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
음식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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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음식과 일상의 말 너무 세다. 급하다. 거칠다. 한마디 한마디 그 목소리가 지나치게 높고 날카롭다. 표현과 수사가 구구절절 극으로 치닫기만 한다. 침소봉대(針小棒大)가 기본값이 되고 나니 양두구육(羊頭狗肉)에도 둔감해지고 말았다. 음식을 둘러싼 말글 말이다. 음식 또는 미식이 업인 사람들의 말글뿐 아니라, 일상 속 음식에 잇닿은 말글이 오늘 대개 그렇다. 장삼이사들이 살아가는 골목, 일터가 되는 길거리, 매일의 반찬거리를 대느라 돌아다니는 시장 여기저기 내걸린 음식의 말글이 어느새 그렇게 되고 말았다. 이런 것이다. 닭갈비집의 모든 재료는 닭갈비의 고향 춘천에서 공수하고, 팥빙수집 팥은 기가 막히게들 정선, 경주, 나주, 신안 등 팥 주산지에 자리한 큰아버지네 또는 외삼촌네서 농사 지은 팥을 직접 공수해 쓴다고들 한다. 부모님의 시골 텃밭에서 쌈거리를 공수하는 백반집과 한정식집이 어느 동네에나 넘치게 있다. 심지어 내 텃밭을 두고 영업한다는 고급 음식점에서는 ‘방금 텃밭에서 공수한 채소’를 쓴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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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민어 해마다 이때면 특정 주제에 따른 ‘원고 청탁’이 돌아온다. 엉겁결에 받은 전화, 대뜸 ‘복날 먹는 거’로 써 달라는 말이 건너왔다. 그 ‘먹는 거’ 가운데 ‘민어’는 이미 정한 바였다. ‘이열치열’로 기둥 세우고, ‘반가 음식’에 ‘복달임’으로 벽 치고 지붕 인다는 속내를 바로 알아챘다. 갸우뚱하다 답했다. “복달임의 핵심은 지역과 공동체의 휴식, 온열질환 예방을 위한 땡볕 피하기예요. 지혜는 그런 데 있어요. 오로지 먹는 소리면 복달임의 참모습을 말할 틈이 없죠. 휴일의 휴식에 별미 있으면 더 좋겠죠. 삼복 중의 식재료와 음식이 다 복달임이 됩니다. 민물잡어가 그중 만만했고, 잘 익은 과일, 과채가 오히려 청신합니다. 있는 대로 수박, 참외 나누어 먹고 버무리나 개떡쯤이 휴식의 별미로 넉넉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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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민족주의 이전의 ‘민족성’ “벌써 7년 전 과거가 되었다만은 (…) 조선의 요리 독립까지 잃어버리는 것을 구경했다. (…) 장유(醬油)라는 것이 우리나라 간장을 동화시켜 가지고 소위 선일융화(鮮日融和)를 실현시켰다. (…) 고추장, 김칫국 몇 가지가 하도 어이가 없는 듯이 한구석에 박혀 있는 꼴이라고는 적막해서 볼 수 없었다.” 동아일보 1923년 3월3일자에 실린 김재은의 회고다. 7년 전이니 1916년이다. 기미년 만세 시위가 터지기 3년 전이다. 기고자는 “사랑”과 “근심” 때문에 글을 썼다는데 고추장, 김칫국이 한구석에 처박히듯 조선 음식이 처량해진 내력을 돌아보매 이렇다. 일식 전골인 스키야키는 고급 조선요릿집에서 신선로를 진작에 “구축(驅逐)”했다. 스키야키가 밥상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일식 절임인 복신지(福神漬·후쿠진즈케)가 따라붙었다. 후쿠진즈케라는 “들척지근한 물건”이 조선의 짠지를 “정복”했다. 후쿠진즈케는 일제 군대의 급양이 서양식으로 바뀐 가운데서도 지급된 일식 반찬이다. 또한 양과자는 다식을 대신하고, 정종은 조선의 소주를 “병합(倂合)”해 전횡을 다했다. 그러고는 장유, 곧 일식 간장인 쇼유가 맛 설계의 바탕인 조선의 간장을 동화함으로써 선일융화, 곧 조선 사람의 일본인화가 실현되었다. 선일융화를 뒤이은 통치 구호가 ‘내선일체(內鮮一體)’다. 1936년 부임한 제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가 내세운 바다. 