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
음식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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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삼계탕 1856년 유월, 양반 이우석(李愚錫, 1829~1903)이 아버지께 하루 세 차례 ‘인삼계고(人參鷄膏)’를 달여 올렸다. 이우석이 50년간 쓴 일기인 <하은일록>에 따르면 이우석은 어머니께도 ‘삼계’를 올린 적이 있다. 자신은 하루 다섯 차례 삼계를 고아 모조리 마신 적이 있다. 그 동생도 하루 세 차례 삼계를 ‘복용(服)’한 적이 있다. 몸이 허하다 싶을 때, 허한 몸이 설사와 복통에 시달릴 때의 처방이 인삼계고 또는 삼계고였다. 말 그대로 삼과 닭을 고아서 뽑은 되직한 진액(膏) 형태의 약이다. 1894년 갑오년의 농민 봉기를 빌미로 조선에 들어온 청·일 군대가 조선 땅 성환(成歡)에서 한판 붙는 난리가 나자, 호서 양반 대교 김씨(大橋 金氏)는 신주를 땅에 파묻고 피난길에 오른다. 피난길에 아내가 몸살에 시달리자 쓴 약이 닭 한 마리와 인삼 세 뿌리를 달인 ‘삼계음(參鷄飮)’이다. 여기서 ‘음’이란 ‘고’보다 묽은 유동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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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참외 “수박을 귀족적이요 부르주아적이라 할 것 같으면 참외는 평민적이요 프롤레타리아적이다.” 1928년 7월 발간된 ‘별건곤’ 제14호를 넘기다 웃음이 터졌다. 여름이면 무더기로 쌓이는 과채에 무슨 이런 어마어마한 소리람. 꼭지의 제목은 게다가 ‘참외로맨스’. 이에 따르면 참외는 과채의 ‘왕’이다. 역대 문헌을 펴면, 그렇게 쓸만해서 썼음이 여실하다. 한국통감부 기관지 경성일보 기자 우스다 잔운(1877~1956)은 이렇게 썼다. “조선인이 연중 가장 즐겨 먹고 무섭게 먹어대는 것은 참외이다. (중략) 길을 걸으면서도 먹고,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서도 먹는다. 참외는 시중 어디서나 판다. 조선인은 여름에 참외로 살아가는 것이다.” 소론의 영수 윤증(尹拯, 1629~1714)은 사당에 올릴 여름 제물로 앵두·보리·수박·참외를 손꼽았다. 이응희(李應禧, 1579~1651)는 일찍이 참외(眞瓜)의 ‘참(眞)’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가슴 씻는 시원함, 금빛 속살, 꿀 같은 단맛의 매력을 노래했다. 여름철의 진짜배기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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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멸치 “우리집 김치 맛은 어제오늘로서 간단하게 이뤄진 것이 아니다. (중략) 외할머니의 정결한 손끝으로부터 비롯되어진 것이다. (중략) 우리 전라도에서는 김치를 담글 때 새우젓을 쓰지 않고 멸치젓을 사용한다.”(경남매일신문 1968년 11월27일자) 천경자(千鏡子·1924~2015) 화백이 40대에 남긴 글이다. 천 화백은 한국에 해외여행의 자유가 없던 시절에 기어코 유럽으로, 아프리카로, 아메리카로 나갔다. 우물 안 개구리로 살기 싫은 예술가가 사증을 받기 위해 당국에 발휘한 건 기지(奇智)였을까, 의지(意志)였을까. 천 화백은 종군화가 신분으로 베트남 땅을 밟기도 했다. 아무튼 김치는 남다른 삶을 산 인물의 고향이 전남 고흥임을 여실히 드러낸다. 천 화백에게 김치는 “어떤 전통적이고 감각적인 맛”이었다. “멸치젓에 갓만 넣고” 담근 갓김치는 그 가운데서도 강렬한 추억이었다. 그리고 천 화백이 느낀 ‘우리집 김치’ 맛의 열쇠인 멸치젓은 한국 음식문화사에서 최근 100년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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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봄물김치 물김치 한 사발이 간절한 즈음이다. 