 이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를 꾸려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검열과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탄압을 조사했다. 그 결과 블랙리스트로 직간접 피해를 본 문화예술인이 무려 8931명, 단체는 342개로 집계됐다. 마음을 크게 다친 문화예술인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블랙리스트는 단지 일부 문화예술인에 대한 지원 배제가 아니라 정권이 ‘좌파 척결’ 따위를 명분으로 거의 전 장르에 걸친 문화예술계에 개입하여 자율성을 갖는 문화예술계를 인위적으로 바꾸고, 또 이런 작용을 통해 전체 국민에 대해 극우 이데올로기를 선전·유포하려던 ‘국가범죄’였다. 그래서 블랙리스트는 박근혜 정권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책동 같은 사안과도 이어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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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다시 국가를 묻는다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갑자기 156명의 목숨이 사라졌다. 희생자 중 10~20대가 116명이다. 세월호 참사와 그것이 남겼던 과제를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다. 지난 8년 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던가. 안전한 사회를 만들겠다던 다짐과 노력은 어디로 갔을까. 말로 다 못할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느낀다. 삶을 누리지도 못한 너무 젊은 희생 앞에서 ‘명복을 빈다’고 말하지 못한다. 거대한 사태에는 복합적이고 다기한 원인들이 있을 것이다. 한국사회는 국가와 사회 그리고 미래의 주인인 젊은이들이 살아갈 이 체제 자체에 대해 다시 진단하고 실천해야 한다. ‘국뽕’ ‘선진국’ 같은 허위의식 따위는 버리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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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청와대의 곡절, 대통령제의 곡절 15년 넘게 출퇴근길에 청와대 앞길을 지나다녔기에 대통령 관저 이전과 청와대 개방에 대해 나름의 소회가 있었는데, 이제야 청와대를 관람했다. 청와대 주변길과 근처 동네는 산 아래 터를 잡은, 오래된 서울 특유의 지세를 보여준다. 도심 한가운데지만 비교적 고즈넉하고 산록과 계곡에 기댄 의외의 장소가 많다. 계절에 따른 숲과 나무의 변화도 잘 느낄 수 있다. 동시에 청와대 근처는 엄혹하고 어두운 현대사의 기억이 깃든 곳들도 많다. 4·19 때 이승만의 부하들이 시민·학생들에게 총을 쏴 100명 넘게 죽고 상하게 만든 곳, 북에서 온 김신조부대와 군경이 교전하여 피 흘린 곳, 그리고 박정희가 부하의 총을 맞고 죽은 궁정동은 흔적만 남았는데도 섬찟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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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지방’ 생각하기 태풍 힌남노가 지나가던 때의 정황은 상징적이었다. 아직도 복구 작업이 진행될 정도로 한반도 동남 해안을 세게 타격하고 간 태풍은 일부 ‘서울사람들’에게 ‘강 건너 불’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역대급이었던 것은 태풍이 아니라 정부와 미디어의 호들갑이라며 ‘속은 느낌’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어쩌면 그런 태도는 특별한 것도 악랄한 것도 아닌, ‘중심’의 자리에서 미디어로 중계되는 ‘타자의 고통’을 보는 보통(?)의 무심함인지 모른다. 서울에서 살면서 안 건데 어쩌면 가장 자연스러운 ‘서울스러움’이란 아예 지역이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엄청난 격차와 차별 자체를 의식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거기도 카카오 택시가 있니? 그런 대학도 있어? 어, 스타벅스도 있구나.’ 단언컨대 여기에는 좌우가 없다. 어쩌면 소위 진보나 좌파가 더 심각할지 모른다. 피상적 비판의식을 갖고 있는 경우 말이다. 그들은 지방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들을 쉽게 ‘미개’나 ‘전근대’로 치부하기도 한다. 물론 중심이나 주류의 자리에 있어 갖는 무지와 무성찰은 물론 이런 ‘서울 대 촌’의 상황에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름 늘 노력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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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김건희·박순애 문제, 연구자들의 과제 대머리 남자는 주걱턱 여자와 궁합이 좋고, 주먹코 남자는 키 큰 여자와 어울리며, 콧구멍이 큰 남자는 입이 크고 튀어나온 여자와 궁합이 맞는다, 는 식의 내용을 이것저것 남의 글을 함부로 Ctrl+C, V한 것과 얽어 써도 얼마든지 ‘박사’가 될 수 있다는 현실을, 대학과 학계 바깥에 있는 이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부끄럽고 막막하다. 그런데 ‘김건희 박사’ 덕분에 오늘날 한국 대학과 학문 제도에 대한 시민의 관심이 부쩍 높아졌으니, 문제를 똑바로 보고 바로잡아볼 기회이기도 하다. 이는 단지 대학과 학문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의 근간이 걸린 큰 문제다. 김건희들은 대학과 학문을 자신들의 돈과 권력을 늘리고 또 그것을 자식에게 세습하는 수단으로 갈취한다. (지식정보와 상징자본이 제대로 분배돼 있지 않으면 민주주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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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아름다움이 우리를 지배한다 <탑건: 매버릭>(이하 <매버릭>)과 <헤어질 결심>은 서로 다른 각도에서 영화보기의 즐거움을 최대치로 선사한다. <매버릭>은 이번주에 누적 관객 수 500만명을 넘는다 하고, <헤어질 결심>은 대규모 흥행과는 거리가 있지만 시네필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 대중문화로 세계를 지배해온 미국과, 요새 콘텐츠로 세계에서 제일 잘나간다는 한국에서 만든 두 영화의 미학은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두 작품은 각각 대중오락과 예술 사이의 넓은 경계면들에 잘 걸친, 또는 그 모순적 상호작용이 최대치에 이르도록 만든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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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존엄한,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결정 어머니는 2월에 말기암 선고를 받고 11월에 돌아가셨다. 그사이에 제일 크고 ‘잘 본다’는 병원 세 군데에서 진단과 항암치료를 받았고, 고향의 한 병원에 입원하신 적도 있다. 이미 전이가 심해 수술을 할 수 없는 형편이었고, 첫 진단을 받은 병원에서는 여명이 6개월 정도라 했지만, 60대 중반의 나이였고 진단을 받기 전에는 건강한 편이었기에 환자 본인도 가족들도 ‘최선’을 찾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치료의 방향이나 성큼성큼 다가오는 죽음에 대처하는 일은 매일 혼란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환자 본인에게 암 진단 사실을 알리는 것조차 어떻게 할지 몰랐다. 그리고 친지들로부터 온갖 묘방이 들려오기도 했다. 그래서 아주 용하다는 소개에 솔깃해서, ‘카드 결제는 절대 안 된다’는 당찬(?) 선언과 함께 진료를 시작하는 서울 종로구의 모 한의원에서 폐 전이에 좋다는 약을 지은 일도 있었다. 바보 같은 일이었다. 이때는 2004년.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연명의료법)도 없었다. 호스피스 병원이 뭔지도 잘 몰랐다. 뭔가 상당히 ‘미개’했지 않은가? 그때에 비하면 한국사회의 ‘죽음의 질’은 많이 나아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