먹어 들어가는 쪽에서야 융화네, 한 몸(一體)이네 못할 소리가 없겠지만, 실제로는 한쪽의 절멸을 바라는 수작 아닌가. 1910년 나라 망한 지 6년 만에 조선의 미각 상상력도, 음식도 적막한 지경에 이르렀다. 당하는 쪽에서 볼 때에는 한 역사 공동체 절멸의 징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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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카스텔라와 카스테라 사이에서 일본사에서 천정(天正) 시대, 그러니까 서기 1573~1592년 사이에 나가사키로 처음 들어왔다. 중개자는 포르투갈 사람들이었다. 그 조리 방법은 이렇다. 달걀, 설탕, 밀가루, 꿀, 맥아당(조청), 우유 등을 섞어 뻑뻑한 반죽을 만들어 나무틀에 붓는다. 틀은 일본에서 구하기 쉬운 삼나무 계통 목재를 쓰면 그만이다. 반죽은 오븐에 넣고 구워야 한다. 번듯한 유럽식 오븐을 당장 만들기 어렵다면? 쓰던 아궁이 또는 화덕을 손보아 대류열을 가둘 공간을 확보하면 그만이다. 대단한 교육을 받지는 않았으나 원리를 파악해, 내가 구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지고, 쓸모 있는 사물을 만들어 내는 솜씨 또는 그 결과를 ‘브리콜라주(bricolage)’라고 한다. 브리콜라주로 조리의 한 고비를 넘기면 결과를 기대할 만하다. 한 시간쯤 불 조절에 주의해 잘 구우면 맛난 과자가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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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빙수 “여보, 일어나 빙수나 한 잔 자시오. 좀 속이 시원하여질 테니. 이제 울으시면 어짜요? 다 팔자로 알고 참아야지. 나도 젊어서 과부 되고 다 자란 자식 죽고… 그러고도 이렇게 사오. 부모 없는 것이 남편 없는 것에 비기면 우스운 일이랍니다. 이제 청춘에 전정(前程·앞길)이 구만리 같은데 왜 걱정을 하겠소. 자 어서 울음 그치고 빙수나 자시오. 배도 자시구.” 1917년 ‘매일신보’에 연재하다 이듬해 단행본으로 묶인 이광수 소설 <무정(無情)>의 한 장면이다. 초여름 더위가 성큼 다가온 경성의 6월, 주인공 형식의 하숙집을 찾아온 영채가 하루아침에 오빠와 아버지를 잃고 홀로 된 저간의 일을 털어놓다가 그만 복받쳐 쓰러진다. 형식과 영채는 어려서 함께 자란, 오누이 같은 사이다. 우는 영채는 숨이 넘어가는데 하숙집 주인 노파가 얼른 시장에 달려가 빙수를 사 온다. 위로랍시고 뱉은 말이라곤 ‘팔자’에 ‘전정 구만리’에 갈 데 없는 봉건적인 수사요, 듣는 쪽에게 위로가 될 리 없는 무정한 낡은 언어인데, 빙수 한 사발이 노파의 소박한 자매애를 간신히 구원했다. 빙수는 실제로 타는 속을 달래고, 몸과 마음의 열을 식히는 효과가 있었을 테지. 냉장고 보급률 높지 않던 시대, 한여름의 빙수나 얼음물이 보통 사람의 감각에 준 충격, 각성의 감도는 오늘날과는 달라도 한참 달랐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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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이방인냉면 “봄바람이 건 듯 불어 잠자던 모란대에 나무마다 잎 트고 가지마다 꽃피는 3, 4월 긴 해를 춘흥에 겨워 즐기다가 지친 다리를 대동문 앞 드높은 2층루에 실어놓고 패강(浿江, 대동강) 푸른 물 따라 종일의 피로를 흘려보내며 그득 담은 한 그릇 냉면에 시장을 맞출 때!” 식민지시기의 인기 잡지 ‘별건곤’ 1929년 12월호에 실린 평양냉면 예찬의 한 대목이다. 오늘날의 한국어로 풀어 써도 바로 읽기가 만만찮다. 요컨대 봄바람 살랑 부는 봄은 생명이 움트는 봄의 정취에 취해 대동강 푸른 물 따라 놀기 좋은 때이며 “가득 담은 한 그릇의 냉면”의 제철이라는 소리다. 여기서 평양냉면을 수식하는 한마디는 “사시명물(四時名物)”이다. 곧 봄여름가을겨울의 냉면 맛이 다 따로 있으니, 사계절이 다 이유 있는 냉면의 제철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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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천의 얼굴을 지닌 음식 ‘비빔밥’ “골동(骨董)요? 