짭짤하면 짭짤한 대로 삼삼하면 삼삼한 대로 김칫국물 한 사발을 목구멍에 왈칵 넘기고 나면, 그 기분 좋게 쩡한 간질임에 사람의 오감이 새로워질 것만 같다. 처지고 쭈그러졌던 몸과 마음이 주저앉은 자리를 그대로 박차고 일어설 수 있을 것만 같다. 물김치 한 사발을 벌컥벌컥 들이켜고서 ‘세상의 나쁜 기운아 물렀거라, 내가 간다!’ 소리라도 한번 지르고 싶다. 조선의 문인 서유구(徐有榘 ·1764~1845)는 일찍이 새봄에 무와 움에서 움튼 무순으로 담근 물김치의 관능을 이렇게 말했다. “(주재료에다) 파와 고추로 담근 물김치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도 모르는 사이에 문득 봄기운을 일깨운다(令人頓生春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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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미나리 “순무, 무와 상추/ 푸른 미나리, 흰 토란에 붉은 차조기/ 생강·마늘·파·여뀌로 오미를 갖추어/ 잘 데쳐서는 국 끓이고 담그기는 김치(菹)라네.” 조선 문인 서거정(1420~1488)이 노래한 채마밭 풍경이 그저 소담하다. 평화로운 일상이란 이런 법이지 하며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가운데 미나리는 새봄의 맛을 대표하는, 한국인 누구에게나 친숙한 채소다. 워낙 한반도 어디서나 잘 자라 일찍이 텃밭이며 습지에 심어졌고, 상하귀천 모두의 국·나물·김치가 되어주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도 미나리는 도시 근교 농업과 맞아떨어졌다. 박지원(1737~1805)은 오늘날 왕십리의 무, 석관동의 순무, 서소문 밖의 가지·오이·수박·호박, 연희동의 고추·마늘·부추·파·염교, 청파동의 미나리, 이태원의 토란을 가장 환금성 높은 서울 채소로 손꼽았다. 1831년 청나라를 다녀온 한필교(1807~1878) 일행은 낯선 음식에 질려 먹는 타령 하던 끝에, 팔뚝만 한 무, 희디흰 배추 줄기, 청파동의 미나리로 김치를 담가 먹었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소리를 하게 되었다. 함께 앉아 있던 사람들의 반응은? 듣고 있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침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마치 눈앞에서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고 있는 듯”했단다. 아,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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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명태 겨울 생태탕, 동태찌개의 맛이란 아련한 추억이다. 북엇국, 황태국은 어떤가. 이 모두가 명태(明太·Alaska Pollack)에서 온다. 생태는 잡은 그대로의 명태이다. 급속 냉동한 것이 동태, 그냥 말리면 북어, 얼다 녹으며 노랗게 부풀도록 말리면 황태다. 나라가 동강나자 동해안의 실향민은 미시령과 대관령 아래에서 황태 문화를 이어갔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동해상의 밀수를 통해 북의 명태가 남으로 오고, 남의 곡물이 북으로 갔다고도 한다. 나라는 갈라졌어도 명태 문화는 이어졌다. 그만큼 명태가 한국인의 일상에서 소중한 식료라는 뜻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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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방어 초대형 고등어인가도 싶고, 앙증맞은 다랑어인가도 싶은 바닷물고기 방어의 계절이다. 방어는 일찍이 기록된 수산자원이다. <세종실록> 19년(1437) 기사는 함경도와 강원도의 요긴한 수산자원으로 대구·연어·방어를 손꼽았다. 1670년경 쓰인 <음식디미방>은 청어 백 마리에 소금 두 되를 뿌리고 땅에 묻어 삭히는 청어젓갈을 기록하면서 똑같이 담그는 방어젓갈을 부기했다. 조선의 박물학자 서유구(1764~1845)가 쓴 어류학서 <난호어목지>에도 ‘방어’ 항목이 있다. 방어를 동해 특산으로 보되, 함경도에서부터 오늘날의 경상도 연안까지를 주산지로 꼽았다. 같은 책의 ‘멸치’ 항목도 재밌다. 이에 따르면 동해의 멸치가 방어에 쫓겨 엄청난 규모로 해안으로 몰려올 때엔 그 형세가 바람 불고 물결 이는 것과 같다. 어부는 이런 현상을 보고 방어가 온 줄 안다. 큰 그물로 에워싸 잡으면 온 그물이 다 멸치로 차는데 거기서 방어는 골라내고, 멸치는 삼태그물로 건진다. 실제로 방어의 중요한 먹이는 전갱이, 정어리, 고등어, 멸치 등이다. 이런 등속을 잡아먹으며 살지다 겨울에 기름기가 절정에 달한다. 회를 뜨면 깔끔한 등살에서부터 기름진 배꼽살까지 그 맛과 질감이 다양하다. 뱃살·목살(가마살)·담기골살(지느러미의 줄기를 받치는 부위)·꼬리살 등 칼 쓰기에 따라 다양한 부위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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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눈물 젖은 떡국 “떡국을 끓여 놓고.” 약 100년 전인 1926년 2월, 세 차례에 걸친 동아일보의 설 기획 제목이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새해 떡국을 끓여놓고도 온 가족이 모이지 못할 사정이 늘고 있었다. 땅 없는 농민과 빈민이 고향을 등지고 팔도의 도시로 흩어졌다. 일본, 만주, 중국, 러시아로, 더 멀게는 하와이, 캘리포니아, 유카탄반도, 쿠바 등지로도 흩어졌다. 극소수 조선인 부자의 여행이나 유학을 빼고는 다 살자고 발버둥치다가 생긴 이산이었다. 식민지 특유의 이산도 있었다. 일제에 맞선 이들의 옥살이가 낳은 이산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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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떡국 떡국, 이 조촐하고 우아한 음식이 언제부터 한국인의 새해 명절에 깃들었을까. 알 길이 없다. 문헌을 뒤지면 김매순(金邁淳, 1776~1840)의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며 홍석모(洪錫謨,1781~1857)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속에 오늘날과 비슷한 떡국이 등장한다. 조선 후기 문인들이 기록한 소고기 바탕의 장국에 끓인 떡국은 방신영이나 조자호 등 식민지 시기에 활동한 음식 연구자들의 음식책 속에서도 이어졌다. 서울 중심 기록 밖의 떡국은 더욱 다양하다. 지역마다 떡을 다루는 방식도 다르고, 지역에서 나는 재료를 떡국에 얼마든지 창의적으로 쓰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개성의 조랭이떡국은 어슷썬 떡이 아니라 누에고치 모양으로 가운데가 들어가도록 만든 떡을 쓴다. 떡의 모양도, 식감도 재미나다. 경주 쪽에는 옹근 원형으로 떡을 썰어 끓이기도 한다. 굴이나 조개가 많이 나는 데서는 굴과 조개가 떡국의 바탕이 된다. 전남 해안의 매생이떡국도 별미이다. 마침 굴과 매생이는 나는 철도 비슷하고 서로 맛의 조화도 뛰어나다. 굴과 매생이가 다 잘 나는 지역에는 당연히 굴매생이떡국이 있다. 충북 바다 쪽에서는 미역떡국을 끓였고, 경남 해안에는 물메기떡국도 있었다. 1960년대 이후 멸치가 본격적으로 한국인의 육수거리가 되면서는 당연히 멸치떡국이 등장했다. 강원도의 황태떡국은 더 설명할 것도 없겠다. 다슬기가 잘 잡히는 호서 내륙에선 다슬기 육수에 된장 간을 해 다슬기떡국을 해 먹기도 했다. 광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 내륙에는 닭고기장조림인 ‘닭장’을 바탕으로 한 닭장떡국이 있다. 