예술적 가치가 있는 고미술품 또는 우아한 소품이란 뜻이 있지요. 그런데 자질구레해서 무어라 분류하기 어려운 옛날 물건이라는 뜻도 있어요. 골동에서 ‘예술적 가치’나 ‘우아함’이 빠지면 엿이랑 바꾸어 먹을 폐품에 가까운 고물이죠.” 새봄, 새순 올라오는 철이라 그런가. 비빔밥 이야기를 해달라는 분도 부쩍 늘었다. 어떤 분들은 비빔밥에다 굳이 오색오미, 오방색의 철학, 한식의 도(道) 등등 넘칠 지경의 수사(修辭)를 이미 깔고 물어온다. 이때 비빔밥의 한자 표현인 ‘골동반(骨董飯)’이 비빔밥의 가치와 우아함을 단박에 드러낼 마법의 어휘로 보이기도 하나 보다. 아마도 ‘골동’이란 말이 훈련된 취향과 점잖은 취미의 후광을 뿜기 때문일 테다. 그런데 그 후광이 너무 세, 골동품과 고물 사이가 아주 좁다는 점은 또 생각지 못할 수도 있긴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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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한국인은 돼지고기를 사랑한다? “ ‘한국인의 돼지고기 사랑’ 운운할 에피소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자주 접할 수 있고, 게다가 상대적으로 싼 식료를 결국 사랑하게 되긴 하겠지요.” 설까지 지났다. 제대로 기해년(己亥年)이다. 12지의 동물로 치면 돼지의 해다. 그래서인가, 돼지와 돼지고기에 관해 묻는 전화며 이메일이 부쩍 늘었다. 그런데 ‘한국인은 돼지고기를 사랑한다’를 똑 떨어진 명제로 삼는 분들을 겪다가 굳이 위와 같은 답변까지 따로 준비하게 되었다. 인류는 자원을 다음 대에 전수하며 사랑과 기호와 상징을 한 자원에 부여하게 마련이다. 묻는 분께 어깃장 놓기가 아니다. 성심껏 답하느라 앞뒤가 바뀐 소리에 굳이 토를 달고, 내가 할 수 있는 답을 하려는 뜻이다. ‘황금돼지의 해’까지 운운하면 더욱 난감하다. 금(金), 수(水), 목(木), 화(火), 토(土) 오행(五行)의 토에 엮인 것은 10간 가운데 ‘무(戊)’와 ‘기(己)’이고 그 상징색은 황색이다. 금에 엮인 것은 10간 가운데 ‘경(庚)’과 ‘신(申)’이고 그 상징색은 백색이다. 신해년(辛亥年)이 돌아오면 ‘백금돼지의 해’라 하든지, 외국어 쓰기들 좋아하니 플래티넘(Platinum) 가져다가 말을 만들든지, 암만해도 기해년은 황토색, ‘누렁돼지의 해’가 아닌가 싶어 이 글 쓰는 내내 갸웃거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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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컵밥 시대에 다시 생각하는 ‘심노숭’ “농부가 매일 먹는 것이라고는 조밥에 나물 반찬에 지나지 않는다. 몹시 힘들여 별식을 만들어 봐야 뭉텅이로 썬 떡에 형편없이 싱거운 술이다. 귀공자가 이 모습을 보고 비웃는다. ‘이렇게 하찮은 것을 먹으니 어찌 병이 나지 않을까?’ 부잣집은 하루 식비로 일천전(錢)을 써 기린을 삶아 죽 끓이고, 용을 썰어 젓갈 담근 듯한 천태만상의 기이하고 야릇한 음식을 밥상에 벌여 놓는다. 시골에서 글깨나 읽은 사람이 이 모습을 보고 탄식한다. ‘저렇게 사치를 부리니 어찌 망하지 않을까?’” 조선 문인 심노숭(沈魯崇, 1762∼1837)이 쓴 <제향루집서후(題香樓集敍後)> 속 한 구절이다. 아주 정통적이고 고답적인 글쓰기와 보다 가벼운 글쓰기 사이의 차이, 그 둘의 엇갈림에 관한 맥락에 놓인 구절이지만 ‘컵밥’과 ‘파인다이닝’이 엇갈리는 시대에 굳이 다시 읽게 된다. 아닌 게 아니라 글쓴이는 실로 잘 먹을 수 있는 환경에서, 잘 먹고 산 사람이다. 소고기라면 구이·전골·산적·육포·장조림 등 갖가지로 해 먹어치웠다. 구이용기는 벽장에 따로 보관했다. 돼지고기에 대해서는 라드를 입속에 녹여 먹는 한편 비계를 저며 불에 구워 먹는 섬세한 미각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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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100년 전 ‘문자 먹방’ “그대로 척 들어서서 ‘밥 한 그릇 주’ 하고는 목로 걸상에 걸터앉으면 1분이 못 되어 기름기가 둥둥 뜬 뚝배기 하나와 깍두기 접시가 앞에 놓여진다. 파양념과 고춧가루를 듭신 많이 쳐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어 가지고 훌훌 국물을 마셔가며 먹는 맛이란 도무지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가 없으며 무엇에다 비할 수가 없다.” 식민지 시기의 인기 대중잡지 ‘별건곤(別乾坤)’ 1929년 12월호에 실린 ‘문자먹방’ 가운데 하나다. 이 잡지는 조선 기생과 할리우드 배우를 아우른 연예계 이야기, 통속적인 흥미를 살살 긁는 뒷골목 애정 비화, 섹슈얼리티를 자극적인 양념으로 삼은 풍문과 얄궂기 이를 데 없는 괴담과 추문을 적절히 요리할 줄 아는 잡지였다. 먹는 소리, 문자먹방에서도 발군이었다. 음식을 자주 다루었고, 집중력이 있었다. 고릿적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식민지 대도시의 풍경에, 일상의 풍속에, 연애하는 남녀의 산책길에, 밤 산책에, 당대 보통 조선 사람이 일평생 갈 일 없는 나라 이야기에, 어떤 상황에든 곧잘 먹는 이야기를 가져다붙였다. 일상의 음식을, 일상의 감각에 스며들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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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별미뿐만이 아닌 겨울 2018년 입동(入冬)이 벌써 지나갔다. 소설(小雪)과 대설(大雪)도 휙 지나갈 테지. 전통사회의 일상 감각에서 입동은 바야흐로 겨울이 바라보이는 때다. 입동이란 ‘겨울에 들어서다’가 아니라 ‘이제 곧[立] 겨울[冬]이다’ 하는 뜻이다. 본격적인 겨울은 소설 즈음에 시작된다고 느꼈고, 대설 즈음에 한겨울을 실감했다. 이윽고 동지(冬至)가 되면 한 해가 이울었다. 눈이 펑펑 내려 쌓이지 않을지라도 찬바람과 언 땅에 겨울이 먼저 깃들었다. 정학유(1786~1855)의 <농가월령가> ‘11월령’의 첫 구는 대설 즈음 당시 사람들이 느낀 계절 감각을 여실히 드러낸다. “십일월은 중동[仲冬, 한겨울]이라 대설동지(大雪冬至) 절기로다/바람 불고 서리 치고 눈 오고 얼음 언다.” 이때는 농민과 서민이 한 해의 결산을 하는 때이기도 했다. 춘궁기에 관청에서 꾼 곡식의 상환, 세금과 소작료 내기, 그리고 일꾼에게 줄 품삯과 빚에 대한 결제는 음력 11월에 반드시 마무리하려 했다. 그러다 보니 아등바등 한 해 내내 지어 갈무리한 곡식이 어느새 야금야금 이 구멍 저 구멍으로 빠져나갔다. 고물가-저임금 시대를 사는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월급은 월급날을 스쳐지날 뿐’이라고 자조하지만 <농가월령가>에도 비슷한 표현이 있다. “엄부렁하던 것이 남저지 바이없다.” “갈무리한 곡식이 처음에는 많아 보였지만 여기저기 갚다 보니 남은 것은 거의 없다”라는 뜻이다. 그래도 “콩나물 우거지로 조반석죽(朝飯夕粥) 다행이다”라고 읊을 여유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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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국탕 따끈한 국 한 사발이 간절한 계절이다. 국자, 탕자 돌림 음식과 한국인의 식생활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 아닌가. 더구나 쌀쌀해지는 데에야. 세상에 자식을 낸 모든 어머니와 세상에 온 모든 아들딸을 위로하고 축하하는 미역국, 일상생활의 푸근한 벗 콩나물국, 젖산 발효의 미덕을 쥐고 따듯함을 더한 김칫국, 농민과 노동자의 한여름을 위로한 추어탕, 국물 내기의 기본기를 환기하는 곰탕과 설렁탕, 바닷바람과 바다의 날빛을 아우른 북엇국, 해안 주민의 오랜 친구인 김국과 매생이국, 채소와 고기가 손잡은 미각이 한 사발 비우는 내내 상승하는 소고기뭇국과 육개장 등등 국탕 한 그릇과 맞물린 추억 한 조각 없는 한국인은 드물리라. 이쯤만 나열하고도 미안하다. 이루 다 손꼽기 어려운 채소, 나물, 고기, 수산물이 다 국탕으로 변한다. 주재료와 부재료의 갈마듦도 다채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