고기는 물론 뼈에서 우러난 닭의 풍미와 완성된 장조림의 감칠맛이 흰떡과 어울린 닭장떡국 또한 한 번 맛을 보면 잊을 수 없는 별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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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뭉클한 김치 “된장찌개, 깍두기, 장김치 같은 것도 시골 가서는 서울 것 같은 것을 먹을 수 없다. 외국에 간 사람이 자기의 가족보다 서울의 김치깍두기 생각이 더 간절하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식민시기의 인기 잡지 ‘별건곤(別乾坤)’ 1929년 제23호 ‘경성(京城)명물집’ 꼭지의 한 문장이다. 된장찌개에서 김치깍두기마저 서울식이 따로 있었다는 말이다. 가령 떡이라면 “서울의 떡 중에 색절편(오색삼색으로 색깔을 낸 절편)은 시골에서 볼 수 없는 찬란한 떡이다”라고 할 만큼 서울 향토색이 그때까지 음식에 남아 있었다. 지역 김치가 떠올라 꺼낸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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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검색창 속 ‘선지’ “(전략) 고려 말기의 중국어 회화교본인 <노걸대(老乞大)>에 술 깨는 국이라는 뜻의 성주탕(醒酒湯)이 나온다. 이것이 해장국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의하면 ‘육즙에 정육을 잘게 썰어 국수와 함께 넣고 천초(川椒)가루와 파를 넣는다’고 되어 있어 얼큰한 오늘날의 해장국과 그 기본이 같다.” 한국에서 제일 크다는 포털사이트에서 ‘해장국’을 검색하면 요식업 가맹사업자의 광고부터 나온다. 광고에 깔린 ‘지식백과’를 클릭해 들어가면 위 문단이 ‘정보’의 맨 처음이다. 해장국을 파는 업체나 가게에서는 여기에 기대 ‘<노걸대>에 나오는 해장국’을 앞세운 광고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주탕’ 세 글자 빼고는, 없는 소리다. 저 문단은 낭설이다. 우선 이 책의 편찬과 출판의 연대기부터 들여다보아야 한다. <노걸대>는 조선 세종 때 편찬되기 시작한 중국어 학습서로 <번역노걸대>(1517), <노걸대언해>(1670), <중간노걸대언해>(1795) 등이 전해온다. ‘노걸대’는 중국인을 뜻하는 말인데 나중에는 만주어 학습을 위한 <청어노걸대>, 몽골어 학습을 위한 <몽어노걸대>까지 나왔다. 중국어 외의 어학서에서 노걸대를 빌린 것이다. 이 가운데 <노걸대언해>에 ‘성주탕’이라는 어휘가 딱 한 번 나오고, 성주탕을 언해(諺解)해 ‘술깨오는탕’이라고 했다. 이것으로 끝이다. 조리법은 나오지 않는다. 천초(초피)와 소금으로 양념을 해가며 고기볶음을 하면서, 남의 음식에 타박도 하는, 절로 웃음이 나는 장면이 <청어노걸대>(1765)에 나오기는 한다. 하지만 해장국은 없다. 이것으로 끝이다. <노걸대언해> 속 성주탕과 오늘날의 해장국 사이에 어떤 접점이 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성주’는 ‘술을 깨다’라는 뜻이다. 옛 동아시아에서 자연스러운 말이고, 흔히 쓴 어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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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국·탕·찌개와는 다른 일품 국물요리 ‘전골’ 따끈한 국물이 떠오르는 계절이다. 한국인의 밥상에는 온갖 국물 음식이 오른다. 안 보이면 섭섭하다. 유럽과 아메리카 사람들이 끼니마다 와인·맥주·탄산수를 곁들이고, 중국과 인도, 서남아시아며 아프리카 곳곳의 사람들이 끼니마다 차 없이는 못 산다면, 한국인에게는 국탕·찌개·전골이 있다. 저들의 주식인 빵·찐빵·난이란 덤덤하기 이를 데 없다. 탕면 빼고는, 국수는 뻑뻑하다. 맹물만으로 부족한 저작(咀嚼)과 목넘김을 돕느라, 시거나 달거나 쌉쌀하거나 특유의 풍미를 띤 와인·맥주·탄산수 또는 차를 마실 수밖에 없다. 나란히, 한국인에게는 짠맛 위에 복합적이면서 풍성한 풍미를 세운 국물이 고맙다.